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조금 급조한 감이 있지만 데카르트 성찰에 대해 정리한 글을 쓰게 되었다.

해당 글 안에서 쓰기 뭐해서 넣지 않았지만, 저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글을 추가적으로 남긴다.

 

 

일단 이런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어쨌든 글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글은 본인의 글도 아니라, 보통 옛날 사람의 글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서 해당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쉬운 일이라고 여긴다.

글에 이런 문장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글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을 수만 있으면 말이다.(과거의 언어는 오늘날과 다르고, 우리는 그저 시대적으로 다른 것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다른 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에라스무스는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라블레는 에라스무스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둘다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둘 다 무신론자가 아닌가?

무신론자라는 주장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눈에 라블레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무신론자에 가깝게 보이고, 에라스무스는 좀 멀게 보인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 전통을 잘 아는 저자의 눈에 라블레는 당대 신앙의 전형적인 사례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무신론자란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현대에 해당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무신론의 의미를 가지고 누군가를 마음대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의미 사용일 수는 없다.

“913일 오후 3시에 신께 경배를 드리지 않은 이들무신론자의 정의라고 떠벌리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해당 단어를 사용하냐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지만, 이는 역사학의 오랜 고민이었다.

역사학은 과거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기술을 써야하는지를 고민했다.

여기서 기술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그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글들에 있는 주장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어떤 추론을 할 때 합당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서야 객관적일 수 있는지, 그러한 방법은 몇가지나 있는지....

역사학자들은 저런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그래서 심성사나 지성사를 쉽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며, 수많은 증거와 증거들을 토대로 한 추론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증거를 토대로 한 추론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은 증거일 수 있으며, 어떤 주장이든 증거를 토대로 한 추론일 수 있다.

누군가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진술이 의식철학의 증거라고 떠벌릴 수 있다.

물론 나는 저 진술이 의식철학의 반대 증거라고 주장하였지만 말이다.

둘 모두가 틀릴 수는 있어도, 둘 모두가 맞을 수는 없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증거와 추론이라고 할 때, 우리는 증거와 추론을 가볍게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법 및 법학 전통에서 보여주듯 증거와 추론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아무 것이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여기서 아무 것이나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소화기가 빨가니까 데카르트는 의식철학자야라는 주장은 소화기는 빨갛다라는 사실을 증거로 삼고 있다.

이런 아무 것을 배제하는 의미에서 아무 것이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사건에서 심증은 증거일 수 없다.

살인에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흉기가 무엇인지를 입증하고, 해당 흉기와 피의자의 관련성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입증관련성에는 또다시 따옴표가 필요하다.

살해 후 시체를 훼손했다고 했을 때, 사체에는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밧줄로 목이 졸린 흔적, 칼에 찔린 흔적, 둔기로 머리와 주요 부위를 내려친 흔적 등등

이 중에서 무엇이 흉기일 수 있는가?

당연히 과학적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사후에 행해진 흔적과 죽음에 이르게 한 흔적에 대한 체계적인 앎이 요구될 것이며, 그러한 앎에 근거하여 흉기를 규정할 것이다.

관련성이란 것은 무엇인가?

해당 흉기와 피의자가 같은 시공간에 있다면 그것이 관련성인가?

관련성은 임의적이지 않다.

지문이 발견되었다든가 해당 흉기의 소유자임을 입증할 근거가 있을 때나 관련성은 말해질 수 있다.

여기서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그러한 증거와 추론의 관계를 밝혀주는 앎이 있어야하는 것과, 그러한 앎을 법적 증거로 채택하는 것 모두 임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필적이나 지문, DNA는 처음부터 법적 증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증거를 법적으로 채택할 수 있다는 근거를 명시하고 이를 판결함으로써 법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판례는 증거 채택의 기준을 만든다.

어떤 사건에서는 지문이 결정적일 수 있겠지만, 다른 어떤 사건에서는 지문이 결정적일 수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인지와, 해당 사건 유형에서 채택될 수 있는 증거추론은 판례를 통해 규정된다.

 

 

좀 빙둘러 왔다.

하고싶은 얘기는 이런 것이다.

어떤 주장을 위해 필요한 증거가 무엇이고, 그러한 증거를 토대로 할 수 있는 추론이 무엇인지는 규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은 무턱대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 많이도 의심했는데, 그들이 그런 것을 의심한 것은 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진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체적인 타인들에 대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을 성공했다는 이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런 의심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 그들은 타자의 생각을 고려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들에 근거하여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의심을 극복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성격을 갖는다.

성공적인 문제 해결 사례가 있을 것이고, 아직 성공적인 문제 해결이 제시되지 않은 문제 유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파악되지 않은 사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공적인 문제 해결 사례에 속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실험을 통해 확인한다.

