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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캐시 캐루스의 <트라우마, 소유하지 못한 경험>에 대한 코멘트

원래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을 다룬 다음에 보고스트의 <단위조작>을 다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랑시에르에 대한 저의 문제제기와 관련해서 <소유하지 못한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 이 책을 먼저 다루려 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할지라도, 말할 수 없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도 곧잘 까먹고, 중요한 것에 대한 주의 환기는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전 그것이 중요하단 것 자체는, 학술적으로 그렇게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러한 활동이 학술적인 활동일 수 있단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외려 저러한 활동이야말로 학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가장 중요한 경로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사회적인 거라고 떠들길 좋아하지만서도, 저 또한 학문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저도 이럴 때보면 맨날 목소리 높여 비난하는 속물교양인들 중 하나인...) 그러다보니 사회적인 역할과 별개로, 그 자체로 학문적인 게 저에겐 더 중요합니다. 사회적인 역할도 중요하겠지만은, 그것이 일단 멋진 연구일 수 있어야 좋다는 겁니다. 적어도 전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보다는, 제가 보기에 멋진 걸 연구하는 사람이고 말이죠.(사회적으로 중요할 만한 연구는 많이 알지만... 전 그것들을 선택할 생각이 없습니다... 멋지지 않기 때문이죠...ㅋㅋ 정말로 위선적인 속물교양인입니다 전) 그러니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단 얘기 따위는 각잡고 연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너무 당연하거든요 저건. 저게 만약 당연하다면,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고, 말할 가치가 있을지가 문제가 되겠죠. 저는 지난 글(https://cynicaldog.tistory.com/259)에서 정말로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무엇인가를 말해야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저 자신도 저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만서도, 저게 맞긴 맞는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캐루스의 책은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꽤나 흥미로운 책입니다. 뻔한 걸 말하지 않으려는 책이기 때문이죠.

 

아마 이런 의문이 들겁니다. 캐루스 책이야말로 저런 뻔한 얘기를 하는 책 아닌가하고 말이죠. 실제로 저도 의심이 들었고, “이 책 사 말아?”하며 고민했거든요. 게다가 이 책은 실제로 그렇게 읽혀왔습니다. 하여간 트라우마가 중요하고, 하여간 재현불가성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떠드는 쓸모 없기만 하면 다행일, 꽤나 많은 경우 사악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책으로 말이죠. 이런 류의 책이 쓸모 없기만 하면 다행인 이유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어쨌든 임상적인 개념이고, 임상적인 개념이어야만 합니다.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에게 마음대로 정신병을 덧씌우고, 그들 마음대로 “처리”한다면 사악한 일이겠죠.(정신병자 취급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신병자로 취급한다는 것 자체도 임상적인 활동이기에, 그들을 멋대로, 취급해서 더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이곳 저곳에 적용하며, 하여간 말할 수 없는 게 중요하다며 대책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건 사악한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귀중한 자원인 “주의 관심”을 쓸모 없는 일에 낭비시키며,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죠. 이 책도 저런 사악한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책처럼 보이고, 실제로 이 책을 매개로 사악한 일에 대한 봉사가 자행되어왔습니다만, 의외로, 혹은 당연하게도, 이 책은 그런 류의 책이 아닙니다.

 

문제는 증거, 혹은 이유겠죠. 관련된 역자의 말을 옮기고 말을 이어가보죠:

 

캐루스의 문장은 방대한 인용과 복잡한 논증 구조, 다층적 수사 장치가 결합된 밀도 높은 은유적 서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번역뿐 아니라 국내 학계에서 심층적 논의를 전개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실제로 다수의 연구는 캐루스의 ‘트라우마’ 개념을 임상적 용어와 혼용하거나, 그 핵심을 ‘재현불가능성’에 두는 것으로 단순 전제한 채 단편적으로 인용해 왔다. 이 ‘재현불가능성’ 논의는 폴 드 만으로부터 계승된 해체주의적, 또는 탈구조주의적 성향을 지닌 캐루스 텍스트의 모호성에 대한 비판적 의혹을 집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캐루스는 이러한 경향이 개념을 단순화한 데서 비롯된 오독, 곧 “오해”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녀가 남긴 중요한 유산은 특정 개념어의 단일한 정의나 손쉬운 해답이 아니라,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질문 그 자체다.(p.5)

 

