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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철학 비판

어제 제가 푸코에 대해서 좀 비판했는데, 그걸 보충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좀 적어봅니다.

일단 제 비판은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제 철학적 비판의 맥락을 좀 확인해야 요 사실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날 듯합니다.

제가 예전에 언급한 적 있지만, 푸코를 저항의 철학자로 보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성의) 해방을 주창한 철학자로 많이들 보지만, 이런 관점은 정말이지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발리바르도 저런 식의 해석에 대해 혐오감을 표출하면서 박살냅니다.(<대중들의 공포>에 수록되어 있으니 찾아보셔도 됩니다)

저런 식의 해석은 푸코에 대해서 이런 식의 기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1) 푸코는 맑스주의에 동조하였다.

2) 푸코는 정신분석에 동조하였다.

3) 푸코는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해방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였다.

4) 푸코는 정신분석을 통해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해방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5) 이는 자본주의적인 억압을 경제적-사회적인 억압으로만 보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식의-성적인 억압에 주목하고 이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는 일단 1)과 2)가 사실무근이며, 푸코는 오히려 저 모든 명제에 반대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푸코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을 극혐하였고, 그런 걸로 해방을 떠드는 조류를 겨냥하여, 그것을 박살내려고 했다는 거죠.

발리바르는 전기적인 사실과 문헌적 근거를 통해 푸코가 저런 입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의 철학을 발전시켰음을 보입니다.(우창 샘이 지적했듯이, 특히 <성의 역사> 1권에서 저런 입장들에 대한 푸코의 조롱이 잘 드러나죠)

발리바르는 푸코를 저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멍청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의미 있지도 않다고 지적합니다.

푸코를 있는 그대로 읽었을 때 푸코 철학의 의의가 드러나기 때문이죠.

또한 발리바르는 그렇게 드러난 의의를 기반으로 푸코와 맑스주의를 조화시킬 수 있으니 푸코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고 진단합니다.(푸코 철학이 맑스주의에 많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발리바르는 굳이 이런 진단까지 해주는 거죠)

 

암튼 저런 사실을 좀 전제하면 제 비판이 좀 더 잘 와닿을 겁니다.

푸코는 철학적으로 흥미로울 만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게 “철학적”인 종류의 것이든, “역사적”인 종류의 것이든 말이죠.

문제는 푸코의 작업이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지식적인 것이든 권력적인 것이든 하여간 해방의 가능성을 푸코는 아예 부정하진 않았을 겁니다.

다만 그게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푸코는 그 어떤 주장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것 자체로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어요.

저런 답변을 너무 성급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저런 답변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가능성들을 모색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문제는 푸코가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진정성을 가지고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푸코의 역사 연구가 그 증거고 말이죠.

 

저는 푸코의 후기 인터뷰를 근거로 푸코가 자신이 연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이제 그런 얘기들은 신물난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역겨운 얘기들”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뭐 저게 그냥 변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전 저게 푸코의 본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푸코가 연구랍시고 모아둔 잡동사니들은 정말이지 저런 것들의 전형이니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이게 무슨 문제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푸코는 저런 역사적 사실들을 대안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저런 역사적 연구들은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도움이 될 “타자들”일 수 있고, 그 경우 푸코에게는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의 또한 담보될 겁니다.

그리고 전 바로 이런 변명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푸코 철학을 비판하는 거고 말이죠.

제가 카스트루를 내세워서 푸코를 비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인류학이 저런 타자들을 수집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죠.

그리고 전 인류학을 연구하면서, 저런 식의 무지성 수집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류학을 쇠락시켰다는 진단을 근거로 푸코를 비판한 거였습니다.

타자는 비규정자고, 당연히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 걸 수집하는 일 자체는 그냥 무한정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런 작업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무언가가 의미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한정된 재화(주의 및 노력 등을 포괄하는 의미에서)를 그런 “의미 있을 수도 있을 그 자체로는 쓸모 없는 일”에 투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은 너무한 것일 수 있죠.

