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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글

의식에 대하여

옛날 컴퓨터에서 발견한 자료. 언제 왜 적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음.


 

샘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지만... 얘기할 사람이 없어 그냥 공유해봅니다ㅋㅋ

 

 

샘이 저에게 알려주셨던 지식, 프랑스어에서는 의식과 양심이 같은 단어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긴 합니다.

최근 충훈 샘 논문을 보다가, 충훈 샘이 루소의 “양심의 목소리”를 “의식의 목소리”로 일관되게 번역하시는 걸 보면서 이래저래 든 생각들이기도 하고요.

 

무튼 저의 물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의식은 도대체 뭐지?”

 

현대 철학에서 의식은 보통 감각질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감각질은 빨강 같은 감각의 질적 특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고요.(단어 자체도 qualia입니다)

그니까 현대 철학에서 의식은 감각의 질적 특성을 가리키고 그런 질적 특성들을 가지고서 상상해서 얻게 되는 질적으로 포착되는 믿음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철학계에서만 사용되는 이상한 구도인 것은 아닙니다.

의식은 무의식이랑 대비되는 개념이고, 무의식이랑 대비되는 의식은 하여간 의식화될 수 있다는 것(전의식도 포괄되죠), 그리고 하여간 의식화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질적으로 떠오르는 무엇인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죠.

 

보통 저런 식으로 의식의 의미가 주장되고 있고, 근대가 “의식철학”이라 문제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저런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전 “근대는 의식철학이며, 그래서 문제다!”라고 떠드는 사람들을 극혐하고(남욕 말고 구체적인 주장이 전혀 없는 사람들), “근대가 의식철학이긴 한가?”라는 물음 속에서 근대 철학자들을 보고 있었죠.

 

제 원래의 결론은 일단 데카르트는 의식철학자가 아니다였습니다.

게다가 역사학자들이 의식에 해당되는 단어는 로크가 만들어낸 신조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니 전 저기서 더 고민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로크가 의식을 논하는 부분을 확인하니 로크도 의식철학이 아니더군요.

그러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도대체 의식은 뭐지?”하고요.

 

 

대외적으로 잘 안 알려져 있는데... 데카르트에게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이전에도 감각과 상상은 신체에 속하는 현상이었습니다.

감각<->지성, 신체<->영혼, 자연<->초월 구도가 성립하는 것이죠,

감각이나 이미지는 지성의 대상을 다루는데 도움을 주는 신체적인 도구/기능이었습니다.

때문에 ‘species’ 같은 단어는 종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종에 해당될 형상을 포착하게 할 수 있는, 신체에서 포착하는 지각 단위였던 것이고요.(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중세 species는 상象, image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중세 형상론은 지각상과 형상의 자연스러운 1대1 대응을 전제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저런 구도를 공격한 것인데, 기본 전제는 다 받아들였고, 1대1 대응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도 그들처럼 감각과 이미지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었고, 그래서 이미지에 해당되는 신체적 현상이 어떻게 신체에서 계산되어 심장을 경유해 뇌로 전달되는지도 설명하고 그랬습니다.(이게 중세부터 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기본 전제니까요)

데카르트가 특이한 입장은 단 하나였습니다. 지각상이 물질과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복잡하긴 해도) 결국에는 형태적 패턴에 불과하고, 그것은 신체 기관들의 형태적 결합 속에서 계산되어 전달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죠.(그래서 species가 고유한 영역으로 자립한다는 모든 주장에 반대합니다)

 

그럼 영혼은 뭘 하느냐?

이게 재미난 부분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가시적인 것, 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모두 신체적인 현상입니다.

그게 영혼과 어떤 관련을 맺을 경우 순수하게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요.

데카르트는 순수하게 지성적인 활동의 예로, 천각형의 개념화를 제시하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천각형을 가시화할 수 없지만(상상 불가능) 그럼에도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순수 지성은 존재하며, 그것은 감각과 상상과 독립적이라고 주장합니다.(이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핵심 주장이지만 이는 넘어가겠습니다)

 

데카르트는 생명력에 대해서 빛 없는 불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건 유비가 아닌 게, 빛 없는 불꽃은 발효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빛이 없음에도 열이 발생하는 그러한 힘/운동을 가리키는 용어였고, 생명력은 저런 현상 및 힘의 사례라고 주장했거든요.