해당 사례가 성공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성사, 사상사 따위가 발전해왔다.

데카르트 또한 이러한 발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냥 글만 읽고 이렇다 저렇다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내가 반박한 그런 주장들은 구체적인 물음을 가져본 적도 없는 조류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나름의 증거를 사용하였고, 증거보다는 추론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해석을 하였다.

내가 지금 당장 내가 사용한 범주들이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학의 계문강목과속종은 아직 규정된 바가 없다.

다만 나는 어려운 분류에서 분류를 위한 분류명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의 완결된 책을 하나의 완결된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러한 방법에는 개인을 들여다보는 기법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문학에서 배웠으며, 데카르트에 대한 여러 전기를 비교 검토하여 데카르트의 철학을 해석할 수 있게 할 테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판단이, 혹은 선택이 필요했다.

그것들을 밝히지 않고 주절주절 써내려갔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주장하고 반박하는 일은 피했다고 자부한다.

그러한 고민 없이, 그러한 선택 없이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인 수많은 책들은 피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나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누군가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일 때나 그런 부동의는 의미 있을 것이다.

그저 한 구절, 한 문장, 본인의 언어 습관에 기초하여 주장하고 반박하는 이들은 바람에 따라 소리를 내는 쓰레기 더미와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Posted by 개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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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데카르트하면 심신이원론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표될 데카르트의 철학은 결국 심신이원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중요하다는 통설은, 다른 통설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중요하며, 그의 철학은 분명 심신이원론을 통해서만 획득될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글 중 괜찮은 것이 참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 소개된 글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그런 것이지만, 꼭 장소를 국내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데카르트에 대한 좋은 글들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좋은 연구들도 많고, 좋은 글들도 많지만, 데카르트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 속에 감춰져 있어 그것들을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대해 소개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근대 철학은 의식 철학이라는 거짓 명제를 앵무새처럼 따라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해설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간편한 구별을 참조해보자.

마음은 생각하는 것인 반면, 물질은 연장적인 것(펼쳐지는 것)이라는 구별 말이다.

심신이원론은 마음과 몸에 대한 것이다.

심과 신은 각각 마음과 신체일 것이고, 신체는 물질일 것이니, 생각과 연장이 다른 만큼이나 마음과 신체는 다를 것이다.

생각과 연장은 다르다. 얼마나?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만큼.

그러니 생각과 연장은 독립적이다.

 

이런 논증을 읊으며 데카르트가 옳다고 주장하거나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데카르트를 단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읽었다면 눈 뜬 장님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저런 식으로 논증하지 않는다.

연장과 사유가 다른 것은 그저 말로만 구별되는 다름일 수 있다.

무엇이 말로 구별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다른 것은 아닐 수 있다.

총각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다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사실을 지적한다.

그런 구별이 그저 말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해당 말들이 가리키는 바와 바로 그것의 기원을 확인해보자고 말한다.

무슨 소리냐하면 이런 것이다.

말로는 구별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원이 같다면 결국은 같은 것 아니겠냐는 소리다.

이러한 상식을 뒤집으면 논증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기원 상 다르면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원이라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기원을 가리키지 않는다.

어떤 말의 기원은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의 기원은 그러한 의미를 가능케 하는 사태일 수 있다.

데카르트는 기원을 그냥 어원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해당 말이 가리키는 관념들이 무엇인지를 추적하고, 그러한 관념들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런데 관념이란 것은 오늘날처럼 심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관념이라고 하면 주관적인 상상 정도로 치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관념이란 것은 우리가 사고를 한다고 할 때, 그 사고를 가능케 하는 것이자, 그러한 사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1=2라는 것을 생각할 때, 숫자(기표)가 아닌 수(기의)에 해당되는 1, 더하기, 등호, 2, 그리고 이것들을 합성한 구조체(명제)를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관념이란 것을 이해하고, 데카르트가 관념들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데카르트에게서 통설 속의 데카르트와 다른 면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관념들의 기원이다.

생각한다는 것과 연장적으로 펼쳐진 것이란 관념은 분명 관념적으로도 구별된다.

생각하는 것에 해당될 것은, 계산하고, 추론하고, 감각하고, 욕망하고, 느끼는 그런 것들일 것이고, 연장적으로 펼쳐진 것은 삼각형과 사각형, 그러한 도형들이 만들어낼 형태들일 것이다.

저런 것들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는 저런 상식에 호소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저러한 도형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결합태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데카르트 본인이 저러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형태라는 말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말이다. 형태 일반과 구체적인 형태는 다르며, 구체적인 형태의 결합태는 더더욱 다르다.

형태를 식별한다고 해서 어떤 앎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형태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형태들을 구별하고, 해당 형태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세 각의 크기가 같은 형태를 구별해내고, 그것들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는 것 따위를 말한다.

