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이 책도 재밌네요.
학술서 느낌의 책은 아닙니다.
매우 가벼운 책이고, 그렇게 심도 깊은 책도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꽤나 인상적인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자의 감각이 훌륭하다고 해야하나?
그런 게 있어요.
추천하기 위해 사용하고 싶은 미끼도 있습니다.
6장 <수리의 미학>의 4절 제목이 “유지 보수와 애착”이란 사실이 그것이죠.(물론 논문에 도움이 될 것은 전혀 없을 겁니다ㅋㅋ)
이 사람의 훌륭한 감각은 역사적 감각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저자는 역사학자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하고(전 이 양반이 역사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왜 역사학자로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공도 역사학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저런 자기 이해에 걸맞게 역사적 감각이 훌륭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생태적 규범”은 나치즘과 기능적으로 동등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이 나치 법학과 기능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말이죠.
생태학을 연구하다보면 나치즘과의 연관성이 계속해서 발견되는데(역자의 말을 보면 이진경 선생이 이런 사실을 깨닫고 당혹감을 느꼈음을 고백하는 일화가 언급됩니다), 꼭 역사학적으로 검토하지 않아도 동형성이 명백해서 역사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치는 생명과 노동의 정치를 주창했고, 실제로 생명-노동에 기초한 유기적 총체로서 정치체를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획에 자연스럽게 인종청소가 들어간 거고요.
사람들은 생태적 정치관에서 저런 오류를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쉽지 않습니다.
내적 연속성이 명백해서 동형적인 유사한 오류의 발생을 막을 수가 없거든요.
저자는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박사논문 <나치 독일의 유기농업: ‘자연과의 공생’은 왜 ‘민족 말살’에 가담했는가>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를 다루는 저작이었거든요.
이후에도 저자는 <나치의 주방: ‘먹는 일’의 환경사>를 통해 먹는 문제를 가지고 나치즘을 연구하였습니다.
나치즘이 일상생활, 특히 먹고 사는 일(먹고, 싸고, 노는 일)에 어떻게 맞닿아 있었고, 그것이 대중과 지식인에게 어떤 “설득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연구한 것이죠.
그러니 저자는 어설픈 생태적 규범 주창이 나치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식의 사고가 사태의 급박함을 생각할 때 일시적으로 유용할 수는 있어도 너무나도 위험한 사고라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우 명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고요.
<분해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고 그런 책일 수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에서는 저런 식의 주장이 유행했고, 이제는 그런 흰소리에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거든요.
저자는 본인의 주장이 그런 답 없는 흰소리도 아니고, 생태적 사고를 강조함에도, 생태적 규범의 덫에 걸려 나치즘으로 미끄러지는 사고도 아님을 강조합니다.
정확히는 그런 것이 아닐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역시나 저자는 기본적으로 일본적 에세이를 가지고 문제를 파훼하려고 합니다.
서양의 고전이랑 역사적으로 듣보잡인 특정 일본인을 엮어서 유의미해보이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그렇고 그런 일본 에세이로 말이죠.
물론 이런 건 노답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답 에세이로 전락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걸 소개하고, 이걸로 얘기를 확장하려 합니다.
저자는 생태적 사고가 가진 저런 “위험성”의 원천을 유비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이해합니다.
실제로 생태학사적으로도 저런 나치즘적 생태학과의 투쟁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고, 그런 투쟁에서 핵심 전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개념”에서 비롯되는 유추적 효과였거든요.
생태질서는 생태학을 통해서만 파악됩니다.
생태학이 제공해주는 구성 개념들을 통해서만 생태질서를 온전한 전체로 종합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생태질서를 포착 가능하게 하는 개념들의 유추 효과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죠.
때문에 저런 개념들이 야기할 수 있는 유추 효과를 잘 통제하고, 개념들에 의해 야기되는 의도치 않은 귀결이나, 개념들에 의해 발생하는 사고의 제약이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죠.
