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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 비판

미독과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에 대해서 코멘트 남기겠다고 약속했는데, 더 미루게 되면 정말로 안 쓰게 될 거 같아서, 뭐라도 남겨 봅니다.

 

  일단 저 책을 읽은 동기부터 밝힐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랑시에르에 대해서 좀 안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스테시스>는 하여간 훌륭한 저작이라고 평하긴 했지만, 대체로 이 양반 저작들이 사짜 냄새 나는, 답도 없는 책들이란 인상을 갖고 있으니 말이죠. 안 좋아 보이면 관심을 꺼도 되는 법인데, 관심을 끌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미독이 언급했듯이, 이 양반의 작업이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작업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죠. 이 양반의 작업과 제 (미래의) 작업의 유사성은 외견상의 유사성이라고 하기 뭐 합니다. 둘 다 역사를 가지고서 떠든다는 점이나, 미학과 정치철학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죠. 이 또한 사소한 유사성은 아닙니다만, 제가 굳이 이를 ‘외견상의 유사성’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저러한 주제들에 접근하게 된 문제 의식이 유사하고, 바로 그래서 저러한 것들을 다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언급했듯이(https://cynicaldog.tistory.com/196), 저는 “정치의 심미화”, “심미적 정치철학”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저런 걸 떠들어대는 치들이 정치철학을 망치고 있고, 애초부터 “정치철학”이란 게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 따위에 관심을 갖지 않으니 저런 걸 떠든다고 디스하곤 하죠. 랑시에르도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p.13)(제가 참조한 구절은 <자크 랑시에르와의 대화>의 것을 역자가 주석으로 달아둔 것이긴 합니다) 저런 걸 떠드는 건 한심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미학과 정치철학을 같이 해야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고, 랑시에르 또한 그렇다고 말합니다. 정치의 문제란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다루는 형식이 감성 형식이라는 게 그 이유이죠. 정치에도 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논리는 고전적인 형식 논리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전적인 형식 논리는커녕 비고전 논리로도 파악될 수 있는지 잘 모를 무엇인가죠. 제가 ‘어둠의 논리’ 같은 거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마법이나 주술, 희생 제의의 논리이니 말이죠. 저는 이 논리를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미학’이라고 불릴 법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저 논리는 감성 형식에 근거하고 있고, ‘미학’이라는 용어는 감성 형식을 다루는 학문을 가리키기 위해서 탄생했으니 말이죠. 뭐가 되었던 저런 문제를 다루면 ‘미학적’이라고 말해질 법한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날 현존하는 미학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미학에 관심을 가지며 해당 분야를 기웃거리는 겁니다.(여기서 안 어울린다는 건 미학 전공자들에게 통용될 법한 교양이나 세련됨을 제가 갖추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랑시에르 또한 비슷합니다. 이 양반도 공동체 형성의 논리에 관심이 있고, 그것이 ‘심미화’라는 용어로는 제대로 말해질 수 없을 종류의 감성 형식으로 파악되어야하기에 저런 조류를 거부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죠.(같은 곳) 왜 역사를 말하는지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정치철학을 접근하는 경로/방식/문제의식이 같기에 비슷합니다. “근원적으로 비슷하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유사함은 저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둘 모두 그래서 주목하는 바가 비슷합니다. 저나 랑시에르나 결국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갈등이자 역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것들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공유합니다. 애초부터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해결이든 해소이든 아니면 지연이든) 결국 문제에 대한 응답을 결정하는 것이 저것들이기 때문이죠. 당연히도 논리는 여럿이고, 합리성도 여럿이고, 이성도 여럿인데, 왜 지금의 것이 오늘날에 우월한/지배적인 것이 되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이는 논리나 이론으로 다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연구될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러니 역사에 관심을 갖는 거죠. 현재의 것의 우월함에 관심을 갖는다고 할 때, 그 관심은 그것에 대한 이해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답답해서든, 내가 삐딱해서든 그것이 마음에 안 드니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결국에는 그것이 권위를 가질 법하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으로 탐구가 이끌 수도 있겠지만, 더 나은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들에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긴장들에 관심을 갖는 거죠. 뭐가 다른 대안이었는지, 그것의 잠행성과 현행성을 고찰하고 싶으니까요. 랑시에르도 비슷한 얘길 합니다. 그는 미학을 사고 체계(들)과의 대립을 통해 규정하는데(“나에게 미학은 예술을 다루는 과학, 혹은 학문이 아니다. 미학은 예술이라는 [주어진] 사태로부터 펼쳐지는 사유 양식이며, 예술의 사태가 어떻게 사유의 사태일 수 있는지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유 양식이다.” p.10), 이는 그가 고찰하고픈 것이 미학적 혁명이라 그런 겁니다.(p.13) 그가 그러한 것들을 탐구하기 위해서 “가능한 것들의 체계 내에서의 위치”(p.45)를 고찰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죠. 그는 긴장과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저처럼 말이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저는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만, 그렇다가 아무렇게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나름 룰이 있죠. 제가 자주 말하지만, 실패는 당연한 겁니다. 성공은 믿기 어려운 거고 말이죠.(제가 괜히 철학을 실패의 기술로, 심지어 요즘에는 “더 나은 실패”가 아니라 “나다운 실패”를 위한 기술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답이 틀렸다고 해서, 실효성이 부족했다고 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진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리 잘못된 것처럼 보여도, 심지어 역사가 그것이 오답이었음을 증명했을지라도 그것이 틀렸다는 걸로는 비난해선 안 됩니다. 정답은 저도 모르고, 애초부터 정답이 없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죠.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고민일 수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중요한 게 답이 아니라고 해도 비난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고민이 이상하면 문제고, 그건 비난할 수 있습니다. 제가 랑시에르를 탐탁잖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영역 때문/덕분(?)에 가능한 것이죠.