 

아마도 이런 것을 얘기하면 그런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파악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각형이란 형태가 당연해 보이는가?

삼각형 일반의 형태를 한번 말해보아라.

아마도 많은 이들은 예각 삼각형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삼각형 일반에 해당되지 않는다.

둔각 삼각형은 예각 삼각형과 형태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각형 일반을 형태화하는 도형은 없다.

때문에 우리가 삼각형 일반을 말할 때, 우리는 이미지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된다.

분명 눈으로 증명하겠지만, 그것은 가능한 삼각형 형태들을 모두 포괄하는 증명이어야만 한다.

가능한 삼각형들을 포괄한다는 것은 그것의 정의와 그러한 정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열거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도형(이미지)을 가지고서, 도형을 넘어서는, 형태 일반을 포섭하고,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삼각형은 쉬운 예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이 기술을 가지고 미적분을 풀었다!

이런 도형, 형태, 증명의 기교는 단편적으로는 쉬어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증명처럼 그러한 단편적인 쉬운 것들, 보이는 것들을 이동하고 비교하는 것들을 가지고서도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다.

쉬운 것들을 모아서 붙이는 것만 잘 수행하면 말이다.

 

원래의 길로 돌아와 보자.

생각이 정말 연장이랑 다른가?

형태들을 비교하고 치환하는 그런 작업들이 결국 생각이면 안 되는 것인가?

삼각형처럼 쉬운 것이 아닐 뿐,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 모형이 생각하는 것의 정체 아닐까?

데카르트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참 거짓을 의심할 때, 진정으로 참된 것을 알 수 있을까 고민할 때, 결국 이러한 고민의 답은 생각의 정체에 달려 있다.

데카르트가 지적하듯, 결국 참이냐 거짓이냐, 그것이 진정으로 참일 수 있냐는 문제는 코기토’, , 생각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단순한 기계적 작동(형태들을 다루는 비교, 치환 등의 변형들)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그러한 기계적 작동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렇다면 진정으로 참된 것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은 그저 운동이지 앎이 아니다.

돌멩이의 떨어짐이 참되냐고 묻는 것은 그렇기에 무의미하다.

우리의 생각이란 것도 그런 것일 수 있고, 그 경우 그것이 참되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 문제를 심신이원론을 통해 다루려고 한다.

 

 

아마도 많이들 들어본 데카르트와 다를 것이다.

데카르트가 코기토로 확신을 얻고, 신을 통해 진리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눈에는 데카르트의 논증이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그렇다면 4성찰, 5성찰, 6성찰은 뭐하러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코기토로 확신을 얻은 것이 아니다.

코기토로 진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의식이야말로 앎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참고로 데카르트는 의식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의식이란 단어가 로크의 신조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오히려 참과 거짓을 판별할 때 드러나는 의식 따위가 무엇인지를 의심하고 있다.

적어도 그것이 참과 거짓을 꾸며내는 것일지라도, 적어도 그것이 참거짓이란 것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코기토를 중요시하는 것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신 존재를 증명한다.

그가 신을 증명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인이고, 신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어서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이들 중 이런 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다.

신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신을 증명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신을 증명한다. 그러니 데카르트가 신을 증명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 회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몰상식한 추론이다.

 

데카르트가 증명하는 신이 정말로 그리스도교의 신인가?

그렇다면 5성찰에서 신을 또 증명하는 데카르트는 두 신을 섬기는 것인가?

 

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증명하냐가 중요하다.

, 신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불완전함과 완전함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증명하는 신은 완전함 그 자체가 아니다.(이것은 안셀무스식 증명이다)

데카르트는 상대적 완전함을 말한다.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증명을 수행하며 참 거짓을 말한다.

하지만 참 거짓일 수 있는 것은 무한히 많은 것 같아 보이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그런 것은 애초에 인식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코기토의 투명성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은 부분적인 완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은 확실해보이지만, 그것들 외의 것들은 잘 모르겠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확실한 것들이 기원을 통해 추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앎이 가능하다면, 확실히 안다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따위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참이 되는지, 그 기원은 알 수가 없다.

생각의 기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것들은 확실해보이고, 바로 그 점에서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다른 생각들은 이렇게 확실해보이지 않으니까!)

이러한 구별은 어떤 것은 빨갛고 다른 어떤 것은 노랗다는 식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수행적으로 다른 것이다.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빨간 것과 노란 것이 다른 것처럼, 느낌으로도 다른 생각들과 다르지만 이것이 다른 이유는 단순히 느낌 상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참이라는 것이 우리의 수행활동이고, 그러한 수행활동 상에서 어떤 것이 본질적인 것이냐는 판단에서 다른 것들과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참과 거짓은 빨강과 노랑처럼 다른 것이 아니다.