역자도 같은 말을 하죠. 그렇지만 당연히도 이는 증거일 수 없습니다. 원래 좋은 말은 쉽거든요. 그러니 이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되죠.(원래 주장되는 유의미성만 보면 모든 연구는 훌륭합니다) 실제로 그러한지, 그리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그런데 웃기게도 전 여기에 “증거”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저런 의혹들 자체가 저에겐 너무 기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20주년 증보판에 추가된 (6장에 해당될) “후기”를 읽을 때 저는 좀 심란했습니다. 이 양반의 저작에 쏟아진 의혹들이 너무 유치하고, 무용하고, 사악해보였기 때문이죠. 유럽중심주의자라고 비난하질 않나(뭐 어쩌란 건지ㅋㅋ), 가해자 서사라고 비난하질 않나(뭐 어쩌란 건지ㅋㅋ), 몰역사적인라고 비난하질 않나(이 책 안 읽었나?ㅋㅋ) 하여간 답도 없고, 도움도 안 되고, 일단 비난하겠다는 동기말고는 딱히 말할 이유가 없는 의혹이 많았더군요. 그런데 전 저런 의혹들이 하나도 공감 가질 않았고,(공감 간다면 사악한 치인 건데 전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 책을 왜 저렇게밖에 못 읽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 이유입니다.

 

제가 저런 의혹에 공감이 가지 않았던 건 이 사람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바로 다른 걸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 트라우마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바가 역사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저자는 역사를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역사는 그냥 몇 날 몇 시에 누가 뭘 했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주 과거의 사실과 등치되곤 하지만, “역사”는 과거의 사실로 등치될 수 없습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뭘 했다는 등의 사실만이 아니기 때문이죠. 애초에 그것을 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지, 그걸 왜 연구하고, 그걸 왜 역사로 기록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두 가지 점에서 미스터리합니다. 도대체 왜 나와 시간적으로 무관한 그것들이 관련이 있는지가 미스터리하고, 애초에 그건 남 이야기에 불과한데 왜 우리가 그것들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지가 미스터리합니다. 즉, 역사는 시간적으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질적이라는 겁니다. 캐루스는 이 사실을 마주하고, 이 미스터리를 풀 열쇠로 트라우마에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캐루스는 자신이 ‘트라우마’라는 단어 아래에서 주목하려는 사태에서 “시간”과 “지시”가 중요함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전 이게 “증명”, 혹은 “증거”가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장의 주제고, 제목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지 않나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죠) 그는 프로이트가 트라우마의 사례를 가져오고, 그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그가 지금이 아닌 과거에, 자신이 아닌 타자에 얽매여 있다는 것 뿐입니다. 캐루스는 트라우마의 본질 같은 걸 밝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는 양립불가능해보이는 두 가지 해석 모두를 긍정하며, ‘트라우마’라는 단어 아래에서 관찰되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히려고 합니다. 그는 삶을 긍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삶을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죽음을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죠. 이 두 해석 중 무엇이 옳은지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중요하지만,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고, 이는 중요하죠. 투쟁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기 참조와 타자의 출현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은 증언합니다. 그가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투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에게 이미 중요해진 타자라는 것을 말이죠. 자신이 된다는 것이 삶을 의미하는지 죽음을 의미하는지 우리도 그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이 탄생과 함께 시작된 건지, 트라우마를 촉발한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사건에 의해 시작된 건지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그의 삶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과 그 당연하지 않음이 누군가와의 얽힘 때문이라는 것 뿐이죠. 캐루스는 이걸 말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캐루스가 ‘트라우마’라는 단어 아래에서 주목하는 바가 저러한 것이라면, 그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역사입니다. 그가 트라우마를 통해서 보는 것은 트라우마 사태 자체일 수가 없기 때문이죠. 트라우마는 그 자체로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에 향해 있음으로서 무엇인가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트라우마에 주목하면, 트라우마가 아니라, 바로 그 트라우마가 향해 있는 무엇인가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니 캐루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가 아닐 수 있는 거죠. 그 자신이 말하듯, 그가 주목한 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바로 그 트라우마가 향해 있는 “역사”일 수 있는 거고, 그게 거짓말이 아닐 수 있는 겁니다.(p.258) 근데 이게 왜 역사인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해서 그가 역사를 증언한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큼 사악한 일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누군가가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시군요”라고—제가 자주 홍상수는 글러먹은 인간이고 그의 작품도 예술이 아니라고 욕하긴 하지만 이를 2006년에 써먹은 건 분명 홍상수니까 가능한 일인ㅋㅋ—비난할지라도, 전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라는 식의 폭력 잔치에 찬동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캐루스의 것은 역사라고 옹호해주는 걸까요? 애초에 캐루스가 주목하는 것이 “역사의 가능성”이기에 그러는 겁니다.

