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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의 시각이론과 철학

최근 남들 욕만 한 거 같아서 좀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글을 한번 써보았습니다...

버클리의 <시각이론, 혹은 시각언어>을 읽었는데 이 책 참 흥미롭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분석해보죠. 원래의 제목은 “The Theory of Vision, or Visual Language, shewing the immediate presence and providence of a Deity, vindicated and explained”입니다.

일단 “시각이론”은 그가 예전에 출판한 “새로운 시각이론”을 가리킵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새롭지 않으니 그냥 “시각이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버클리는 자신의 시각이론이 “시각언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의 섭리와 직접적인 현존을 “보여주고 있음”을 입증하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시각이론이 무엇이길래 신의 섭리와 직접적인 현존을 입증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좀 썰풀어보겠습니다.

 

일단 버클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당대에는 기독교의 공공연한 적들이 설치고 있습니다.

바로 콜린스나 틴달 같은 이신론자들이 그들이죠.

버클리는 이들이 기독교의 적임에도, 그들이 기독교의 “옳음/권리”을 주창하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진단합니다.(틴달의 책 중에는 “기독교의 권리 옹호”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버클리의 적은 이신론자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버클리는 이들보다 위험할 수 있는 이들을 언급합니다.

바로 섀프츠베리와 같은 “섬세한minute 철학자”가 그들입니다.

버클리는 ‘섬세한 철학자’란 표현을 키케로의 저작에서 따왔는데, 이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을 뜻하고, 그들이 원자를 포착할 만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고 비꼬는 표현입니다.

버클리는 섀프츠베리같은 이들이 분명 이신론자들과 구별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인들을 이신론으로 이끌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섬세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자연종교”로 내세우지만, 그들의 자연종교는 실제로는 자연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계시종교를 연구하던 이들에 의해 계시종교가 무너졌듯이, 자연종교를 표방하는 그들에 의해 자연종교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버클리의 이러한 진단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당대에 서로 치고 박고 싸우던 두 입장을 사실상 하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버클리가 두 입장을 하나로 묶는 것은 그들이 자연종교에 대한 이해에서 같은 전제를 취하고 있다고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콜린스는 계시종교를 연구하면서 계시종교의 다양성(다양한 이해의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콜린스는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무신앙을 도출해내었고, 이를 이론화합니다.

자연종교의 다양성으로부터 무신론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이러한 도출은 단순히 회의와 부정이 아닙니다.

그들은 회의하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신앙에 대한 잘못된 “입증과 설명”(지금의 책 제목에 사용된 용어)이 무신앙와 무신론을 입증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이신론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신의 섭리와 현존을 잘못된 방식으로 자연에 투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이신론자들에 반대하는 이들이 그들과 똑같은 논리를 따르며 믿음을 입증하고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두 입장에 공통적인 오류는 “유비”의 잘못된 활용에서 비롯됩니다.(버클리는 유클리드 원론 5권을 언급하며 그들이 유클리드 원론을 읽지 않고 유비란 용어를 오용하고 있다고 디스하기도 합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그들은 유비를 신비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신비로운 기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버클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유비적입니다.

인간의 자연에서 단순하고, 일양적이고uniform, 일반적인 규칙들rules과 방법들methodes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버클리는 이렇게 발견되는 규칙과 방법들이 그 자체로는 오류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이 발견한 몇몇 규칙과 방법들로 자연 전체를 말하는 이들의 오류입니다.

자연의 다수성과 복잡성을 무시하고 자연의 동일성identity과 일양성uniformity를 선언하는 이들의 오류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버클리는 이신론자나 당대의 자연신학자들 모두 바로 이 점에서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자연신학자들은 실제로는 자연종교를 배신하고, 자연종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 신의 심판과 보상, 인간의 의무와 책임 같이 자연종교에서 다뤄져야만 하는 개념들을 무시하고, 취향과 아름다움 따위로 종교를 입증하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참되고, 그들의 말처럼 그들의 지식이 세계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제공할지라도, 그것이 도대체 이 자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지를 알려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자연종교일 수 있는지 자신은 도저히 모르겠다고 버클리는 비판합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이신론자들이 자연신학자들 모두 무신론자입니다.