분명 참이라는 느낌도 있고, 거짓이라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느낌 상의 차이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느낌 상의 구별도 중요하겠지만, 데카르트가 따져보고 싶은 문제는 그런 느낌 상의 차이는 아니고, 바로 그것이 느낌 상의 차이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의 기교이다.

회의 속에서 느낌 상의 차이들은 배제하고, 그렇게 배제되는 것들 속에서 결국 남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것은 참과 거짓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들, 그 속에서 판단의 주체와 판단의 대상들의 연결고리들이다.

이렇게 찾아낸 연결고리는 참과 거짓의 기원까지 이어져있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알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이 수행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는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그 연결고리, 판단 배후로 이어진 연결 고리로 신을 가리킨다.

지금 참거짓 판단을 수행하는 존재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이 신은 물질세계일 수 있다.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해당 가능성을 말하며 그것이 물질세계가 아니란 것을 별도로 증명한다.(5성찰)

중요한 것은 참거짓은 판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판단의 기원은 모르겠지만, 그러한 판단이 현상적으로 구별되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고(판단인 것과 판단이 아닌 것이 빨강과 노랑처럼 구별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데, 그러한 체계 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상태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 모두는 사실 상식적인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인 기교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식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감각과 상상, 사고가 구별되고, 이미지인 것과, 형태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구별되고, 판단을 수행하는 주체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들은 그저 구별되니 구별된다는 식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와 함께, 잠깐 세상의 일들을 제쳐두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한번 성찰해보면서,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별하게 되는 것들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사고의 흐름을 재생하는 장치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는 그의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사고를 재생하며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판단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결국 참거짓은 느낌 차이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대상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 고민에 빠진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은근슬쩍 이렇게 말하며 안심시킨다.

뭐 그래도 우리가 이랬다 저랬다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긴 하잖아?”

이렇게 고민할 수 있다는 것도, 무엇인가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가능한 거 보면, 우리가 아무렇게나 참거짓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우리의 기원이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오류를 교정할 수 있을 정도로는 체계적이다.

지금 당장 우리 생각의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추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진단을 통해 데카르트는 더욱 많은 것들을 알려는 그 자신의 시도를 옹호한다.

이렇게 완전함이 부족하지만, 그것이 낙관할 정도로는 완전하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증명이 된다.(4성찰)

사실 이 증명은 근거가 없지만, 우리가 의심하기 위해서라도 받아들일 희망이란 점에서는 합리적이다.

때문에 이는 그의 성찰에서 허리를 이루며, 이후(6성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 본게임이 시작된다.

우리는 감각, 상상, 생각을 구별하고, 이미지에 기반한 것과, 이미지를 넘어선 사고의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관념은 각 기원들을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명백한 복합관념은 분명 존재한다.

지휘통제실을 지통실로 부르는 것이나,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란 것 따위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모든 관념들이 단순관념인지 복합관념인지는 알 수 없고,

겉보기에 구별되는 관념들이 실제로 같은 관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능한 모든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인 것처럼, 겉보기와 기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연장적인 것이란 관념과 생각하는 것이란 관념이 다르다는 것으로는 두 관념이 다르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 두 관념은 기원적인 측면에서 구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제작 가설이다.

어떤 관념들과 그 관념들이 제공하는 도구들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만듦은 임의적이지도 않고, 그냥 도약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의 기하학적 증명처럼 단계적으로 어떤 관념들과 그 관념들을 변형시킬 도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작은 한정된 도구들을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니 도구와 대상을 한정하여, 생각하는 것과 연장적인 것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비교를 통해 생각하는 것이 연장적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즉 생각하는 것들을 가지고 연장적인 것들을 제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연장적인 것들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여줌이 이상해보일 수 있으니 좀 더 설명해보자.

 

연장적인 것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순수하게 연장적인 것들에는 불가침투력도 해당될 수 없다.

즉 도형과 도형들의 변형만이 연장적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어떤 ”, “지속따위를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할 관념들이다.

또한 연장적인 것들을 다루는 기하학만하여도 순수하게 연장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는 기하학을 수행하는 기하학자가 숨겨져 있고, 그의 활동과 그의 시간이 기하학이란 체계를 운용할 수 있게 한다.

때문에 연장적인 것은 생각하는 것에 비해 열등하다.

연장적인 것들은 관념적으로 제한적이니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때문에 연장 이상의 것은 요구되며, 이 자리를 생각하는 것이 채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의 자리는 확고해진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가능한 완전한 질서, 그러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힘 따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앎의 한계에서 완전함을 발견했듯이, 연장적인 것의 한계 속에서 생각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들을 통해 심신이원론은 진행된다.

