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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 비판" 후일담

조지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가상의 편지


조지의 것

  저 능동성-수동성 사이의 구별이 랑시에르의 여러 저작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저도 저 구별에 관해 불만이 있습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사유 체제의 모범은 실러가 [편지]에서 ‘미적 상태’라고 부른 것, 곧 (이성적 자기입법적이라는 의미에서의) 능동성과 (법칙이 이성 외부에서 유래한다는 의미에서의) 수동성이 전적으로 동등해지는 상태인데, 랑시에르는 현행적 실천 가운데에서 이 드라마틱한 평등의 장면이 연출되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랑시에르는 순전히 능동적인 (듯 보이던) 것과 순전히 수동적인 (듯 보이던) 것 사이의 구별이 단숨에 효력을 잃고, 그리하여 다음 순간에는 능동성의 배타적 할당이 아닌 능동성의 ‘장벽 없는’ 재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장면을 바랍니다. 이렇게 이해된 정치의 장면이 (심미‘화’될 필요조차 없이) 미학적인 까닭은, 개선비 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 장면이 감성적인 형식, 곧 때와 장소에 맞게 말다운 말로 들릴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해내는 형식을 재편시키는 요구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능동성을 로고스(말)에 대한 능동성으로 이해하고, 또 바로 그 로고스의 능동성이 이미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그 능동성의 고른 배분을 위해서 능동성/수동성의 위계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싶어합니다.
  기실 랑시에르는 온 화면을 능동성으로 덧칠하기 위해서만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위계적 구별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랑시에르의 관점이 강력하게 쓰일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점에 있고, 그의 관점이 힘을 잃는 이유가 있다면 그 역시 그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관점이, 개선비 씨 말씀처럼 오해를 만들어냅니다… 랑시에르 독자들 중에는, 랑시에르의 전략이 로고스의 능동성의 근본적 지위를 의심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능동-수동 구별의 이유 자체를 불식시키거나, 아니면 역전시킬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그만큼 멀리 갈 생각까진 없고, 로고스의 능동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만 검토하는데, 마치 그가 로고스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구할 성싶다는 오해를 생산합니다. 이건 그저 독자의 부주의를 탓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애당초 방지에 힘을 기울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나의 것

랑시에르가 그런 입장이었군요;; 안 그래도 랑시에르의 리오타르 비판이 이상했는데, 저런 입장이면 좀 이해가 되네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랑시에르는 리오타르를 자주 언급하더라고요.(<미학적 무의식>에 국한하자면, 거의 다 다른 책에서 언급된 걸 역자가 가져온 거지만, 역자가 그것을 가져올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랑시에르는 리오타르를 자주 언급하더라”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랑시에르의 리오타르 비판은 기이했습니다. 자기 비판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랑시에르는 리오타르가 재현되지 않는/못하는 것, 말할/말해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한다고 비판하는데, 제가 보기엔 랑시에르가 집착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뭐지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넌 로고스가 문제라는 거야 아니란 거야?”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조지의 말처럼 랑시에르가 로고스여서 문제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면, 의문이 좀 풀리겠네요.