 

  차이는 미묘할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본인이 다루는 문제를 “주체의 결함”으로 주제화합니다.(이건 좋습니다) 그리고 이를 저도 동의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비난으로 구체화합니다. 코르네유와 볼테르의 소포클레스에 대한 비난이 그것이죠. 볼테르야 원래 그런 놈이라고 쳐도 코르네유가 왜 그랬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 하여간, 저 둘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잘못된 비극이라고 비난합니다. 주인공인 오이디푸스가 너무 불합리한 존재라 극의 그럴 법함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죽은 사람이라 참아주는 거지, 저런 소리는 참아주기 어려운 개병신 같은 헛소리라고 전 생각합니다. 괴테가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당대의 비방자들을 디스했던 것처럼, 제발 그 시간에 저 정도 수준의 작품이나 쓰라고 조언해주고 싶을 그런 헛소리거든요. 그러니 이것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걸로 뭔 얘기를 하냐는 겁니다. 랑시에르는 여기서 대립을 구체화합니다.(이것도 좋습니다) 근데 대립 구도가 이상합니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의, 지식과 행위의, 재현 체제와 절대적 행위 역량의 대립을 말이죠. 전 여기서 열이 받습니다. 대립을 진단한 건 올바릅니다. 코르네유와 볼테르가 저런 구도 속에서 비난을 한 거라고 진단하는 것도 (실제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동조할 수 있습니다. 근데 저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근본적인 대립 구도로 삼으며 “미학적 혁명”을 주창하려든다면,(p.31)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비난하게 됩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고, 고민을 안 하니까 할 수 있는 헛소리이기 때문이죠.