이제 몸과 마음의 구별이 확고하다는 것까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말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구별되고, 해당 관념들의 기원 자체는 모르지만, 물질 관념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적어도 두 관념이 실존 상 구별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생각이란 관념은 물질을 포괄하지만, 물질의 존재 여부는 독립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은 존재하면서도 물질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물질이 관념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생각 관념과 물질 관념은 그렇기에 실존적으로 구별된다.

물질의 실존이란 차원은 관념 차원과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별이 심신이원론의 완성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지금 구별에서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은 말해질 수 있다.

하지만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몸이라는 관념은 있지만, 몸이라는 관념을 포함할 물질일반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데카르트의 논증에서 정신은 물질을 포괄할 수 있으면서도, 물질을 함축할 필요는 없다.

물질이 그저 관념적으로만 존재해도 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면 물질 관념은 존재하지만, 물질은 실존하지 않을 수 있다.

물질들에 대해 많은 것이 사고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사고되는 물질이 하나의 물질 덩어리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의 완성은 그렇기에 둘의 독립성에서 끝날 수가 없다.

신체도 존재해야한다. 신체로서!

그러니 물질이 관념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존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너무나도 당연해보이지만, 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실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규정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노트북은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해지는 노트북의 존재가 이것이 실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연장이다.

그러니 노트북은 연장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때 노트북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어려움이 생긴다.

노트북의 관념이 연장성이라는 관념을 포함한 관념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노트북의 실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니콘도 연장성을 포함하겠지만, 그렇다고 유니콘이 실존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연장성이란 관념을 단순히 포함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연장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한 개념이라면 어떨까?

기하학적 도형은 그 자체의 본질이 연장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연장성으로만 규정된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하학적 도형이 연장적인 물질 일반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해졌다.

기하학적 성질들은 그것들의 실존을 전재하지 않고서도 말해질 수 있다.

삼각형따위가 실존하지 않아도, 삼각형이란 관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참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신의 물질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 아니었는가?

그러니 이것으로는 실존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실존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데카르트는 여기서 육체와 영혼의 상호작용을 가져온다.

육체와 영혼을 단절시킨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데카르트가 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얻는 관념들이 육체를 경유하며, 그 관념들이 어떤 세계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생각이 관념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유함에 있어 우리는 이미지를 활용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사유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바로 이 이미지는 분명히 실존하고, 이 이미지는 관념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이 앞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감각, 이미지, 관념 구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즉 순환논법이 아니란 소리다)

데카르트는 천각형 같은 사례를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천각형은 분명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다.

우리는 그것의 각의 수, 변의 수, 외각의 합 따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이미지를 가지진 못한다.

우리는 이미지 없이 그것을 아는 것이다.

때문에 관념과 이미지는 다르다.

이미지를 통해 관념을 사유할 때가 있고, 그런 경우가 많음에도, 이미지 자체가 관념은 아니고,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과, 관념을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이미지와 관념의 구별은 정당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의 기원을 생각해보자.

이 이미지는 분명 순수한 정신의 산물은 아니다.

정신은 관념을 대상으로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분명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존재가 드러남에도, 관념이라는 존재와는 구별되는 존재이다.

, 그것은 관념처럼 실존하지만, 관념과 다르게 실존이다.

관념, 정신적 존재와 다른 존재란 것이다!(“존재한다라는 말이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그것이 신체의 감각기관과, 신체 속 감각기관들의 정교한 조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감각과 이미지가 신체에 있다고 느끼고 상상한다.

발가락이 아프면, 감각은 발가락에 있고”, 나란 인간의 모습(이미지)를 상상할 때, 바로 그 모습(이미지)은 세계 속에 있는어떤 신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감각과 상상의 위치 지음이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그것이 내 신체의 고통이라고 상상하며, 그것을 나쁘다라고 판단(이것은 사유에 해당된다)한다.

하지만 고통과 나쁨은 그 자체로 무관하다.

고통이란 감각은 관념이 아니고, 더더욱 나쁨이라는 관념은 아니다.

때문에 고통을 나쁘다고 판단할 관념적인(사유로써 파악되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말하듯, 우리는 그러한 판단을 내리며,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판단한다.

이성적 근거와 무관하게 아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보이는 이러한 판단의 경향성을 데카르트는 본성이라고 부른다.(데카르트는 이런 의미에서의 ‘natura’ 개념은 이전의 용법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러한 용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본성을 개념화하고, 그 영역을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놀라운 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 영역이 만약 정말로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임의적이라고 가정해보자.

본성적인 경향성은 모두 오류이며,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오류의 진정한 무시무시함은 우리가 그러한 오류를 계속해서 범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이 오류의 진정한 무시무시함은, 우리는 그것이 오류임을 모르고 범한다는 데 있다.