저자는 이런 투쟁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다른” 생태학을 위해 제시된 개념이었던 “분해decomposition” 및 “분해자decomposer”의 의미심장함을 부활시키려고 합니다.
별거 아닌 개념 같아 보이지만, 저게 단순한 “청소”가 아니란 것이죠.
해당 개념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구성적 개념이었습니다.(“구성적”인 “탈구성성”이군요ㅋㅋ)
오늘날에나 당대에나 학문적으로는 매우 애매하고, 그래서 도대체 저 개념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생산자-소비자 도식에 분해자가 끼어들 이유가 없어보이기 때문이죠.
“분해자”라고 구별되는 것들은 소비자랑 구별되기 어려워보입니다.
사실 소비자가 분해자이기도 하고, 분해자도 소비자이기도 하거든요.
까치는 겨울에는 시체 청소에 집중하고, 봄에는 과실에 집중합니다. 여름에만 사냥에 집중하죠.
때문에 “사냥”으로 표상될 “소비”의 경계가 모호하고, 분해자는 어정쩡한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냥 생산-소비로 환원하면 될 거 같거든요.
저자는 바로 저 이상함을 가지고 역으로 환원하려고 합니다.
생산-소비 도식 대신 분해로 환원하는 것이죠.
저자의 이런 개념 제시는 사실 개념 제시가 아닙니다.
저자는 철학자도 아니고, 본인이 철학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해당 표현을 매개로 볼 수 있는 이미지에 집중합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게 보이는데?”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개념들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부분을 통해 전체를 표상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가 결정되죠.
저자는 다른 식으로 표상할 때,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 보임에도 보고 있지 않던 것들이,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되는 새로움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저자가 마지막에 “미학”을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죠.
저자는 지각되는 것들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미학”을 생각하고 있고, “미학”을 통해 “보는 눈”을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당연히도 이는 “눈”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철학이나 제도 변혁은 자신이 잘 모르지만, 그것들을 시작할 수 있을 “미학”은 본인이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죠.
바로 이게 이 책이 가진 미덕입니다.
분명히 보임에도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은 원래부터 보이는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저자의 활동을 지탱하는 개념은 “분해”입니다.
저자는 이를 단순히 파괴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걸로 보이려고 합니다.
특히 6장 <수리의 미학>에서는 일본어 단어 가지고서 엄청 길게 그런 거 아니라고 설명하죠.
근데 멀리 갈 것 없이 저런 개념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데리다의 탈구축이 바로 그것이죠.
데리다도 저걸 파괴로 말한 게 아니었고, 후지하라가 열심히 보이려고 하는 작업에 해당될 작업들을 가리키고 옹호하기 위해 저런 개념을 내놓은 거였죠.
물론 기대와 다른 효과를 산출했지만요.
하지만 둘이 다르다는 것도 전 좀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놓는 맥락이 다르니까요.
데리다는 텍스트라는 맥락에서 내놓은 것이고, 이게 “생태적 관점”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을지 데리다 본인도 생각한 적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 해당 단어를 통해 연상될 다른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런 차이로부터 맥락적 적절성 또한 달라질 것이고요.
이러한 차이들의 발생 가능성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다른 책들을 경유해서 말이죠.
최근 번역된 당 스페르베르는 <문화 설명하기>에서 새로운 방식의 개념관을 소개합니다.
의미 전달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의미 전달은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의 유의미성은 이런 오류 가능성에 근거할 것이고요.
당 스페르베르는 이런 조건에 대해서 다른 접근을 취할 것을 요청합니다.
같은 것을 전제하고, 그것의 전달로 볼 게 아니라, 모든 수용을 일종의 변용으로 간주하고, 어떤 경우 유사하게 수용되고, 어떤 경우 차이가 인식되는 방식으로 수용되는지를 탐구하자는 것이죠.