 

  제가 고민이 없다고 진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런 대립을 전 받아들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진단하냐는 것이죠. 그건 저것의 이름이 꼭 저것일 이유는 없고, 무엇이 우월한 것인지도 열려 있어서이고, 랑시에르도 그걸 모를 리가 없어서입니다. 능동성은 좋은 건가요? 상고기 그리스의 사고에 따른다면 능동적인 건 좋은 게 아닙니다. 노예들이나 능동적인 거기 때문이죠. 로고스는 파토스에 우월한가요? 로고스는 그냥 말 장난, 부상으로 쉬어야만 할 때 시간을 떼우게 해주는 놀이에 불과한 건데 왜 로고스가 우월한가요? 저 대립으로 사람들이 가치를 평가한다는 건 부정할 이유가 없는 올바른 진단일 겁니다. 그런데 저 구도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당 구도가 성립 가능하기나 한 건지(제가 자주 말하지만, 능동-수동, 원인-결과 따위의 비대칭적 관계는 그 자체로 성립한다고 보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무엇이 각각에 속하는지, 어느 쪽이 우월한지 따위가 모두 당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는 표현상으로도 난점을 갖게 만듭니다. 오이디푸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수동성은 숭고하고, 바로 그 점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이라고 말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른 보잘 것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모두를 사로 잡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고, 바로 그 자신의 운명을 그 누구도 겪지 못할 방식으로 겪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웅으로서 영웅답게 자신의 운명을 살아냈습니다. 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은 그런 운명을 겪지 못 합니다. 멍청해서(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아무나 푸는 것이 아닙니다), 비겁하고 탐욕스러워서(정의로운 참주로서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심지어 그 자신이 목표인 정화 의례를 실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못 살기 때문이죠. 애초부터 문제는 구도 자체에 놓여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를 만든 것은 합리성에 대한 다른 이해일 수 있거든요. 랑시에르도 이를 모르지 않고,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이런 긴장들을, 즉, 여러 합리성들 사이에서의 투쟁과 갈등의 역사로서 “학문”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중요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할까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죠. 탁월한 서술이니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미학적 무의식’이라는 제목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미학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나, 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프로이트의 개념이 문학 텍스트나 조형예술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따위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역으로, 나는 정신분석의 개념과 형식의 적실성을 증명하는 데에 있어 텍스트나 작품을 해석하는 일이 어떻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 관건이 되는 것은 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선택한 문학적, 예술적 형상들이 창시자에 관한 정신분석적 이야기와 관련된다는 것 따위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형상들이 무엇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그 증명을 가능케 하는 게 무엇인지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그것들[예술의 형상들]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고, 자명해 보이는 것에도 수수께끼가 있으며, 하찮은 세처럼 보이는 것에도 사고가 충전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형상들은 정신분석이 문화적 형성물을 해석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사유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이 아닌 것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감각될 수 있는 물질성 안에도 사유가 [현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의식적 사고 안에 비자발적인 것이, 무의미한 것 안에 의미가 모종의 방식으로 현존함을 증명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해석자로서 실증주의자인 동료들이 무시했던 ‘하찮은’ 사실들을 ‘예시’로서 그 자신의 증명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예들 자체가 [이미] 무의식의 증거였던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고, 잘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판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아르헨티나판 서문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하는데) 랑시에르는 저처럼 분과 학문의 “고유성”, “자율성”에 대해서 탐탁잖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거죠. 보통은 저런 얘기를 할 때, 그냥 프로이트를 찬양하거나,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고 보일 법할 정도로만―적당히 비판하며 그걸 차용합니다.(현대를 비판함으로써 현대를 아첨하는 탁월한 속물교양인들이 떠오르는군요...) 문학에 정신분석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딱히 올바를 것도 없는데, 하여간 올바르다고 전제하고서 그것의 의의와 한계를 지껄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그런 길을 거부합니다. 무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무관할 게 당연한 건데 정신분석이 문학 작품을 분석한 이유를 케묻는 거죠. 중요한 점은, 그가 어떻게 정신분석이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었는지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죠. 그는 역으로 정신분석의 문학 작품 분석이 정신분석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수도 있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문학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고, 문학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신분석 이론 이전에도 문학은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을 거란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다시 말해, 그는 문학이 정신분석의 “소재”가 아니라 “증거”라고 주장하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랑시에르가 학문분과란 것에 심드렁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긴장 가능성에 대해서 다른 구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중요시하는 겁니다. 그는 학문분과의 나와바리의 근거가 되는 고유성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사태에 근거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근거는 학문분과에 의존적이지 않기에 그것의 경계는 무의미하다고 진단하는 겁니다. 해당 사물/사태를 다루는지의 문제라면, 그걸 잘 다루는지가 중요하지, 그걸 다루는 사람들에게 어떤 호칭을 하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죠. 랑시에르는 “정신분석”이란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심지어 그걸 그냥 “미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p.12) 저걸 정신분석의 고유한 특별함을 믿는, 그것의 지고한 주권을 신봉하는 치들 앞에서 떠들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신봉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바깥”을 가리키면서 말입니다.(이건 참 훌륭한 일입니다!) 이런 얘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게 있습니다. 학문성의 근거가 그것들이 참조하는 대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게 있거든요. 학문성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게 그것입니다.

