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미셸 페어 - 피투자자의 시간

이하 카톡 복붙


 

음... 일단 이 책 좋긴 한데... 좋게만 평가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뭐 페어의 문제 의식과 페어가 자신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길, 혹은 경로)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페어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얄팍하다는 것이죠.

세상을 만만히 보는 것인지, 아니면 페어가 만만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좀 허접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래도 페어의 문제 의식과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설명을 좀 해보죠.

 

페어는 금융을 정치적 실천의 영역에 포섭하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실천의 영역(토포스, 장소 혹은 영토)을 금융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엥?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할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게 중요합니다.

보통 금융에 대한 비판은 좌파 담론의 꽤나 중요한 영역이고, 맑스 가지고 금융도 비판하고 그럽니다.

월가 점령 시위에서도, 월가에 대한 이데올리기적인 대항-상징은 맑스였죠.

사람들은 이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당연한 게 아니고, 맑스로 금융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게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로 저는 맑스의 자본 비판을 생산 중심으로 보지 않고, 그래서 투쟁 구도도 다르게 이해하지만 하여간), 맑스주의에서 투쟁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임노동제가 근대 자본주의의 법적 조건이고, 노동이 착취와 대항의 매체죠.

그러니 당연히 맑스주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고융주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구도에서는 금융은 논해지지 않고, 논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노동 이외의 투쟁을 반동으로 여겼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놀랍지만, 실제로 그랬어요.

크리스토퍼 래시가 저 문제를 꽤나 자세히 다뤄줍니다.(래시의 전문 분야는 노동 운동의 역사입니다)

노동자들은 생각보다 고융주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가장 적의를 품는 대상은 고융주라기보다는 금융가들이었어요.

래시에 따르면 노동자들 눈에 고용주들은 충분히 “노동자”로 비춰졌어요.

노동자들이 보기에 고용주들은 땀 흘려 일하거든요. 열심히 일하고 있죠 항상.

때문에 고용주들의 수익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진짜 불합리한 수익은 불로소득, 바로 금융가들의 소득이라 생각되었죠.

이런 문제는 게다가 단순히 노동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노동자들이 보기에 고용주들은 충분히 자신들과 비슷했습니다.

고용주들은 산업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거든요.

반면 금융가들은 산업계를 이해하지도 않고, 침략하는 세력으로 여겨졌어요.

금융계는 수익을 위해 산업계를 해하는 횡포를 부린다고 여겨졌거든요.

고용주는 오히려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어요.

세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실제로 만드는 이들이고, 열심히 땀 흘려 돈 버는 이들이죠.

이러한 이들의 산업 기반이 그저 돈만 아는 금융계의 횡포 앞에 노출되어 있고요.(영화 <귀여운 여인>에도 이런 도식이 사용되죠. 리처드 기어스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고 있죠. “멀쩡한 기업”이 약간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기업을 사들여 공중분해 시켜서 돈을 벌거든요. 리처드 기어스는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을 혐오하는 인물로 등장하고요. 이 영화는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도식들을 긍정적으로 전환함으로써 부자와의 결합을 낭만화-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핵심 서사인 “부유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로맨스”가 정당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러니 노동자들은 고용주보다 금융가들을 싫어하곤 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망할 금융가들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했죠.

래시에 따르면 당대 맑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의식에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 건 전부 허위의식에 불과하고 투쟁 노선을 모호하게 하는, 혹은 모호하게 하려는 자본가들의 술수로 여겨졌죠.

그래서 답을 정해두고, 노동자들의 의식을 비판하기만 했습니다.

래시는 저런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지식인들을 비판합니다.

노동자들의 그런 의식이 허위의식이든 아니든 세상의 한 면모를 이루는 “현실”인데, 이를 부정하기만 한다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재미난 것은 현 상황이죠.

뭐 지금도 맑스주의 운동은 노동운동이지만, 언제부턴가 금융에 대한 공격도 좌파 담론의 핵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금융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다뤄야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정교한 입장 정리 없이 그냥 비방만 하고 있다는 거죠.

페어는 이런 상황에서 금융의 영역에서 어떻게 맑스주의적인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주장하는 것이고요.