 

“개인사”와 “역사”를 쉽게들 구별하고, “개인사”하면 소박하게만 생각하지만 실제로 “개인사” 또한 역사라고 할 법한 특징을 가집니다. 제가 앞서 진단한 미스터리를 개인사 또한 갖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2500년 전 일이든, 10년 전 일이든, 과거인 건 매한가지고, 고대 그리스의 누군가의 일이든, 과거의 내가 한 일이든 낯선 건 매한가지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과거의 나는 과거의 나일 뿐이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정체성이 철학의 미스터리인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겁니다. 타자를 포용하는 일이 미스터리인 것만큼이나 정체성도 미스터리이고, 정체성이 미스터리인 것은 “나”란 것도 여럿이고, 이들이 모두 타자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타자의 존재 논변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ㅋㅋ) 캐루스는 이 진실을 잘 알고 있고, ‘트라우마’를 통해 이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개인사적으로 누군가가 과거와 타자에 얽매이는 일에 주목하고, 그러한 일이 개인사를 넘어 역사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은지를 살피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가 “개인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역사”란 게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묻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가 이를 잘 해냈냐고 물으면 글쎄올시다고 말할 거 같긴 합니다. 캐루스도 저나 랑시에르처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양반도 저나 랑시에르처럼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지 않고, (저나 랑시에르처럼) 책에 대해서 떠듭니다. 이건 분명 잘못이죠. 이해는 가지만요. 결국 그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책밖에 없는 사람이어서 그러는 거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듯(비슷한 고충을 여기서https://cynicaldog.tistory.com/158 말한 적 있죠 저도) 물론 이해가 된다고 변명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도 양해될 수 없는 잘못이 있으니 말이죠.(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맡은 바를 잘못 처리하는 일은 인간적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그게 대통령이라면 그 누구도 그 잘못을 용납해주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책은 분명 중요한 참조점으로 활용되니 말이죠.(소위 “이론”이란 건 책을 참조하면서 가능해지는 무엇입니다) 또 그 다음의 것은 그 다음에 말해도 되고, 그 다음 사람이 말해도 됩니다. 캐루스의 작업을 본 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작업을 하면 된다는 거죠. 그러니 양해될 수 있습니다. 욕할 필요까진 없기 때문이죠. 비록 책에 대해서만 떠들고, (멋은 좀 더해주겠지만) 과잉 해석으로 쓸 데 없는 소리를 늘어 놓긴 합니다만(<히로시마 내 사랑>에 대한 논의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ㅋㅋ 근데 저 작품을 가지고 이루어진 논의들을 보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간... 저 작품에서 타자의 지양을 말하며 변증법을 읽어낸 쓰레기들—그런 치들이 정말 있더군요;;;—이 있다면, 반박이 필요하긴 하죠), 귀엽게 봐줄 수 있습니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잖아요? 저 정도도 못 참아주면 부덕한 일이죠.

 

하여간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감수성도 꽤나 잘 맞아 감동 받은 것도 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책이 중요한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중요한 것을 말하는 법을 말하고 있거나, 말해 볼 만한 중요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름 본인이 자신의 규범을 잘 따르는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주석 달기를 참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는데(쓸데없이 긴 주석이 너무 많습니다ㅋㅋ), 자신이 잘 모르는 사태와 관련해서는 해당 필드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고, 그와의 “개인적인 대화”로서 인용할 줄 아는 사람이더군요. ‘(개인적인 소통)’이라는, 권위도 없고, 실재성이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저 주석이 저에게는 외려 멋져보였습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조언을 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그 자신이 돋보이진 않더라도, 빛나는 것들이 빛날 수 있게 돕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죠.(저는 Quicquid nitet notandum라는 구호를 좋아합니다ㅎㅎ) 하여간 저에겐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논리도 부족하고, 글이 장황해도,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것이 참 빛나는 것임을 동의할 수 있는 그런 말을 전하는 책이었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