  “신은 사소한 것에 깃든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든 아비 바르부르크의 말이든 저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저도 저 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고, 거기에는 그냥 틀렸다를 넘어선 문제가 있습니다. 신이 사소한 것에 깃든다고 해서 사소한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게 그것이죠. 사소함 자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이 사소한 것 속에 있다고 해서, 중요한 게 사소한 게 되고 사소한 게 중요한 게 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어떤 중요한 것들이 그것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도 이걸 잘 알고, 그래서 사소함 신봉하는 애들 디스합니다.(이것도 잘한 일이죠)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어떤 것을 사소하다고 여기는지의 차이이고,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어떻게 바꿀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다고요? 랑시에르가 문제가 되는 게 합리성의 차이라는 걸 알았을 거라는 거고, 그렇다면 능동-수동 같은 구도 자체를 문제시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란 걸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니까요.

 

  이쯤되면 궁금해질 법한 게 있습니다. 저걸 잘 아는 사람이 왜 저랬는지가 그것이죠. 제가 짐작하기로, 랑시에르는 뭐라도 답이 되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그래서 저런 걸 답이라고 일단 제시한 겁니다. 합리성의 차이를 말하는 것도, 그리고 그 중 무엇이 더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을 그것의 어려움에 걸맞게 어렵게 탐구하고 고찰하면 답이란 게 모호해집니다. 정말 지금이 문제인지,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가능성들도, 혁명도 말할 수 없게 되죠. 그러니 일단 지른 겁니다. 하여간 문제가 있긴 하지 않냐고, 저런 구도가 지금처럼 너무 공고한 것은 문제시할 법하지 않냐고 물으면서 말이죠. 꽤나 합당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말이죠. 하지만 철학자는 저따위로 말해선 안 됩니다. 저런 건 그 자체로 옳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답하기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남기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됩니다. 알 수 없고,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택이 가치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믿으며 위험을 짊어졌어야했단 얘기입니다. 이데아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처럼 말이죠. 왜 그럴 수가 없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고민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얼간이 같은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실제로 정당화가 안 되는데, 그것이 정당한 것처럼 꾸며내 자신의 철학을 근거 짓는 멍청한 선택을 왜 합니까? 조금만 지나도 뽀록날 위태로움인데 말이죠.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다. 게다가 저런 식으로 나아가면 바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거든요. 문제는 저 구도뿐이라고 착각하고, 멀쩡한 걸 때리고, 칭찬 받을 일을 비난하고, 비난 받을 일을 칭찬하는 폐해가 생깁니다. 능동성에는 죄가 없고, 어떤 능동성이냐가 중요한데, 하여간 능동성을 비난하게 된다는 거고, 이런 비난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런 선택은 하면 안 됩니다. 신통찮은 이익을 위해 삶을 파괴하는 짓을 하는 것만큼 지혜롭지 않은 일도 없으니 말이죠. 이는 계산부터 틀려먹은 일입니다.(비겁해서 용감해져서 문제인 게 아니라 애초부터 계산이 틀려 문제라는...) 그러니 비난할 만하고, 비난해야 마땅한 거죠. 여기서부터는 한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거니까요.

 

이미 좀 길어진 거 같아서 마무리는 생략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하여간 그렇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기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