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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망설이는 사랑>

조지가 군대 가기 직전에 보낸 편지

 


좀 더 고민해서 쓰려고 했는데, 조지가 떠날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아 일단 적어봅니다.
제가 이 책을 추천했을 때, 조지는 이 책이 아이돌 팬덤에 대한 책이라 흥미를 느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이 아이돌 팬덤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을 추천하게 된 이유도 아이돌 팬덤에 대한 연구였기 때문은 아니고 말이죠.
만약 이 책이 아이돌 팬덤에 대한 책이기만 했다면 전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겁니다.
전 아이돌 덕후가 아니고, 아이돌 덕질에 관심도 애정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물론 저 또한 아이돌 음악을 꽤나 즐겨 듣습니다.
아이돌 음악 같은 것은 일절 듣지 않는 재원 씨와 다르게, 전 그래도 대중 가요 또한 즐겨 듣습니다.
비율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절대적으로 많이 듣긴 하지만 말이죠.
애초에 아이돌 음악을 듣는 지는 중요치도 않습니다.
아이돌 음악을 듣는 일과 아이돌 덕질을 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어린 시절부터 오덕들을 동경했고, 그들에 관심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블로그에도 비슷한 얘기를 올린 적이 있죠ㅋㅋ 전 기본적으로 덕후가 아닌 사람이라 깊게 덕질하는 사람을 어려서부터 동경했습니다. 제가 20대 초반에는 서브컬처 연구들을 많이 읽었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지금은 별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고인물들의 영웅담은 이제 저에겐 그다지 흥미로운 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어쩌면 이는 제가 “철학 덕후”로 불릴 수 있는 누군가가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푸코 말마따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을 그런 삶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말이죠.
때문에 그냥 아이돌 팬덤을 분석하는 책이었다면 읽지 않았을 거고, 읽었더라도 추천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잘 알고 있을 사람에게 “아이돌 산업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하는 저의 깨달음을 공유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죠.
애초에 제가 이 책에 주목한 것은 저자가 제목으로 내세운 “망설이는 사랑”이란 테마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저렇게 표현될 수 있을 어떠한 테마에 주목하고 있었고, 제가 주목하는 무엇인가를 팬덤이란 사례에서 발견한 책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제 기대를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부응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제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던 어떤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리고 볼 수 있음에도 보지 못 하고 있던 제가 얼마나 편협하고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서문 제목처럼 이 책은 팬덤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물론 이 책은 아이돌 팬덤을 다루고, 그렇기에 팬덤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팬덤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저자는 팬덤 일반이 아니라, 팬덤에 속하는 어떤 사람들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죠.
저자가 어떠 사람들의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이 책이 개별적인 것만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팬덤에 속한 이들을 다루기 위해 팬덤을 가능케 하고 덕질을 조건 짓는 아이돌 산업의 어떤 일반적인 면 또한 다룹니다.
뿐만 아니라 팬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 맞서기도 하죠.
저자가 지적하듯, 케이팝은 한편으로는 국위선양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헛짓거리를 의미합니다.
케이팝 자체는 대중음악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주류겠지만, 케이팝 팬덤은 비주류 서브컬처에 속하기도 합니다.
케이팝은 자랑스러운 것이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즐기는 이들에 대한 이해도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케이팝에 대해서 싫어하려고 하면 정말이지 쉽게 많은 이유를 갖다 댈 수 있으니 말이죠.
팬덤들이 하는 덕질이란 것은 광신, 문화산업의 노예가 되는 일, 성적 대상화와 성 상품화, 인격 상품화 등에 봉사하는 자, 착취에 근거한 번영에 일조하는 일들로 얘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팬덤”이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팬덤 정치” 또한 이에 대한 연장으로, 합리적이고 건전한 공론장에 반하는, 무지성 지지와 가짜 뉴스들의 원천이 되는 무엇으로 말해지는 것이죠.(몰랐는데 정부에서 팬덤 정치를 저런 식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했더군요ㅋㅋ)
저자는 바로 이런 현실에 반하기 위해 자신이 목격한 팬들의 사랑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한 때 케이팝과 케이팝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서 경멸했지만, 그 또한 입덕하게 되어 그들 중에 하나가 된 저자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고 다른 누군가의 열정과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경멸하는 그토록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후회하며 절실히 이해하고 싶어진 무엇인가를 말이죠.
케이팝과 이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왜 그토록 쉽게 조롱 받고 무시되는지,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그와 같은 조롱과 천대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을 꿋꿋이 이어나갈 수 있는지를 보임으로써.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제가 목격한, 이 책을 통해 마주할 수 있는 “빛나는 무엇인가”입니다.