재미난 것은 데카르트는 저걸 은유로 영혼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가시성을 가능케하지만, 그 자신은 가시적이지 않고, 그럼에도 그것의 현존은 느낄 수 있는 무엇이란 점에서 데카르트는 저걸 빛 없는 불꽃이라고 은유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로크가 이런 데카르트적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정교한 논증으로 옹호했다는 점입니다.

로크가 의식을 얘기하는 맥락이 현대적 의식일 수 없는 게... 로크는 오히려 의식적인 것들을 모두 자아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괴시켜버립니다.

감각도, 상상도, 기억도 결국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정교하게 논증하는 것이죠.

로크는 당연히도 그럼에도 자아는 현존하고, 자아의 비가시성과 그 현존을 옹호하면서 “의식”을 이 자아의 활동(빛 없는 불꽃이 일으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으로 이름 붙입니다.

 

이런 로크의 입장이 당대에는 매우 이상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마가렛 제이콥이 정교하게 구체화한, 로크가 속한 광교파적인 범뉴턴주의자들 중 로크의 저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건 무신론이고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았죠.

로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로크와 아무 관련 없는 수평파적인 급지 개혁지지 유물론자들이었고, 이 사람들은 로크가 자아를 부정한다고 이해했고, 그래서 지지했습니다.

(그러니 로크의 저런 입장은 로크의 본심에 좀 가까운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하여간 데카르트나 로크나 의식은 현대의 “의식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의식적인 것에 해당되는, 의식의 배후에 있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단 얘기입니다.

둘이 저런 걸 얘기할 때 고려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관념연합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올바른 단위체 판단의 원리입니다.

 

관념연합의 원리는 결국 신체로부터 얻어진 정보를 조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일반적으로 잘 유통됩니다.(생리학 맥락에 흡수되어 18세기의 기본 전제를 이룹니다)

 

다른 하나가 별로 유통되지 않는 듯한데... 단위체 판단입니다.

관념 연합만 있으면 공통의 판단은 불가능하거나 우연에 불과하게 됩니다.

공통인지도 알 수 없죠.

데카르트는 애초에 우리의 “판단”(사실 코기토의 핵심 기능은 단위체 판단입니다. 여기서 참거짓이 나오는 것이고요)을 개념화하기 위해 코기토를 얘기하는 것이고, 이때 판단의 대상이 되는 단위체는 애초에 신체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천각형 같은 것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이 대상이 진정한 실재 여부를 판단하는 대상이고요.

 

라이프니츠가 이걸 제대로 캐치해서 본인이 진정한 데카르트주의자라고 주장하고 다닙니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만약 물질만 존재하면, 대상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걍 물질세계 전체가 있는 거죠 뭐.

근데 우리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분리해내서 그것을 인식합니다.

이러한 분리가 자의적인 것, 가상적인 것(라이프니츠는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은유합니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단위체가 실재해야하고, 이게 바로 “형이상학적 점”에 해당되는 지성의 대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보통 이 후자 영역이 형이상학의 유의미성을 지지하는 쪽이고, 이걸 무시하면 걍 감각론으로 갑니다.

흄이 대표적인데 얘가 참 골때립니다.

흄이 <탐구>에서 “경험하지 않은 감각자료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스스로 제시하면서 매우 사소한 문제로서 이를 다룹니다.(사례 자체가 사소하고, 결론도 해결하진 못하지만 사소하다입니다)

근데 흄은 자기가 예상 반박을 미리 말하면서 문제를 푸는 식으로 서술하는 글쟁이가 아니거덩요. 지말만 합니다 원래.

저 문제는 의도적으로 주의를 돌리는 용이 분명합니다.

“경험하지 않은 감각자료가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원래 몰리뉴 문제랑 관련이 있습니다.

(<맹인에 대한 서한> 등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은 감각을 조직하는 관념연합원리로 모든 게 설명되는가?라고 할 수 있겠고요.

감각들이 걍 조직된다고 할 때, 공통성 같은 것은 없다면, 세상의 질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고, 유의미한 비전 제시도 못하게 됩니다.

이를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단위체에 호소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가?가 저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되는 것이고요.

 

생리학에서 기계론이 선재론이고, 생기론이 후성론인데(보통 그렇습니다) 이런 갈림에서도 핵심문제가 저거입니다.