여기서 전 “맑스주의적인 투쟁”이라고 소개했는데 이게 이유가 있습니다.

재미나게도 저런 당연해보이는 주장에도 반대하는 치들이 있거든요.

아직도 과거의 정통적 맑스주의를 따르며 노동 운동 이외의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지식인들이 있거든요.

그러니 금융의 영역이 정치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죠.

저 영역에서 맑스주의적인 투쟁도 수행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나름 페어는 이런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이게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단점도 됩니다.

 

저런 입장 표명이 단점이라는 저의 진단은 단순한 게 아닙니다.

당파적이라 문제라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비판이 아니거든요.(당파적이지 않고서는 좋은 연구도, 좋은 철학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페어가 좌파 현실 정치 담론의 규범에 사태를 맞춰서 생겨납니다.

얼마나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페어는 몇몇 정치 주제에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예컨대 복지 같은 거에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실이 왜곡되고, 제대로 된 평가가 사라지고, 헛소리가 난무하게 되죠.

복지가 왜 정치의 중심 문제인지, 복지를 수호하고 확대하는 게 왜 좌파의 입장인지에 대해 아무런 성찰 없이 걍 지르니까 븅신 같은 얘기가 난무하게 된다는 얘깁니다.(이런 식의 조악한 정치적 입장 표명에 대해서는 래시가 참 잘 꼬집어주죠. 래시는 점잖게, 정말 절절한 자기비판으로 이를 보여주고요... 래시를 우파로 몰아가는 좌파들은 솔직히 좌파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래시는 성골 좌파 지식인 그 자체인데 말이죠...)

구체적으로 보여주자면 이렇습니다.

페어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복지가 축소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게 엄청난 문제라는 식으로 서술하죠.

하지만 페어의 역사서술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페어의 논리와도 충돌합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정부는 세수를 줄였죠. 작은 정부를 표방했으니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정부는 지출을 확대했습니다. 세금이 아니라 부채로 말이죠.

페어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정부가 자율성을 잃고 금융세력의 평가 앞에 쩔쩔매게 된 거 거든요.

만약 페어의 저런 진단이 사실이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날 수가 없었죠.

정부가 재정균형을 잘 맞추었다면 부채란 목줄은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페어 수준은 딱 이 정도에요.

뇌피셜인지, 아니면 본인이 몸담고 있는 정치 세력의 주요 입장인지(보통 정치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입장들이죠. “길고양이 문제”가 왜 정치적 논쟁의 대상처럼 여겨지는지 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답도 명확하고 그런 데에 소중한 정치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만큼 심각한 낭비가 없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답을 정해두니 생기는 문제죠.

페어가 진심으로 복지를 그 자체로 선으로 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의 주장들과 복지에 대한 입장을 일관적으로 정교화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렇게 진단하는 것은 저란 사람의 복지에 대한 정치적 입장 때문이 아닙니다.

해당 문제가 논리적인 문제를 야기해서 지적하는 겁니다.

페어가 진단하듯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부채를 많이 짊어지고 있고 지속적으로 부채를 늘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꾸 복지랑 엮으면 사태 인식이 불가능해져요.

이 문제는 복지보다 임금이랑 더 밀접하게 연관이 있기 때문이죠.

걍 그래프로 보면 진짜 명확하게 나옵니다.

임금 상승이 정체되기 시작하면, 임금 상승으로 충당되었을 지출이 부채로 지출되었거든요.

임금 상승 대신 부채로 생활수준이 유지되었다는 얘깁니다.

이런 걸 복지 문제로 보면 사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는 거죠.

 

게다가 저런 식의 고집은 전략적 선택에도 큰 제약을 만듭니다.

신자유주의 정권에서 복지를 축소시켰다는 본인들만의 환상 세계에 갇혀 있으면 제대로 된 전략이 수립되지 않아요.

만약 신자유주의 정부가 복지 지출을 확대시켰다면 할 말이 없어지거든요.

신자유주의랑 복지 확대는 모순이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에요.

복지 확대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시키면 아주 쉬운 적도 상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복지 확대를 주창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지거든요.

