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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니체, 계보학, 역사> 비판 관련된 주제의 발제문을 올림(주석이 생명인데 주석을 옮기기 어려워 그냥 파일로 올림) 더보기
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2-2) 금방 쓰겠다고 얘기해놓고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지난 글은 쓰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끊고 마무리한 것이었고, 그러니 바로 이어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쓰는 게 오래걸렸습니다. 물론 이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쓰려고 했던 방향으로 쓸 수 없겠다는 진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글은 루소의 서문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전 루소가 소설의 유용성을 문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졸라로 시작했지만, 원래는 졸라를 제물로 삼고 루소를 얘기하려고 했었고요. 그런데 막상 졸라를 읽으니 졸라의 기획을 졸라와 다른 방식으로 옹호하고 싶어졌습니다.(나중에 얘기할 수도 있을텐데, 졸라는 콩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2-1) 저번부터 후속 편을 예고했었는데, 이래 저래 안 쓰게 되었습니다. 썰로 풀고 나니 김이 빠져서 딱히 쓰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뭐라도 써야할 것도 같단 의무감을 느끼던 중 졸라를 보다 뽕이 올라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가 이어가고 싶었던 문제를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예술의 재현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흔적은 결국 “재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재현성으로는 그 어떤 중요한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술 특유의 재현성은 물론이고, 예술을 통해서 실천할 가치가 있는 정치적 개입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하는지 유무가 아니라 좋은 재현 예술, 좋은 정치적 예술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입니.. 더보기
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1)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 대해서 얘기하려니 생각이 많아지네요.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들을 꺼내보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이런 물음에서 시작해보죠. 비극과 히극에 대한 니체의 견해에 제가 주목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물론 논문으로 써보기에 적합한 주제라서 주목했을 수도 있습니다. 비극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있지만 희극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는 것에 불만을 느꼈던 것도 있고요. 설사 비극에 대한 “많은 얘기들”에도 많은 불만을 품고 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런데 제가 니체의 희극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웃음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습니다. 니체의 웃음에 대해서는 좀 병맛의 것들일지라도 얘기는 되어 있거든요. 전 그런 얘기들 자체에 신물이 났습니다. 뭐 얘기 자체는 그렇게 나쁘.. 더보기
문학론, 혹은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에 대하여 조지에게 보냈던 편지 쓰는 데 참 오래 걸렸네요. 조사와 연구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거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 했습니다. 반쯤은 게으름 때문에, 반쯤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에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변명으로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날 전 김애란의 에 대해서 심판했습니다. 저 작품이 정치적 예술일 수 없다고 주장했으니 말이죠. 비록 제가 일단 제 비평은 그때 언급된 김애란의 과 무관합니다. 전 저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고, 지금 제가 다루려는 문제는 어떤 특정한 작품에 대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제안했던 것처럼, 제 논의는 예술 일반과 비평 일반을 향해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일반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더보기
레비스트로스에서 모스로 저번부터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해석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야 뭘 좀 끄적거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성급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거기도 합니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데리다가 레비스트로스의 루소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를 비판하고 싶었는데, 데리다의 방식은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제가 언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지금 수준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충분히 의미 있을 듯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인정해야할 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해석이 기괴하거나 오독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를 현대 인류학의 선구자로 내세우며, 모스가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명하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의 진정한 기여는 인.. 더보기
프레게의 동일성 개념에 대하여 최근 지시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를 느껴 프레게의 를 다시 좀 읽어보았는데(다 읽은 것도 아닌...) 뭔가 다른 게 좀 보이더라고요. 지시에 대한 프레게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 동일성에 대한 프레게의 입장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프레게는 본인이 에서는 동일성이 이름들 사이의 관계인 것처럼 다뤘지만, 동일성을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에서 진단하죠. 동일성은 이름들 사이의 관계일 수 없습니다. “a=a”와 “a=b”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름들 사이의 관계라면 “a=b” 또한 “a=a”와 다르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인식적인 차이든 무엇이든 차이가 있으며, 이런 차이를 이름들 사이의 관계로, 표현상의 문제로 여기는 한 이 차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때문.. 더보기
버클리의 시각이론과 철학 최근 남들 욕만 한 거 같아서 좀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글을 한번 써보았습니다... 버클리의 을 읽었는데 이 책 참 흥미롭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분석해보죠. 원래의 제목은 “The Theory of Vision, or Visual Language, shewing the immediate presence and providence of a Deity, vindicated and explained”입니다. 일단 “시각이론”은 그가 예전에 출판한 “새로운 시각이론”을 가리킵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새롭지 않으니 그냥 “시각이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버클리는 자신의 시각이론이 “시각언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의 섭리와 직.. 더보기
올바른 "흄주의"란? 오늘날 스스로를 ‘흄주의’로 부르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흄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정당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흄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자의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흄의 철학적 작업과 자신들의 철학적 작업이 비슷한 면이 있으니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냐는 겁니다. 현대의 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흄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근거는 법칙의 실재를 부정하고, 경험 가능한 규칙성에 근거하여 철학을 수행하는 흄의 작업을 그들이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일겁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생각에 매우 익숙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법칙에 대한 가능한 .. 더보기
푸코 철학 비판 어제 제가 푸코에 대해서 좀 비판했는데, 그걸 보충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좀 적어봅니다. 일단 제 비판은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제 철학적 비판의 맥락을 좀 확인해야 요 사실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날 듯합니다. 제가 예전에 언급한 적 있지만, 푸코를 저항의 철학자로 보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성의) 해방을 주창한 철학자로 많이들 보지만, 이런 관점은 정말이지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발리바르도 저런 식의 해석에 대해 혐오감을 표출하면서 박살냅니다.(에 수록되어 있으니 찾아보셔도 됩니다) 저런 식의 해석은 푸코에 대해서 이런 식의 기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1) 푸코는 맑스주의에 동조하였다. 2) 푸코는 정신분석에 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