걍 단순체들의 단순한 조직원리로 설명하자니 복잡한 생물현상이 설명이 안 됩니다.(특히 태아의 발생 및 발달이 문제가 됩니다. 도대체 어케 복잡한 기계가 화학적 조성에서 우연히 나오냐는 것이죠ㅋㅋ)

 

암튼 저런 맥락에서 보아도 결국 의식은 오늘날의 의식적인 것이랑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 자체가 의식화된 내용의 배후에서 그걸 가능케 하는 무엇이 되거든요.

 

게다가 관념연합 원리로 설명되는 단순한 것들의 복잡화 가능성으로 문제는 끝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에서 전이라고 할 수 있는, “꽂힘”이 큰 관심의 대상이 되죠.

정확히 왜 무엇인가에 꽂히는가가 설명될 필요가 있듯이, 어떻게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저걸 신이 그렇게 설계했다는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믿음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성에 호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를 이루게 하는 단순한 것”을 통해서 창발한 무엇이 열심히 변형되다보니 지금이 되었다는 전략이 유일한 해법이 되는 것이죠.

뭐 당연히도 이런 주장은 과거의 단순성을 찬양하는 데 더 잘 어울립니다.(비코도 이런 입장이고요ㅋㅋ)

 

재미난 것은 칸트인데, 칸트가 의식이란 단어로 두리뭉실하게 말해질 수 있는, 구별해야할 활동들을 다 구별하기 때문이죠ㅋㅋ

 

개별 감각들을 어떤 단위체로 종합해내는 것-> 통각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단위체를 포착하는 것-> 공통 감각

보편타당한 것이 아님에도 유의미한 단위체를 포착해내는 것-> 좋은 취향(목적론적 판단의 배후)

판단된 전체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유의미성을 창출하는 것-> 양심

 

으로 잘 쪼개둡니다.

 

칸트는 또 저런 활동들이 그냥 분류된다가 아니라, 어떻게 분류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요.

(핵심은 보편타당하진 않지만 객관적일 수 있는 개별화의 원리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는 자연의 자기 조직과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자기 조직이 어떻게 형식적으로 공명할 수 있고, 이를 어케 유추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글고 칸트는 저런 걸 할 때, 멜랑콜리를 숭고가 추동하는 활동으로 다룹니다ㅋㅋ)

 

 

 

 

하여간 근대철학에서도 결국에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었고, 의식의 기원이었단 얘기이고...

감성형식도 그냥 주창된 게 아니라. 자연의 해석을 재귀적으로 설명하는(그니까 인간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자연을 걍 포착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이런 인식이 어케 가능해지냐는 그런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해결) 시도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식이 현대의 용례가 된 것은 아마도 19세기 생리학 발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뒤-부아 레몽의 그 유명한 강연의 구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저 시대 즈음 되면, 운동도 다 자연에 잡아 먹혀서 남는 게 감각질과 도덕이나 수학처럼 자연을 넘어서는 것 같아 보이는 정신적 활동이 되고... 이 쫓겨난 영역에서 정신을 선언하고 있는 게 되거든요.(재귀성은 오히려 상실된....)

아마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식 의식-무의식 구도가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ㅋㅋ

(프로이트도 저런 생리학 전통에 있었습니다 원래)

 

근데 19세기 맥락도 좀 복잡하긴 하죠.

쇼펜하우어가 의지 어쩌구 할 때 말하는 의지는 제가 말하는 17-18세기 전통이랑 매우 밀접한 개념이거든요.

쇼펜하우어는 블루멘베르크 밑에서 배웠고, 자기를 생리학과 항상 연관시켰습니다.(방향이 다를뿐 같은 얘기라고 주장) 쇼펜하우어 책을 직접 보면 맨날 생리학 어쩌구 얘기하면서, 라마르크, 비샤, 카바니스 등의 성과를 철학으로 번역하고 있고, 본인 스스로도 바로 그런 작업의 주체로서 제시하려 노력합니다.

17-18세기에 의지는 전체가 아닌 개체로서 가진 힘, 능동성이었고, “에너지” 개념에 가까운 의미였습니다.(생리학 및 철학에서는 거의 이렇게 쓰입니다)

19세기에도 이런 얘기들은 계속 있었다는 거죠.

 

암튼 현대의 용례의 기원은 20세기 초반 정도에 확립된 거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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