그런데 만약 랑시에르가 로고스라서 문제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면, 좀 다른 의문이, 저 자신 또한 피하기 어려운 의문이 드는 것 같습니다. 저 양반은 왜 저렇게 오해를 살만하게 말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전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다룬 문제입니다만, 주목하려는 문제 측면이 다르고, 이 점에선 저 자신도 피할 수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바로 표현의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어제 저 글을 쓰다가 “어? 이거 이상한데?” 싶었던 게 있습니다. 저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대립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했고, 그것이 대립하기나 하는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저런 지적을 하다보니 저도 그 대립을 당연시하거나 동의하는 방식으로 쓴 구절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제가 정치철학과 미학의 결합, 혹은 그러한 결합의 필요를 얘기할 때, 저는 정치의 논리가 고전 논리뿐만 아니라 비고전 논리로도 해명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지성 형식이 아니라) 감성 형식의 문제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런 식의 진술은 문제가 있습니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대립에 대응될 대립, 지성과 감성의 대립, 논리와 비논리의 대립을 전제하는 진술이니 말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대립되는 것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어서 문제적입니다. 만약 (제가 이전 글에 진단했듯이) 대립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면, 그리고 저 둘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취급해선 안 됩니다. 어디까지 논리이고 어디서부터 비논리인지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그것의 경계 설정 자체가 우리가 결정해야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죠. 제가 “논리”와 무관한 것처럼 언급한 “정치의 논리”가 그 자체로 논리와 무관한 것인지는 열린 문제이기에, “이건 당연히 감성 형식의 영역에 속하고 그러니 미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라는 진술은 문제적이었단 겁니다. 저 또한 매우 문제적인 진술을 하고 있었고, 이 점에서 랑시에르를 비판할 자격이 없었다는 거죠.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저 문제가 저에게나 랑시에르에게나 사소하지 않은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저나 랑시에르나 학문 분과의 경계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자체로 당연시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결정하는 역사에 주목하고 있죠. 그런데 이것들조차 부차적입니다. 물론 저것들도 중요합니다만, 저나 랑시에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그 경계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투쟁이야말로 저나 랑시에르에게 가장 중요한 무엇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투쟁이 곧 철학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오해를 살 실수를 하고 있는 겁니다. 랑시에르뿐만 아니라 저도.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물론 실수는 당연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기에,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특별한 것이지, 실수하는 게 특이한 것은 아니긴 합니다만(저는 시험에서 “실수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애초에 시험 자체가 실수를 의도하여 설계될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을 근거로 평가의 합리성을 확보하기 때문이죠...), 제가 방금 고백한 실수는 이런 종류의 것일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저게 말하고자 하는 바면서 그걸 제대로 말하지 못 했다는 건 정당화될 수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저나 랑시에르가 부주의해서 저런 실수를 범한 건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했어야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는 문제기 때문이죠.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제 글은 잘못 쓰였습니다. 제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 이런 거였기 때문이죠. 랑시에르는 사고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나 사고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말로 그러한지는 열린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뭐 이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다른 게 더 중요할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로 그게 뭔데?”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그것이죠. 랑시에르에게는 (~~가 열린 문제라는) 일반론적 진리가 당연할 것이기에, 그 다음이 중요했을 거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는 랑시에르에게서 “사고 아닌 것의 사고”의 실례들을 기대했습니다. 특별함이 깃들어 있는 구체적인 것을 기대했던 거죠. 그런데 랑시에르는 계속해서 (저에게나 랑시에르에게나 당연할) 일반론적인 진리를 읊고 앉아 있었기에 짜증이 났던 겁니다. 그래서 비판하고 싶어졌던 거죠. 정말로 중요한 것은 특별한 무엇인가인데, 왜 당연할 소리를 늘어 놓고 있냐는 거죠. 물론 그런 게 당연하지 않다고 진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고 진단했으면 “증명”을 해냈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걸 비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중요한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지 철학자라는 이유에서 말이죠. 근데 제 글을 보시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옵니다. 물론 나오긴 합니다. 저러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방식이 역사라고, 그리고 역사 속에서 긴장에 주목하여 가능성들을 고찰해야한다고 말하긴 하죠. 근데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말하지 않고, 저 또한 모범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못나게도요!

물론 저런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를 글로 쓰는 건 어렵습니다. 나름 생각을 정리해야만 글이 나오기도 하고, 나름 격식을 차리려고 하면 말할 수 있는 폭이 매우 줄어들기 때문이죠. 저는 그래서 구어체로 썼습니다. 학술성도 포기했고, 말하듯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말로 중요한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못 쓴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애초부터 저것을 말로는 전할 수 있지만, 글로는 쓰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착각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말로도 사실 표현이 안 될 문제 의식이었고, 말로도 제시하기 어려웠을 대안의 양태였다는 거죠.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저런 실수를 범한 것일 수 있단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랑시에르도 말이죠.(<오이디푸스 왕>을 모티프로 삼으면서 꽤나 구체적인 긴장과 그것으로부터 말해져야 교훈을 랑시에르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만약 이런 어려움이 만약 본질적이라면, 문제는 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애초부터 경계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고, 그것이 말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가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랑시에르의 리오타르 비판에 반대하며 리오타르의 작업이 오히려 로고스들 사이를 진지하게 고찰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변론한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군요…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