 

뭐 이런 문제는 페어의 이론적인 문제랑은 거리가 멉니다.

페어의 이론적인 전략을 페어 본인이 충실히 활용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거든요.

페어는 “가치 평가”를 중요한 문제 분석 참조틀로 제시합니다.

그니까 어떤 게 가치 있게 여겨지는지, 그 기준을 누가 정하고, 그러한 평가가 얼마나 전횡적인지에 주목해야한다는 거죠.

결국 금융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 바로 이것이니까요.

금융의 권력은 평가에서 비롯됩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생존을 위해서라도 부채를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평가 당해야만 합니다.

부채를 늘리든 줄이든 유지하든 적어도 현 상황이 파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용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신용도가 추락하고 주가가 추락하면 당장 문제가 생깁니다.

막대한 부채를 당장 청산할 수도 없고, 그 정도의 부채를 당장 청산하면 바로 기업의 중요한 자원이 바닥나고 경쟁이 불가능해져 버리거든요.(유동성 확보, 현금 보유는 기업이 경쟁하기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몇 조 단위의 공장을 지을 수 있기 위해선, 치킨 게임에서 버티기 위해선 자금 확보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라도 꽤나 많은 자본을 축적해두어야 하거든요. 심지어 이 양이 경쟁력을 결정하죠. 삼성이 TSMC나 애플과 게임이 안 되는 영역 중에 하나가 개발 투자 비용이죠. 삼성이 저 기업들만큼 투자를 못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는 삼성이 바보여서 돈을 아껴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만큼 돈을 못 끌어와서 그런 겁니다. 삼성도 나름 돈이 많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넘사벽이 있는 거죠)

그러니 지속적으로 신용도 평가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합니다.

바로 이 현실이 “부채 국가”의 “신경체제”를 이루는 거죠.

복지 문제를 이 현실에 비추어 재분석하면 문제가 다르게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지를 축소하는지 확대하는지가 아니에요.

신자유주의 복지 정책의 핵심은 평가입니다.

복지 대상에게 지속적으로 평가를 하며 이에 반응하게 해두었습니다.

평가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평가에 부합하지 않으면 복지가 끊겨 생존이 어려워지고요.

페어 이론을 통해 신자유주의 복지 정책에서 주목해야할 면모는 바로 이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문제라고 제가 진단하는 거죠.

 

사실 그래도 접근법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페어가 상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지나가며 언급하는 것들 중에 중요한 것들이 많죠.

평가주기의 가속 문제 따위가 좋은 예죠.

예전에 이런 얘기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느 부족에 남성의 영역과 여성의 영역이 구별되고, 권력이 어느 정도 균형에 맞았는데, 외부와의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남성의 영역에서의 생산은 주기가 짧아지고, 수익 발생이 가속되면서 권력 비대칭이 생겨났다고요.

실제로 빈도는 양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주식이 무서운 이유, 그리고 비트 코인 따위의 것들이 더 무서운 이유는 실시간성이죠.

주식 수치가 실시간으로 변동하면서 “잠재적인 이익”, “잠재적인 손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킵니다.

그러니 거기에 모든 주의가 집중되는 거죠.

주식은 그래도 시작과 끝이 있고, 주말이 있는데, 비트 코인은 그런 것도 없었죠.

생산물이 있는지와 무관하게 이런 점에서 비트 코인이 도박과 더욱 비슷하죠.

“여기에 걸었더라면...”이라는 환상 속에서 둘 모두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문제는 좀 더 상세히 다뤄져야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 책의 출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네요.

페어는 “그들”로부터 “우리”로 가치평가의 주도권을 뺏어 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관건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일 겁니다.

페어는 몇몇 예를 보여줍니다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개병신 그 자체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 허접하다는 걸 페어는 알면서도 얼버무리죠.

유니콘 기업은 투자 가치가 있죠.

성장이 폭발하면 주가가 뛸 테니까요.

그런데 협동조합은 투자가치가 없습니다.

