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루세 <바로크 문학>

예전부터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막상 읽으니 당혹스러웠다.
레몽의 <프랑스 현대시사>를 읽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떠오르면서.
루세가 감사의 말을 레몽에게 제일 먼저 바치니 이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둘 모두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 문학서인지—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연구서”, 혹은 “학술서”일 수 있는지—모르겠다.
<프랑스 현대시사>, 그리고 <바로크 문학>을 통해 “배운” 사람들은 도대체 이 책들에서 어떤 것을 “배운” 것이었을까?
물론 이 책들로부터 배울 게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책들은 길고, 많은 것들이 적혀 있다.
나에게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 책들에 기록된 구절들을 어떻게 분절해서 읽었는지다.
레몽과 루세에게 배운 이들이 이 책들에 적혀 있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 분절해서 “활용”했는지고.
나에게 이 책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장황하고, 그래서 그렇다는 식의 논평, 혹은 무작위적으로 구절들을 인용해 둔 연구 노트처럼 보인다.
물론 이 연구 노트를 가지고서 그들의 연구 비전을 “연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연구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비방이 아니다.
당대 프랑스에서 문학 연구란 것이 어떤 것이었고, 문학 연구를 위해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문학 연구의 결과물로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기 때문.
그리고 이런 의문은 현대의 문학계에도—비단 문학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술계에도—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 연구란 것은 어떤 것이며, 연구 성과를 통해 배우려는 것은 무엇일 수 있는가?

루세가 연구해 내고 싶었던 성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루세에게 귀속시키는, “바로크 문학”이란 범주를 탄생시키고, 이에 속하는 문학 작품들을 선별하는 일이었을까?
이는 반쯤만 맞는 얘기일 것이다.
루세는 바로크 문학이란 것을 엄격한 경계로, 다른 문학과 구별되거나 대립되는 범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루세가 보여주는 “바로크 문학”이란 것은 기존의 “17세기 문학”, “고전주의 문학”과 다르지 않다.
다를 수 있다면, 루세가 보여주는 고전주의 문학이 “다른” 고전주의 문학이라는 점이다.
의고주의와 시대착오로 여겨지는 고전주의 문학, 프랑스 땅에서 말해지는 프랑스와 무관한 이야기들로 점철된 고전주의 문학, 권위 있는 작품들로부터 권위를 빌려와 군림하는 고전주의 문학, 규칙을 숭상하는 고전주의 문학이 아니라, 변신과 반시대성으로서의 고전주의 문학, 프랑스와 무관한 이야기들로 꾸려지는 프랑스 땅에서 벌어지는 가면극으로서의 고전주의 문학, 권위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로서 즐겨지는 고전주의 문학, 규칙이 아니라 이탈과 도피로서의 고전주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과 괴리된 것으로 여겨진 “고전들”이 어떻게 삶의 일부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꿈꿀 수밖에 없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카디아, 아카디아에서도 꿈꿔질 ‘아카디아’로서의 아카디아로서의 문학을.

어쩌면 루세는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볼테르가 선언한 프랑스 문학의 역사를 붕괴시키려는 것이니까.
프랑스어로만 말해질 프랑스 문학사를 넘어서는 것이니까.
루세가 ‘바로크’로 말하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루세 말마따나 ‘바로크’는 프랑스적인 언어가 아니라 프랑스 바깥의 “운동”이었으니까.(여기서 ‘운동’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이 문제적이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내가 ‘운동’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에게 ‘운동’은 독일어 Bewegung에 해당될 무엇이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노력으로서의 운동, 활력으로서의 운동을 난 말하고 싶었다)
고전주의의 “암흑”을 밝히기 위해선 멀리서 달려오는 빛이 필요했기에.
하지만 루세가 바깥을 돌보는 것은 아니다.
루세는 바로크라는 이국적인 표현을 가지고서 오직 프랑스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으니까.
루세에게 바깥이 필요했던 것은 안을 더욱 복잡하게 돌보기 위해서였다.
고립된 프랑스가 아니라 유럽 속 프랑스로 말해질 것은, 유럽으로서의 프랑스였다.
루세가 그려내는 바로크 문학은 변신과 도피다.
이는 물론 프랑스 안에서 벌어지는 프랑스 바깥을 향한 변신과 도피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그것은 프랑스 바깥을 향한 변신과 도피가 아니라, 프랑스 안에서의 변신과 도피를 위해 제안된 것이었다.
프랑스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바깥들을 그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때문에 루세가 17세기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자의적일 수 있다.
루세에게 있어 삶으로서의 문학은 운동이기에, 모든 움직이는 삶은 문학일 수 있다.
17세기의 문학이 “움직이는 삶으로서의 문학”인 것은, 그것이 문학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루세가 17세기를 선택한 것은 필연에 의한 운명이었다.
프랑스에 있어서 문학은 17세기의 것, 고전주의 문학, 라신, 몰리에르, 코르네유였으니까.
17세기를 말해야만 문학적일 수 있다.
고정적인 것으로부터 이탈해야 운동일 수 있으니까.
반시대적이어야 급진적일 수 있으니까.
루세의 <바로크 문학> 또한 그렇기에 변신과 이탈의 운동, 다시 말해 “바로크 문학”이었던 것이다.

루세는 말과 행위를 일치시킨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꼭 이렇게 말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렇게 써야만 했던 것일까?
모든 문학이 움직이는 삶이라는 진실을 반드시 이렇게 고백해야만 했던 것일까?
17세기 문학, 고전주의 문학이 다른 것이었음을 반드시 이렇게 주장해야만 했던 것일까?
움직이는 삶으로서의 문학을 반드시 이렇게 표현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럴 수밖에!”라는 대답을 우리는 들을 수 없다.
루세의 “기록” 또한 그가 말하는 분수와 거품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변신과 도피, 이탈, 가면극은 답일 수 없다.
반시대적이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하고,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심정을 요한다.
어쩌면 학문이란 것이 오늘날 부유하는 까닭이 운명일 것만 같다.
학문인 한, 결국 레몽과 루세와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일 수도.
오늘날의 “연구서”와 “학술서”가 다르다는 것은 순전한 착각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