본성에 해당되는 부분은 체계적이다.

우리는 특정 이미지와 특정 관념을 체계적으로 연결한다.

물론 그러한 연결이 진정으로 참인지는 모르고, 그 연결 근거를 갖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

이것이 정말로 오류라고 할 경우, 그러한 연결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그것의 연결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만큼이나 그것의 연결을 배제하는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둘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둘 사이에 도약이 있다는 것이다.

감각과 상상이 관념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감각과 상상을 통해 관념을 생각하는 것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을 뿐이지, 그것이 오류인 것은 아니다.

만약 감각과 상상을 관념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겠지만, 감각과 상상이 관념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가 아니다.

본성의 핵심적인 역할은 동일시가 아니라 연결이다.

때문에 그것은 감각과 상상이 관념과 같다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도약만으로 오류임이 증명되지 않는다.

만약 저러한 연결 모두가 오류라면, 우리는 그것이 참인 이유를 모르는 것만큼이나 거짓인 이유도 모르며, 우리는 그것들이 진정으로 거짓임에도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는 이 무시무시함을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이것이 앞에서 논증한 신의 자비로움과 대립되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는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경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완전한 신을 발견하였고, 그 신이 적어도 우리보다 완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족할 만큼 불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4성찰)

이러한 증명은 다음과 같은 증거를 토대로 추론된 것이다.

신이 절대적으로 완전한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참과 거짓을 분간할 정도로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기원이 될 존재는 우리보다 더 완전할 테니 완전함이 부족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거는 바로 우리가 참과 거짓을 분간할 정도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물론 이러한 분간을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할 정도의 완전함, 그러한 완전함을 토대로 그가 진행하는 추론을 수행할 만큼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정도의 완전함을 가지고 우리가 참과 거짓을 부족하지 않은 만큼 분간할 능력이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었을까?

분명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듣고서, 우리가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떠올렸을 것이며, 그런 능력을 발휘한 우리의 경험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자비로움의 기준은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본성에게도 적용된다.

본성은 분명 오류를 추동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교정 또한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물속에 넣은 막대가 휘어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만지고서 우리의 감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따위)

그러니 본성은 오류를 교정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오류 교정 여부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본성은 오류 그 자체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가 제시한 증거와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감각과 상상 사이에서의 체계성과 감각과 상상이 관념과 맺는 체계성은 다르다.

때문에 4성찰에서 호소한 오류 교정 가능성, 6성찰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인 오류 교정 가능성은 6성찰의 핵심 문제를 해결할 오류 교정 가능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그 정도의 오류 교정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신의 불완전함은 증명되지 않고, 부족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니 그 정도의 기대는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논증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이 정도의 기대는 앎에 필수적이니 그 편향을 수정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칸트의 <시령자의 꿈> 14장 참조)

하여간 데카르트는 우리의 본성이 우리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을 믿자고 말하며, 그렇게 심신이원론을 완성시킨다.

 

 

그렇다면 심신이원론은 무엇인가?

감각과 상상이 이성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인가?

당연히도 아니다.

바로 그것들이 우리의 이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들이 우리의 신체와 물질의 작용에 맞춰 체계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가 치료사로 이름을 날렸고, 그가 많은 해부를 하며 신체의 작용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러한 체계성이 우리의 영혼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특정 뇌 부위가 특정 감각과 상상을 가능케 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러한 규칙성과 일반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의 영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특정 부위가 영혼은 아니며, 특정 부위의 작용이 영혼의 작용은 아니란 것이다.

때문에 그가 심신인과에 고민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가 심신인과에 고민한 것은 우리 사고와 우리 신체의 규칙성의 일치를 이해할 이론(오늘날로 따지면 신경과학에 기반한 인지과학-심리학)을 제시하고 싶어서였지, 형이상학적 놀음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해당 문제를 논의하려고 한 인물이 데카르트의 추종자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확실하다.

그는 형이상학자이기 위해 과학자이길 그만두는, 혹은 인간이길 그만두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다.

Posted by 개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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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카톡 복붙


 

이거 관련해서는 담에 만났을 때 말로 전달하려고 했는데, 언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글로 쓸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 한번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제가 이번에 참고한 책은 마이클 해트와 샬럿 클롱크가 쓴 <미술사 방법론>이란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미술사 입문서 중 하나입니다.