신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들은 다른 유비를 채택하고 있을 뿐 유비를 신비롭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유사상을 주창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앎이 진리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모든 것이 통일되고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유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버클리는 인간의 자유는 현재의 불확정성에 근거해야만 하며, 이는 진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인간의 판단과 기대를 통해서 인류의 삶이 나아갈 때에만 성립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진정으로 자연종교를 추구하는 이라면, 미래에 대한 인간의 기대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불확실한 시도들을 껴않음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남겨두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버클리는 자신의 진단을 이론적으로만 주창하지 않습니다.

버클리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시각이론에 바로 그러한 증명이 담겨 있다는 것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버클리의 시각이론이 어떤 비판을 담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일단 일차적인 주제는 거리, 형태, 크기 따위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인식되는지입니다.

여기서 거리, 형태, 크기가 다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2차 속성과 구별되는 1차 속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색깔이나 냄새 같이 주관적인 속성들과 달리 1차 속성들은 객관적이고 사물 자체의 특성을 가리킨다고 여겨졌죠.

따라서 1차 속성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차 속성들이 객관적인 속성으로 여겨진 것은 그것이 다양한 감각들 속에서 공통으로 인식되는 내용이라고 여겨졌던 덕분입니다.

시각과 촉각, 후각과 청각은 이질적입니다.

그런데도 거리, 형태, 크기 따위는 그것들을 통해서 공통으로 파악됩니다.

그렇기에 해당 속성들이 여러 이질적인 감각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라고 여겨졌고, 그렇게 종합된 관념이 사물과 일치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저것들이 “실재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였던 것이죠.

 

버클리는 이를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당대의 시각이론가들은 저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거리, 형태, 크기는 그 자체로는 시각 감각의 내용이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소개합니다.(이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리, 형태, 크기는 시각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죠.

버클리에 따르면 당대 시각이론가들은 그러한 파악이 기하학의 법칙laws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리, 형태, 크기는 그 자체로는 시각적 감각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파악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그런 연관은 필연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이죠.

 

버클리는 이러한 연관이 필연적이고 확실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의 진단은 이러합니다.

당대 시각이론가들은 사람들이 저러한 속성을 파악할 때, 그들이 전제하는 것과 같은 기하학적 작도를 통해서 해당 속성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입증하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파악하지 않고 있거든요.

이는 사소한 지적이 아닙니다.

버클리는 인간이 기하학적인 질서를 활용하여 시각적 인식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간 안구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나, 안경과 같이 실용적인 도구를 발명하고 개선하는 데 있어서 기하학은 필수적입니다.

또한 인간이 두 눈을 통해 거리를 판단하는 것은 기하학적인 법칙에 따른 것임을 버클리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버클리가 시각 능력과 기하학의 연관을 부정한다기보다는, 기하학으로 직접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지식 영역을 제시함으로써 구별되는 인식 층위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적 인식이 어떻게 내용적으로 종합되는지를 포착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하학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두 눈을 통해 거리를 판단하고 있을 때, 두 눈이 어떤 각도로 조정되었다는 감각 자체는 특정한 각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어떤 각을 취할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이 거리를 판단하는 것은 임의나 마법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각은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고, 경험을 통해서만 그 의미가 확보됩니다.

해당 근육을 활용하고, 사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얻어지는 경험들이 그러한 감각에 인식적인 유의미성을 부여해준다는 것이죠.

 

버클리의 비판은 저러한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버클리는 저런 영역(아마도 이후에 “현상학적 탐구 영역”이라고 불릴)을 고려할 경우 인간의 시각적인 인식 능력에 대해 더욱 확장된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기하학적 법칙으로 시각 인식을 환원하는 이들을 시각 인식의 복잡성을 무시합니다.

투시도법적 모델링으로 1차 속성들을 포착한다느니, 멀어지면 작아지고 가까워지면 커진다느니, 멀어지면 흐릿해지고 가까워지면 선명해진다느니 하는 일반적 규칙성을 가지고 시각 인식 능력이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심각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러한 일반적인 규칙들이 우리의 시각 인식에 오류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버클리 말마따나 화가들이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때에만 저런 주장이 진리일 수 있습니다.

버클리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인간은 저런 일반적 규칙에 속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 속에서 저런 일반적인 규칙들을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적용하여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냅니다.

