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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대상에 관련한 쪽글 (2): 메타화용론적 자아담론

게으름 때문에 이제야 다음 글을 쓰네요...

근대 시기에 생산된 담론 중 소설과 자기계발서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 한 첫 번째 쪽글의 언급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과 자기계발서는 ‘윤리적 담론’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그러한 글들이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특정한 종류의 삶(‘삶의 형식’Lebensform이라고 불릴 만한)을 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저런 글들은 독자들은 특정한 종류의 (윤리적이든, 도덕적이든, 과학적이든) 주체로 형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저런 글들이 저런 효과를 산출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저런 글들이 어떻게 저런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여야 합니다.

글을 읽는 것이 어떻게 저런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을 ‘메타화용론’이라고 부르며 논의를 진행시켜보겠습니다.

 

로트만이 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적어도 저 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접근을 선보인 바 있더군요.

로트만은 신화나 민담의 전형성에 주목했습니다.

저런 이야기들은 클리셰로 점철되어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저 이야기들에는 “새로움”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런 이야기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소비한다는 겁니다.

로트만의 지적처럼 이는 설명이 필요한 현상입니다.

소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정보가 “흥미로운” 정보일 거거든요 원래는.

결말이 예측되지 않고, 이야기의 전개에 궁금증을 느낄 때 사람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 논의를 따라가는 일이 특별한 정보값이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신화나 민담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며 반복해서 듣고 읽는다는 겁니다.

로트만은 이것이 다른 방식의 소통과 구별되는 특수한 유형의 소통에 속한다고 진단합니다.

즉 나-타자 식의, 대상 인식 및 정보 획득을 위한 소통과 구별되는 특유한 소통 유형이란 것이죠.

로트만은 이를 나-나 유형으로, 자기 인식 및 자기 확신의 소통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다시 말해 저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거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한 소통이란 겁니다.

정체성/동일성의 담론을 재생함으로써 이를 지속하고, 강화하는 활동이란 것이죠.

이러한 활동은 자기-조직 체계에서 수행되는 일반적인 자기-참조 활동과 구별됩니다.

자기-참조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을 위해서도 수행되는 일이거든요.

로트만의 나-나 소통은 “자기-참조에 입각한 자기-조직의 강화”로 불릴 특수한 경우이죠.

중요한 것은 이런 수행이 왜 유도되고, 어떻게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입니다.

 

전 저런 것이 통과의례와 같은 “이행적”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이트슨이 공동체가 끊임없이 반증(거짓화)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냄으로써 강화된다고 말하는데 전 이런 것이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개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동일성/정체성에 가해지는 위협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활동을 수행하게 되고, 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사태의 근거가 되는 동일성/정체성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거나, 그것이 선행해야 이러한 활동이 유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저런 담론들은, 그 자체로 동일성/정체성을 유도시킵니다.

독자들의 경험들 중 특정한 경험들에 주목하게 만들고, 그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말이죠.

이런 작용은 샤토브리앙의 문학에서 특히 잘 포착될 수 있습니다.

샤토브리앙의 문학들은 “르네 병”이란 사회현상을 유발했습니다.(샤토브리앙의 저작을 번역하고 있는 신용우 님은 본인 피셜 르네 병 환자이고, 그래서 그의 글을 번역하고 있습니다ㅋㅋㅋ)

르네 병은 다른 게 아니라 샤토브리앙의 작품 속 주인공 르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도 르네다!”라는 외침이 르네 병을 상징하죠.

그전에도 베르테르 병에 걸려서 이상한 짓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르네 병은 그것들이랑 결이 다릅니다.

복장을 모방하는 그런 거랑 좀 달라요.

게다가 샤토브리앙은 귀족 출신이고(본인 혈통에 엄청 집착했습니다), 그가 묘사하는 르네가 대중적인 인물 유형은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르네와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르네의 외적 특징이나, 르네가 겪은 상황들을 공유해서 그런 게 아니라, 르네가 세상과 마주하는 심정(cœur/Herz)을 공유해서입니다.

그 유명한 종소리가 들려오는 일화에 우리가 공감할 때 느끼는 감정은 특수한 사건에 의존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느낄 법하지” 따위의 감정이 아니에요.

우리가 르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삶 속에서 한번씩 느끼게 되는 허무함을, 그 감정의 강렬함과 그 감정을 느꼈음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황량함을 샤토브리앙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정교하게 언어화한 덕분입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없었더라면 사랑을 느꼈을 사람은 극소수뿐이었을 거라는 경구처럼, 실제로 저런 감정(허무함)은 언어화되지 않을 경우 보통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기억하기 어렵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거든요.

샤토브리앙은 저런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양식style을 선보임으로써 이를 실행해낸 겁니다.(사실 이런 활동의 원조는 역시 몽테뉴인데, 재미난 것은 사람들이 몽테뉴의 경우 “내가 전생에 몽테뉴였던 것만 같다”라고 공감을 표현하는 반면, 샤토브리앙의 경우 “나도 르네다”라고 공감을 표현한다는 겁니다. 작가 자체가 아니라 인물이란 점—물론 ‘르네’는 샤토브리앙의 이름이기도 하지만—그리고 그것이 전생이 아니라 현생으로 느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샤토브리앙의 문학은 제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행적” 상태에 근거하여 자신을 형성시킵니다.

샤토브리앙은 “죽음” 같은 것을 바탕으로 문학적 정서를 구축하거든요.

분명 경험했지만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사건들을 바탕으로, 그것들의 부정성을 활용하여 경계성을 구축하고 이행적인 상태로 진입시킵니다.

그러한 이행성을 활용하여 자신과 자신의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유도하죠.

그러니까 결국 나-나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마주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특유의 상태에 진입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한 상태가 이행적 상태라는 겁니다.

 

나-나 커뮤니케이션을 성취시키는 샤토브리앙의 실천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경험을 조직하는 방식style이 문체style에 의존적이라는 겁니다.

전의식적인 특정한 경험에 주목시키고, 그러한 경험을 재생시킬 때 유발되는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과 자신이 겪는 일상적 일화들을 통합하는 형식style을 제시할 때 문체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이죠.(그러니 담론의 “형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근대의 “윤리”, “도덕”, “정치” 담론들을 재고하면 다른 것들이 보입니다.(‘윤리’, ‘도덕’, ‘정치’는 원래 유의어 관계입니다. 모두 “정신”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저런 담론들은 단순히 어떤 명제들의 집합을 넘어서 특정한 삶의 형식을 담론적으로 모방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를 단순히 문학 형식이나 문채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삶의 형식”을 가시화하는 모형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하여간 이걸 연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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