저자는 아이돌 시스템 일반과 팬덤 일반을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는 1부에서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합니다.
관심경제라는 틀을 통해 아이돌 산업과 팬덤에서 “논란”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것이 작동하는 체제를 분석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정말로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연 그 자체인 제1의 자연, 자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변경해낸 문화인 제2의 자연에 속할 체제가 아닌, 제3의 자연, 체제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삶을 보이려고 합니다.
저자가 팬덤에 대한 편견을 상세하게 지적하는 것은 팬덤을 위한 호교론apology 따위가 아닙니다.
저자가 그려내는 사랑은 팬덤 일반으로, 아이돌 산업 일반으로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죠.
저자가 지적하듯 아이돌 산업은 상품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비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 현실이 아니고, 저 현실에 일조하는 체제 종속적인 “팬”이 아닙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팬들은 저러한 추악한 현실을 모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심지어 그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할지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죠.
심지어 팬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인 자신이, 그래서 그 누구보다 성 상품화에 반대하는 자신이 성 상품화에 쾌락을 느낀다는 역설을, 환경보호론자인 자신이, 그래서 그 누구보다 환경보호를 위해 쓸모없는 상품들을 구매하는 일을 반대하는 자신이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결국 쓰레기가 될 똑같은 앨범들을 수십장을 사고 있다는 역설을 팬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랑으로 즐거움뿐만 아니라 죄책감도 느낍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삶과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 행복한 삶 사이의 긴장을 그 누구보다 절절히 느낍니다.
그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그들이 고민하지 않고서는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지켜낼 수 없으니 말이죠.
많은 팬들이 증언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듯이, 그들은 정말이지 치열하게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도 말이죠.
치열하지 않고서는 그들은 사랑을 이어나가지 못합니다.
그들 또한 자신의 사랑이 근거하고 있는 진실을 모르지 않고, 그들 또한 자신들이 처한 역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위해 자신들의 사랑의 근거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말이죠.
 
사랑하기 위해서 치열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팬들의 사랑이 편견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견과는 달리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을 무지성으로 지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팬들은 페미니즘을 근거로 남돌들의 기강을 잡으며 열심히 그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또 어떤 팬들은 실제로 무지성 지지를 많은 노력을 통해 추구하기도 하죠.
하지만 두 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랑도 있습니다.
사태를 이해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그런 사랑이 말이죠.
여기서 사태를 이해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랑이 등장하는 것은 아이돌 산업이 바탕으로 두고 있는 문화 산업의 조건에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관심경제라는 틀을 통해 “논란”이 팬 활동에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설명합니다.
문화 산업은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토록 중요한 사람들의 관심이 유튜브 등을 매체로, 사이버렉카들이 만드는 그런 논란 영상을 통해서 집중되곤 합니다.
실제의 사건을 기반으로 하든, 아니면 주작글에 기반을 하든, 아니면 사이버렉카가 이슈 몰이를 위해 조작한 영상이든, 아이돌 팬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이돌이 논란의 중심이 되는 현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는 사실과 진실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많은 팬들은 법에 대한 그 자신의 신뢰 정도와 별도로, 법원의 판단을 중요시합니다.
적어도 법원은 오랜 기간에 걸쳐 검토한 후 결과를 내놓고, 이들이 판결에 활용하는 근거는 양 당사자들이 숨기거나 속이기 어려운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판결은 정작 중요한 시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논란은 기껏해야 첫 두 달 정도에 불타오르고 끝나기 때문이죠.
때문에 팬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누가 작성한 것인지 모르는, 실제로 동창인지 모를 고발 글에 대해서 반응해야하고, 이를 둘러싼 팬이 아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들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참고할 게 별로 없습니다.
소속사의 오피셜은 이런 경우에는 그다지 신뢰 받지 못하기 때문이죠. 대중들에게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어떨 때는 사건 자체가 불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정보가 부족한 것뿐만 아니라 애초에 사실 관계가 불분명한 사건일 수도 있죠.(뭐 최근 백강현 군에 대한 학폭 주장 따위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저 논란의 근거가 되는 학폭 사실 자체가 해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백강현 군 부모가 주장하는 모든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이 학폭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많죠 사실)
(저자는 이러한 사태가 어떤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수행되는지도 설명하지만 이는 넘어가겠습니다. 음모론적 서사 구조, 자격론적 도덕주의 따위 등은 해당 현상들을 이해할 때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 지금 저에게는 중요치 않습니다)
팬들은 이러한 모호함 속에서 결단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진 시점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고민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미 잊혀진 사건일지라도, 한번씩 언급하며 조롱하는 것으로 그치는 사건일지라도, 그 사건에 자신들의 사랑이 걸린 이들은 그 사건을 잊지 않고 고민합니다.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고민하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들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따위를 끊임없이 고민하죠.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 또한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정말로 행복을 약속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에 부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 약속일 수밖에 없고, 자신들은 행복할 수 없으니 말이죠.
역설적이지만 그들이 행복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은 행복으로 점철되어 있기 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것들로 점철되어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감내합니다. 놀라운 힘으로 말이죠.
저자는 이런 치열함, 이런 고민들, 이런 노력들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그들의 사랑을 “망설이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린다면 이것이 단순히 몇몇 팬들의 사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은 바로 그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치열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든 역경과 역설은 감내하면서도 이어나가는 놀라운 힘을 가진 무엇일테니 말이죠.