심지어는 의식하지 않고서도 일반적인 규칙들에 어긋나는 판단을 통해 정확하게 인식해냅니다.

때문에 기하학 환원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그들이 그러한 실수를 한 원천은 감각의 다수의 층위들을 구별하지 않고, 감각이나 관념의 연관들에 특별한 힘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감각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감각 모든 관념은 어떤 점에서는 무관합니다.

한 감각에서부터 다른 감각으로 이어지는 일, 어떤 관념으로부터 다른 관념으로 이어지는 일은 감각이나 관념 자체가 가진 효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한 연결을 수행하는 활동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지 그것들 자체에 담긴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버클리에 따르면 어떤 이어짐은 분명 합리적입니다.

어떤 감각이나 관념은 올바르게 다른 어떤 감각이나 관념을 제안suggest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안일 뿐 그 필연적인 연결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임의적인 연결일 수 있는 것이지만, 질서를 부여하여 창출된 합당함입니다.

버클리는 이것이 “언어”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어에서 어떤 기호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것 자체는 임의적일지라도, 그것이 질서 있게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처럼, 감각의 경우에도 이것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의 판단은 그렇기에 어떤 필연적인 연관을 분석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활동operation 속에서 수행되는 의미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버클리는 그렇기에 공통 감각이 아니라 “상식”을 설파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수행되는 판단들을 우선시해야한다는 것이죠.

그것들이 정교한 추론을 거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들은 자의나 광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인식의 원리들의 인도 속에서 수행된 인간적인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지 않듯, 우리의 인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버클리는 그렇기에 철학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느슨한 인식들 속에서 발생하는 오류들을 철학자들이 포착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클리는 이러한 오류가 느슨함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감각과 관념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섬세하게 분간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말로 위험한 일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자신만의 정의로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지, 일상적인 선입견prejudice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클리의 입장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일단 버클리에 대해서는 합리론 대 경험론 식의 도식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버클리는 로크나 섀프츠베리보다는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와 더 비슷합니다.(버클리는 로크는 직접 비판 안 하는데... 그렇다고 로크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버클리의 선구적인 무신론자들의 목록에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홉스와 함께 거론되는데, 이게 꼭 올바른 판단인 것도 아니고요ㅋㅋ)

버클리는 저런 인식적 원리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대하고, 우리의 인식을 섬세하게 발전시킴으로써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게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저런 원리들이 단순 인식 원리가 아니라 인간 삶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있어서일 것이고요.

그니까 의무, 책임, 성실함 따위의 미덕 없이 어떻게 인식이 성취되겠냐고 버클리는 생각했을 겁니다.

또한 인식을 통해 신의 지혜와 자비로움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고, 세상의 합리성이나 도덕성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으니 신의 속성을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버클리의 기획을 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프랑스의 감각론적 유물론자들이 흄처럼 말이죠.

그들은 기계론적인 원리로 유물론을 주창하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도약들과 인간의 욕망, 미래에 대한 기대들이 가진 힘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습니다.

버클리의 신 대신에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가능해지는 환상이 차지했고요.(사실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버클리였습니다... 상상력의 배후에 신 대신 환상이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런 식의 계승을 고려해볼 때 버클리는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습니다.

17세기의 유물론과 18세기의 유물론이 달라지는 데 버클 리가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죠.

버클리의 시각이론은 당대에 과학적으로 수준 높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론이나 신학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시각 인식을 다루었습니다.

그렇게 내놓았을 때에만 그들의 적들이 자신의 지식론과 신학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데카르트와 반대 경로를 따랐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으로 과학으로 인도하려 했던 반면, 버클리는 자신의 과학으로 신학으로 인도하려했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증거물은 무지성 기계론자들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버클리 이후 감각에서 지성으로의 이행이 기하학적 법칙에 따라 성립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또한 이런 도약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능동성, 자발성, 자유가 실현되는 영역이며, 여기서 포착되어야만 하는 원리가 있음을 버클리는 보였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신의 섭리든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성이든 어떤 “원리”를 포착하려고 했던 이들은 버클리가 깔아둔 길을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버클리는 이점에서 17세기적인 철학들의 종말을 선언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종말보다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자유”의 산물들이, 루소와 스미스와 칸트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추론”의 성취물들이 근대철학의 진정한 주인공이겠지만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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