 

이 책 자체도 꽤 괜찮은 책이고, 어제 같이 얘기했듯이, 개론서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책 관련해서는 그 시각을 좀 확장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저자들이 괜찮은 사람인 것과 별개의 문제인데, 이 양반들이 다루는 19세기 (독일) 미술사는 신칸트주의란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들이 몇 번 언급은 하지만, 이 저자들은 신칸트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가 깊진 않고, 정신과학이 왜 문제이고 이를 학문으로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좀 더 큰 맥락 속에서 미술사의 역사를 이해하면 더욱 흥미로운 점이 있고, 이것이 인류학과 통할 부분이 있기에 그런 부분을 정리해 공유하려 합니다.

 

 

일단 미술사에서,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난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19세기 미술사가들처럼) 이는 생물학적, 고생물학적, 비교해부학적인 은유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다뤄지는 대상은 개체 차원, 종 차원, 유 차원으로 이해해보죠.

개체란 것은 개별 작품에 해당됩니다.

종은 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유는 좀 복잡합니다. 작가가 속한 무엇인가가 되죠. 그것은 시대일 수도, 지역적 화파일 수도, 아니면 화풍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어떤 사회적인 무엇인가가 될 것이죠.

 

문제는 저것들을 어떻게 포착해내고, 저것들을 어떻게 연결하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 차원들은 고유하면서도 서로를 밀어내는 성질이 있죠.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작품의 특유함으로 이어지는 게 정상이고, 이는 작품을 다른 것들로부터 이탈 시키는 성향으로 이어지죠.

작가 중심으로 보면, 작가의 천재성이 강조되겠죠.

유적으로 접근하면 앞의 저 둘은 그저 사례에 불과하게 됩니다.(뵐플린의 그 유명한 인명 없는 미술사가 그 이상이죠)

하지만 저것들은 다 연결될 수밖에 없고, 저것들을 연결하면서도 그 개별성을 확보해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더욱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는데, 미술사의 연구 대상 자체는 개별 작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런 세 차원의 문제는 모두 특정 작품 속에서 다루어져야만 합니다.

즉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어떤 것은 사회 차원의 것이고, 어떤 것은 작가 차원의 것이고, 어떤 것은 작품 차원의 것임을 제시해야하는 것이죠.

이러한 제시는 우리 눈에 포착될 수 있는 figure를 통해서 제시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figure는 임의적인 게 아니라 유형적으로 포착되어야하죠.

그림 속에 있는 특정한 형태 요소들을 구별하여, 어떤 형태들이 어떤 차원에 속할 문제인지를 구별해야합니다.

 

이런 구별의 좋은 예는 모렐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렐리는 감식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손이나 귀처럼 중요하지 않은 부위들을 그리는 방식을 가지고 작가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런 세부 요소를 그릴 때, 작가의 버릇 비슷한 게 있다는 것이죠.

사실 이런 주장은 모렐리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 본인이 모렐리를 그렇게 해석했고, 모렐리는 사소한 것의 중요성을 포착해낸 인물로 여겨졌죠.

하지만 모렐리 본인의 입장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모렐리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사실 두 학문은 궁합이 잘 맞습니다. 퀴비에가 딱 이 케이스...)을 모범으로, 어떤 형태적 요소들이 어떤 유형 판별에 속하는지를 구별한 것이었거든요.

주머니와 자궁의 차이로, 유대류와 포유류를 구별하듯, 얼굴 같은 것은 유적 요소이고, 손과 귀 같은 것은 종적 요소라 이거죠.

하여간 이런 식으로 우리가 포착해낼 수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단위체적으로 구별해내고, 이것들을 유형화하여 어떤 요소로 해석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생각하심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이것들을 적당히 범주화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범주가 어떻게 성립하냐는 것은 큰 문제거든요.

이건 해석 문제 랑도 바로 연결됩니다.

그걸 어케 아냐 이것이죠.

그건 과거의 그림이고, 유적으로 우리와 구별되는 것인데, 우리가 어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 그런 개체와 종 차원의 특성을 해당 유적 차원에 귀속 시키는 것이 객관적으로 합당한지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때문에 저런 과거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통문화적, 비교문화적 문제로 바로 이어지죠. 그래서 뵐플린이나 리글은 단지 서양 미술사를 정리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느 문화든 그 시각적 요소를 분석해낼 수 있는 보편방법을 그들이 창안했다고 주장한 것이고요.(자연스레 그런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죠.

하나는 단선론적 발전론입니다.

단선론적 발전론에서 다른 것들은 저발전 단계에 귀속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 속에서 포착할 수 있고, 자신들이 가장 발전된 단계에 있으면 그 이전의 단계들은 모두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거죠.

여기서 발전은 과거의 성취를 소멸시키지 않고, 누적적으로, 추가적으로 얻어낸 것이란 전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진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누적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실 누적적이지 않아도 발전일 수 있거든요)

 

다른 하나는 심리학적인 분석입니다.