당 스페르베르는 “전염 현상”을 유비로 이를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뻘소리지만, 당 스페르베르에 대한 제 느낌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넘사벽이라고 느껴졌는데,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래저래 저도 알게 모르게 공부를 많이 한 듯합니다...)
당 스페르베르의 제안에 흥미를 느껴 역학疫學에 대한 책을 찾았는데, 여기서 좀 대어를 건졌습니다.
낸시 크리거의 <역학 이론과 맥락>이 그것입니다.
역학은 ‘epidemiology’의 번역어입니다.
재미나게도 epidemiology는 감염병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인민demos에 대한epi 학문logos을 뜻한다고 하더군요.
이 용어가 등장한 맥락, 그리고 이런 학문 분야가 제안된 맥락은 제가 ‘범-사회담론’이라고 부르는 맥락과 동일합니다.
epidemiology 정치산술의 확장된 버전이었던 것이죠.
epidemiology가 감염병을 다루게 된 것은, 감염병이 인민들의 복지에 직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epidemiology는 감염병에 국한되지 않았고, “사회”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현상 일반에 대해서 탐구하는 분야로 여겨졌던 것이죠.
크리거 책에서 언급되듯, 앵겔스 말마따나 노동자의 죽음이 “사회적 살인”일 수 있기 위해서는, 특정 현상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원인을 넘어서야합니다.(크리거의 책은 브로드벤트의 <역학의 철학>을 빌리려고 하다가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브로드벤트의 핵심 비전은 역학을 매개로 새로운 인과 개념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연일 수 없죠)
일상적인 원인 개념을 넘어선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원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역학자들은 당연히도 인과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보조 개념들을 갖고 있죠.
낸시 크리거는 그런 개념들이 등장한 맥락과 해당 개념을 통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이 무엇인지를 잘 소개해줍니다.
하지만 소개는 낸시 크리거의 목적이 아닙니다.
크리거는 저런 개념들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목적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상관관계 분석만으로는 역학이란 학문은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론이 없다면 특정한 테크닉들에 학문성을 부여할 근거도 없습니다.
이론이 경험과 사실의 중요성을 부정한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크리거는 이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이며 오히려 경험과 사실의 중요성은 이론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이게 1장에 담겨 있는데... 안 봐도 저 업계가 어케 돌아가는지 보이더군요. 크리거는 정말 상식적인 주장을 상식일 수 있게 상식에 맞게 요약정리해줍니다)
문제는 “목적”입니다.
이 책의 원제인 Epidemiology and the People’s Health: Theory and Context에 걸맞게 크리거는 역학의 목적은 인민의 건강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 역학이 탄생한 근거는 인민의 건강이었으며, 이론적으로도 인민의 건강을 매개로만 학문적 의의를 갖출 수 있음을 학문사를 통해서 정당화합니다.(물론 이게 얼마나 잘 수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좀 어렵습니다. 크리거는 저 업계에서는 꽤나 전설인 사람 같고, 크리거의 성취에 반대할 이유가 전 하나도 없지만, 그와 별개로 철학적-역사학적 정교함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학계에서는 아쉬울 게 없을 겁니다)
당 스페르베르의 유비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핵심은 간단합니다.
당 스페르베르가 제안한 것처럼 역학을 중비 유비로 삼아 “의미 현상”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민의 건강”에 해당될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이는 당 스페르베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 스페르베르는 “문화적 영향”이란 것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과 개념이 필요했고,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원천을 역학에서 발견해서 이를 유비로 삼은 것이거든요.
그러니 당 스페르베르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다만 저걸 차용할 때 “인민의 건강”에 해당될 “목적”으로 삼을 게 무엇일 수 있는지를 물어보자는 것이고, 그게 무엇인지에 따라 맥락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죠.(여기서 “맥락”은 좀 다른 의미입니다. 당 스페르베르는 “설명”하는 맥락의 차이랑 다른 맥락 차이를 언급하는 겁니다)
전 이 차이가 바로 “미학”을 통해 말해져야할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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