하지만 적어도 저런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화될 수 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철학자의 경우 이런 식의 만족은 당연히도 문제가 되고요.

 

물론 전 저런 수집을 옹호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옹호는 그냥 잡다한 것들을 무지성으로 수집하는 일 전부를 위한 것일 수 없어요.

그 자체로는 의미가 모호할 지라도,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한정하니까 옹호가 되는 겁니다.(칸트의 비판처럼 말이죠)

저는 저런 수집이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의미 창출의 가능성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거나(세련된 비교 연구의 유의미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을), 적어도 그것이 그 자체로 매우 강렬하고 주의를 끄는 종류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푸코야 전자의 경우에는 아예 속하지 않으니 후자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전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카스트루를 꼽고 있었던 거고요.

카스트루가 자신의 민족지로 “식인의 형이상학” 따위를 떠벌리며 일반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니까 전자에 가까운 종류의 정당화), 실제로 카스트루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그냥 아마존 민족지가 그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멋진 “빛나는 것”이라서 떠드는 거에요.

식인의 형이상학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반-식민주의 어쩌구 저쩌구 떠드는 것은 카스트루에게 정말로 소중한 아마존 민족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현재적인 일반적인 의미”를 구축해보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죠.

카스트루 본인이 제안한 “현재적인 일반적인 의미”는 사실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카스트루 버전의 의미가 무의미하다는 게 밝혀져도, 아마존 민족지는 무의미하지 않을 거라고 카스트루는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죠.

애초부터 카스트루는 아마존 민족지의 놀라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제안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거라고 본인 스스로가 말합니다.(인터뷰를 보심 바로 알 수 있습니다ㅋㅋ 저도 완전 동의하고 말이죠)

결국 카스트루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의미의 원천이 되는 아마존 민족지이지, 그것으로부터 주장되는 몇몇 현대적인 의미들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카스트루가 “수집”을 하는 동기이고, 이런 수집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를지라도, 이것이 놀라운 것, 위대한 것, 정말로 중요한 것, 절대로 잊혀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수집을 정당화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그에게 수집을 강요합니다.(제가 열변을 토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기록”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푸코는?

본인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런 것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욕하는 겁니다.

도대체 그따위 것들에 우리가 주목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일반적으로 말하지도 못하고, 그 자체로 느낄 수도 없는데, 왜 우리의 한정된 재화인 주의력을 갉아먹냐는 것이죠.

본인 인생을 낭비하는 것까지 반대하고 싶진 않지만, 그걸로 남의 인생도 낭비시키거나, 그런 낭비가 철학인 것처럼 떠든다면 반대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반대하는 거죠.

 

 

덧붙이자면... 푸코가 “실험”을 하고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자기가 발뻗을 곳을 살피지도 않고 실험하고 있었으니 문제인 것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양식”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고, 그건 실험일 수밖에 없죠.

저도 동의합니다.(동의하지 않으면 지금 저 자신을 정당화할 수도 없을 겁니다. 저의 이 조악함을 어떻게 용인하겠어요...)

그런데 저런 실험을 무지성으로 하면 안 되죠.

적어도 실험 계획은 짜고, 자신의 실험에 대해 반성/재귀적으로 평가하면서 나아가야 철학자인 것이죠.

그걸 안 했으면 욕해도 되고, 그래서 욕하는 겁니다.

 

갠적으로 푸코의 “유행”은 유의미하고 써먹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권력” 어쩌구 하는 거나 “장치” 어쩌구 하는 거, “진리-주체” 어쩌구, “자기 해석학” 따위의 것은 저도 적극적으로 전유합니다. 물론 푸코가 이것들의 원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게 편리하고 소통도 잘 됩니다), 푸코 책 중 “위대한 철학책”으로 볼 만한 게 있냐고 물으면 전 없다고 대답할 겁니다.(<폴리테이아>, <성찰>, <불평등 기원론>, <탐구>, <비판>, <정신 현상학>, <선악의 저편>, <존재와 시간>, <인간의 조건> 같은, <그라마톨로지>는 넣어볼 만한 그런 목록)

실제로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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