뵐플린 리글이 이쪽에 속하고, 이게 지각심리학 및 신칸트주의로부터 저들이 배운 방법이죠.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기본 단위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좀 더 추상적 단위체를 이루는지를 탐구하고, 바로 그 결합 공식들을 가지고 다양한 시각적 인식을 분석하자 이겁니다.

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분석론의 작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감각에 불과한, 정제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차이소를 포착해 차이화를 진행)할 수 있는지를 범주화하고, 이것들로 쌓아올라갈 수 있는 끝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이런 범주는 그래서 대립적 요소이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 차이나는 것들의 관계를 포착하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뵐플린, 리글, 파노프스키 모두 마찬가지이고, 이건 칸트도 그렇게 확립했습니다)

저런 관계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이러한 확인을 통해 작품들의 구조를 포착할 수 있고, 이는 해석이면서 객관적 판별 기준일 수 있다 이거죠.

 

역사적이든 심리학적이든 어느 쪽이든 이런 분석은 규범성을 함축합니다.

저기서 객관적인 실체는 해석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칸트에서 온 건데, 객관은 걍 객관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의 대상 포착이 필연적일 때 객관인 겁니다.

그러니 해석=객관이고,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요소들의 연결망을 포착해서 해석하는 것이 성립되었을 경우, 그렇게 읽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읽은 것이 되고요.

그러니 오해”, “잘못된 평가가 가능하단 말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이게 좋은 것은, 관람자를 포괄하면서도, 관람의 방향성을 한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관람자는 무시되는 게 아니라, 중간항에서 객관적인 기본요소들을 통해 재구성됩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관람자는 이러한 감정-정보의 재생산의 매체에 속하고, 관람자 일반은 해당 체계의 구조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원래 얘기로 돌아와 이게 인류학과 관련 될 만한 부분을 강조해보겠습니다.

일단 파노프스키 본인도 iconography(도상지학)iconology(도상학)의 관계를 ethnography(민족지학)ethnology(민족학? 인류학?)에 은유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방법이 민족지학과 민족학의 관계처럼 성립되어야하는데, 천문학과 점성술처럼 관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거죠.

뭐 이런 것은 작품 안에서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으로 얘기된 것이지만, 이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얘기입니다.

작품 안에서 이 작품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graphy에 기초한 사례-유형 수집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총체화되기 위해서는 그런 수집을 통해 작품 자체의 정립 또한 제시되어야합니다.

여기서 이게 들어갈 수도 있고, 저게 들어갈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이것이 들어갔냐를 보여줘야하니까요.

그러면 그런 설명에서 어떤 가능성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포착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게 단순히 특정 부분을 그리는 테크닉 측면일 수도 있고, 작가의 습관일 수도 있고, 그 당시 해당 문제를 표현할 수 있는 테마와 모티브, 즉 도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의뢰자의 취향 문제일 수도 있고,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예술가적 천재성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한 작품을 총체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총체성들도 모두 동원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이 순환되면서 총체를 이룩할 수밖에 없다 이거죠.

그래서 한 작품은 다른 그라피들을, 다른 사례들을 매우 잘 수집하고 분류하고 기록할 수 있어야하고, 동시에, 그러한 사례들 속에서 하나의 logos를 포착하여 그 실현태로서 작품을 분석해낼 수 있어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게 천문학과 점성술의 관계처럼 보일 수 있단 얘기를 한겁니다.

일단 유형화와 규칙을 통해서 한 작품의 특성을 묘사하는 것은 누적적인 포착을 통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려진 기법들과 주제들을 수집하면 어떤 작품이 어느 시대 어느 화풍이란 것은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진짜냐 아니냐는 것은 전자의 문제로 끝까지 간 것에 불과하고(이걸 감식이라고 하는데, 감식의 아버지인 모렐리나 배런슨도 결국은 평가로 갑니다)

결국에는 이 작품의 총체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평가가 가능해집니다.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 이런 것이 말이죠.

이런 평가에서는 저런 요소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결합하였고, 어떤 긴장 속에서,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으로든(파노프스키), 긴장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으로든(바르부르크), 특정한 선택 속에서만 총체화가 가능한 것이죠. 이런 총체화의 선택에서 가능한 선택지를 비교 분석하고, 그 긴장들의 배치를 통해 해당 작품의 가치(좋은 작품이냐 나쁜 작품이냐 천재적이냐 범작이냐 따위)가 판별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비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교의 유의미성까지 가는 게 미술사학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교와 유의미성이 포착되기 위해서는 grapylogos가 결합되어야한다는 것, 그것을 결합하기 위해 보편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들을 어떻게 배치해야하는지, 얼마나 배치해야하는지 따위가 고려된다는 점에서 인류학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말이 되는지는 미독이 평가해주시길ㅋㅋ

Posted by 개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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