투자자보다 조합원이 더 이익을 볼 테니 말이죠.(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협동조합과 일반 기업이 구별 안 되니 페어의 얘기가 말이 안 되는 건 매한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본을 끌어오는지에 대해서 페어는 자꾸 말을 돌립니다.

분명히 자기가 답하겠다고 선언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되도 않는 헛소리만 늘어놓더군요.

그래서 그런 돈을 어떻게 끌어 모아서 배민 대신 우버 대신 협동조합으로 해당 영역을 장악하는지에 대해 침묵합니다.

수준이 딱 보이죠.

그런데 페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런 해결책이 궁하다는 게 아닙니다.

애초부터 문제 진단과 해결책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문제에요.

무페랑 라클라우에 따라 포퓰리즘을 표방해야만 한다고는 얘기하죠.

뭐 이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포퓰리즘이냐지 포퓰리즘이냐가 아닙니다.

대중정당은 당연히 대중적이어야 하죠.

이런 대중성은 대중들의 공통 정념, 유령들로부터 정치적 기획을 수립할 수 있을 때 확보 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대중들의 분노를 잘 포착하며 정치적 기획을 꾸준히 생산해내야 하죠.

이건 당연하거고 당연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정치 운동을 기획할 경우 “정치적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 거란 페어의 서문에도 완전 동의할 수 있고요.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중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떻게 잘 대중적인 정치 운동을 수행하냐입니다.

그런데 페어는 여기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포퓰리즘이 문제시되는 것은 그게 대중적이라서가 아니라 무책임한 거짓말로 선동을 해서입니다.

그런 거짓말에 기초한 정책들이 열심히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파괴해서고요.

심지어는 그런 선동이 선한 거짓말로 포장되기까지 하며 책임회피의 수단이 되고요.(갑자기 광우병 시위 현장에 참여한 그 누구도 광우병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주권의 문제로 분노한 것이라는 되도 않는 거짓말/변명을 하며 선동 같은 건 없었다는 헛소리를 내뱉던 쓰레기가 생각나는군요ㅋㅋ)

저 따위 병신짓을 안 하려면 “사회학적” 분석 같은 게 필요합니다.

페어는 알면서도 자꾸 회피하는데 금융의 평가를 역할용해서 금융 논리를 뒤집는 건 지속가능한 정치적 수행일 수 없습니다.

그럼 금융의 메리트가 떨어지고 이익에 대한 기대가 떨어지고 자금은 빠져나가겠죠.

그러면 일개 기업 범위에서든, 일국 범위에서든, 세계 범위에서든 자금 융통이 어려워지고 경기가 침체될 겁니다.

이런 귀결은 좋은 게 아니에요.

설혹 이런 귀결을 필수적인 이행 과정으로서 받아들일지라도, 적어도 이에 대한 출구 전략은 명확해야하죠.

근데 페어는 그런 게 없어요.

페어의 또 다른 거짓말이 떠오르네요.

폴 볼커가 금리를 인상했죠.

페어는 이때 금융권이 만세를 외쳤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투자자들은 쪽박을 찼고, 볼커에게 칼찌(미국이니 칼이 아니라 총이겠지만) 위협을 가했죠.

금융계라도 하나가 아닙니다. 은행과 투자기관은 다르고, 둘은 심지어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가질 때가 있어요.

이런 현실을 도외시하고, 평가를 단순화하니 말도 안 되는 서술이 나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금융계의 권력이 증대되었을지라도, 볼커의 해당 실천의 목적과 단기적인 효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걸 부정하는 거죠.

암튼 페어의 현실은 좀 얄팍하고, 본인의 이론을 통해 실천 비전을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얘기입니다.

페어가 내놓는 답안들은 애초부터 페어의 이론에 충실하지 않고 말이죠.

 

페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답을 다른 데서 찾아야합니다.

가치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가치 평가의 전환이 가능한지를 연구해야만 합니다.(이걸 하면 아까 제가 더 다룰 필요가 있다고 한 평가 주기의 문제, 시간성 문제가 중요해지죠)

일단 이게 되고나서야 “가치 평가 전환”을 정치적 실천의 목표로 삼을 수 있거든요.

여기서부터는 다른 책으로 얘기해야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