분명 이 책을 지금처럼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소개할 때에는 가려지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 주목하고 싶은 것은 지금 방식으로는 소개되지 않는 이 무엇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제도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를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무엇인가가 정치에 속하는지 여부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는 제가 주목하는 무엇인가가 정치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저자가 이를 잘 지시하고 있더군요.
저자는 저런 “망설이는 사랑”을 정치랑 연결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정치를 제도 정치, 법제화, 사회 개혁 등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를 오직 윤리로, 공론장을 위한 윤리로 말합니다.
저자는 망설이는 사랑이 어떠한 종류의 윤리적 삶을 살게 한다고 말합니다.
망설이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팬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윤리를 대변합니다.
논란이 불타오르고, 관심이 쏠렸을 때 그저 누군가를 심판하고 그를 관심이 쏠릴 수 있는 무대에서 영원히 추방해버리는,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논란을 끝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게 됩니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에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반성하고 자신을 바꿔나가는 것에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퇴출과 추방으로 “정의실현”과 “참교육”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사랑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망설일지언정 조건을 따지지 않았던 그들은 이슈와 논란만을 쫓을 뿐 문제와 인간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문제를 느낍니다.
그들은 판정을 내릴지라도 좀 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적어도 무대에서 쫓아내지 않는 방식으로 판정이 내릴 수 있길 바랍니다.
저자는 이런 그들의 태도에서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을 비판하며 주장한 비폭력주의를 발견합니다.
윤리는 퇴출과 추방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무대 속에서, 보는 이의 시선과 보이는 이의 변화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말이죠.
저자가 망설이는 사랑에서 사랑의 한 보편적인 형식을, 모두에게 강요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존중되어야만 하고 존중될 가치가 있는 한 이상적인 형태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그 사랑이 서로가 서로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가치 있는 삶을 함께 꾸려나가는 조건의 원천이니 말이죠.
바로 이 사랑, 이 관심이 윤리이고 이것들이 지켜질 수 있는 무대가 공론장이며, 이 공론장을 통해서 이루어나가는 드라마가 바로 정치입니다.
저자는 그렇기에 반복해서 공론장이 단순한 정보 교환일 수 없다는 현실을, 그리고 진정으로 합리적인 공론장을 가능케 하는 태도는 진심어린 애정에 근거한 망설임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강조합니다.
팬들이 보여주는 사랑이 단순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모두 꿈꾸는 사회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팬덤에 대한 책이 아니라, “망설이는 사랑”과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에 대한 책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 이것이 제도 정치가 아닌 정치로 말해져야할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저런 사랑을 “그리스 애호” 따위에서, 제3의 감성형식으로서의 “멜랑콜리”를 통해 말해져야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저자는 저와 달리 이를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해냈습니다.
추악할지라도 현실의 아름다움을,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현실 속에 깃든 찬란함을.
노파의 검은 입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겠노라는 보들레르의 야망을 따른다는 착각에 제가 빠져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보들레르가 기스를 위해 했던 무엇인가를 제 방식으로 해내고 싶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p.s. 다음은 이 책 본문 마지막 단락입니다. 아름다운 글이기에 같이 보냅니다.

  서로를 인식적 행위자로 만들어내는 관심

  ‘난 고민을 포기했다’, ‘그냥 좋아할래’라고 말하는 팬들조차 인터뷰 과정 내내 계속해서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냥 지금처럼 앞으로도 레드벨벳을 좋아하며 살겠다고 말하는 하늘 또한 논란에 대해 아티스트가 잘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언급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끝냈다고 말하는 고민 혹은 망설임이란 탈덕할지 말지 사이에서의 망설임이었다. 대신 이들은 “어떻게 남아 있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망설임을 선택했다.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어야 논란이 야기하는 고통을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중‘과 ’여론‘,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논란의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아이돌 아티스트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팬덤을 향하고, 피해자 폭로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인식적 행위자가 되기에 적절한 양과 질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언제든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여론 앞에서 인식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는가? 공인이 마주하는 관심이 항상 캔슬을 예비하는 관심일 때, 그에게 윤리적 고민과 변화는 가능한가? 무조건적인 지지라는 관계는 지지하는 이들과 지지받는 이의 힘을 키워 서로를 인식적 행위자로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과연 이때 만들어지는 인식론이 ‘좋은’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묻어두고 지지하는 행위가 공론장에서 지배적인 모습이 될 때, 여기서 만들어지는 상식은 과연 질문을 허용하는가?
  논란에 모두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논란 앞에서 우리 모두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논란에 연루되는 각자의 ㅂ아식에 따라, 모두에게는 각기 다른 책임과 윤리적 고민이 요청된다. 그리고 이 책임과 고민을 다하고자 할 때 망설임은 필연적이다. 나는 우리에 게 윤리적 고민에 열려 있는, 누구든 그런 고민을 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고 그에 마땅한 변화의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할 수 있는, 모두가 인식적 행위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견딤이다. 우리는 서로를 견디면서 변해간다. 견딤 속에서 생성되는 관계가 우리의 느린 변화를 지탱한다.
  폭력적인 논란이 아티스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가기도 하는 현실은 경우에 따라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논쟁을 피함으로써 아티스트에 대한 일말의 부정적인 의견도 차단하려는 마음을 불어넣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란에 반대하면서도 제대로 된 비평과 토론을 전개할 수 있다. 비평과 토론은 폭력이 아니다. 비평과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고 다른 이야기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이 폭력이다. 재빠른 수배와 무조건적인 보호 양쪽 모두로부터 단절할 때, 비로소 서로를 인식적 행위자로 만들 수 있는 논ㄴ쟁이 가능해진다. 망설임은 바로 이 단절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논란의 다른 배치를 상상하고 싶었다. 결론이 미리 주어진 논란이라는 도덕적 드라마 대신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욕망과 믿음, 감정, 그리고 더 나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논쟁의 장이다. 누가, 왜, 어떤 이유에서 특정한 주장을 사실로 만들고자 노력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단지 논란과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문제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비판적 거리’ 대신 “비판적 근접성”이 필요하다. ‘중립 기어’가 아니라 망설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논란에 휘말린 채 그것을 재조립하고 논란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출현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논란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팬들의 망설임은 거기 얽힌 수많은 행위자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변해 간다. 이자간의 망설임이 다자간의 망설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팬들의 망설임은 자기 최애의 논란을 넘어 사이버렉카와 언론, 팬덤, 대중, 알고리즘, 소셜미디어 플랫폼, 그리고 수배의 기술을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논란 안에서의 윤리적 분투를 통해 논란이 제조되는 장 전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망설임은 정답이 아닌 출발점이다. 숨을 골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