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제임스 재스퍼, <저항은 예술이다>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이 책은 주된 논지를 요약할 수 없는 책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양반은 대가 그 자체이고, 넘사벽의 연구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요약하면 중요한 것을 너무 많이 잃게 됩니다.

두꺼운 책이지만, 필요 없는 얘기가 없어요. 매우 밀도 높게 정보값이 높은 정보들을 전달해주고 있어서 직접 읽어야만 효과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이 양반이 언급하는 연구 프레임 중에 “정치적 기회구조”란 게 있습니다.

정치적 실천은 당연히도 특정한 기회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고, 이런 기회들을 제공하는 환경 및 제도를 구체화하는 작업에서 제시한 개념이 “정치적 기회구조”입니다.

이런 개념을 소개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죠.

게다가 제임스 재스퍼는 이 개념을 처음 제안한 학자의 연구와 그 연구의 바탕이 된 사례, 이러한 연구를 가능케 한 연구 조류,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연구들과 그것들이 다루는 사례들을 소개해줍니다.

주석이 꼼꼼한데, 그냥 유명한 단행본들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유명한 단행본과 구체적인 세부 연구를 수행한 논문들을 모두 인용해줍니다.

이런 정보들을 써먹기 위해서는 직접 봐야합니다.

게다가 재스퍼는 저런 정보들을 그냥 나열하고 있지 않습니다.

연구 패러다임들을 구별하고, 그 속에서 개별적인 접근들을 의미 있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부 모르는 연구들이었고, 제 전공도 아니었지만, 의미 있게 배치하여 제시하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고요.

 

암튼 이 양반의 책은 요약정리가 안 된다...로 끝내려다가, 이 저자가 어떤 대단한 작업을 수행한 것인지를 좀 일반론적으로 말하고 싶어져서 그걸 써봅니다.

 

앞서 언급한 저런 세밀한 연구사 정리를 재스퍼가 수행해주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당연히도 이 책을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인 것이죠.

제가 “저항의 인프라”라는 개념에 엄청 의미부여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걸 배울 곳이 없는 게 문제죠.

그토록 중요한 일인데, 그냥 감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고 싶을 수밖에 없고, 참고해야만 하죠.

문제는 그걸 어디서 찾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전 그런 게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낸시 님탄에게서 그런 문제를 느꼈습니다.

님탄은 경제학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자신이 마을 경제를 발전시킬 때 제도 경제학은 도움이 안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경제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님탄은 말하죠.

문제는 경제학 없이 어떻게 객관적인 계획을 수행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님탄이 성공했다고 해서, 제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경제학적인 앎을 필요에 맞춰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지, 무턱대고 거부할 이유는 없고요.

전 님탄 본인의 교훈담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원했습니다.

그게 “필요”하다고 느꼈고요.

재스퍼는 이런 필요를 충족시켜줍니다.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이죠.

활용할 가치가 있는 연구들을 총람하고, 써먹을 수 있게 조직화해줍니다.

책 제목에 걸맞게 말이죠.

“The Art of Moral Protest”

“The Art”여도 그 누구도 불평할 수 없을 수준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이보다 좋은 전략론집은 없을 거거든요.

“가르칠 수 있는 것”,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재스퍼는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책이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The Art”는 기술이 아닙니다. 예술이죠.

이 책은 규칙을 부정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하나의 규칙만을 내세우죠.

그 어떤 규칙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규칙만이 진정한 규칙임을 보이는 책입니다.

<손자병법>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런 책은 문제가 있습니다.

적용에서 자의가 너무 많이 개입되거든요.

물론 기본 분석틀은 있죠.

손자는 아무렇게나 규칙을 부정하지 않았고, 굉장히 많은 규칙을 제시했죠.

형세를 분석하는 방법[計]과, 형세를 이용하는 방법[略]을 가르쳤으니까요.

손자는 통찰력 있는 사람이고, 당연히고 계와 략을 잘 활용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통찰력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이고, 통찰력 있는 사람과 통찰력 호소인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작전 계획 회의는 언제나 개싸움이 되는 것이고요.

이것 때문에 군사학의 기하학이 탄생한 겁니다.

클라우제비츠는 기하학을 은유로 썼지만, 조미니는 군사학을 기하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선언하고 그런 작업을 했죠.

심프슨은 둘 사이에서, 매우 기하학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군사학을 포괄할 수 있는 군사학을 성취해냈고요.(<기동전>)

근데 이런 작업은 당연히도 한계적입니다.

그러니 통찰력 있는 군사 전문가 리델하트는 심프슨 책에 심드렁해하며 저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고요.

근데 리델하트 책을 보면 심프슨 책의 위대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리델하트 책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리델하트 같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런 책 본 장군들이 개병신 같은 작전을 짜냈을 때 반박도 불가능하고요.

심프슨의 <기동전>은 군사학의 대상을 한정하고, 이에 대한 수리적인 한계를 제시한 겁니다.

그러니 개싸움이 되어도, 적어도 말이 되는 것들 안에서 싸울 수 있게 되는 거죠.

이게 심프슨의 의도였을 거고요.

 

이 얘기를 왜하냐?

재스퍼가 <손자병법>과 <기동전>을 종합하듯이 사회과학 연구서를 내놓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재스퍼는 이론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론의 장점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죠.

이 사람은 무지성 일반 이론을 극혐합니다.

그런데 일반 이론 거부한다고 이론 비판만 하는 “비생산적 연구들”도 혐오하죠.

이론이 문제가 된 것은 영역 차이 때문입니다.

특정 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프레임은 해당 이론을 성공적이게 한 사례에서 빛나는 거죠.

당연히 다른 종류의 사례에서 효과적이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일반화”를 하다보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재미나게도 이런 일반화를 추동시킨 개념이 오히려 모호해진다는 거죠.

전 재스퍼의 이런 진단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재스퍼는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이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개념 자체가 모호해진다고 진단합니다.

사례와 이탈하면서 해당 개념으로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사태가 사라지고, 이것저것을 포괄하는 아무 의미 없는 순환논법이 된다는 것이죠.

재스퍼는 이런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을 다수적으로 운용해야한다고 지적합니다.

즉, 하나의 개념으로 이것저것을 포괄할 게 아니라, 그리고 이거 아니면 저거 식으로 선택을 강요할 게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현상을 동시분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졸라게 장점이 있죠.

한 차원만 보면 이론은 미결정적입니다.

자원 부분 안에서만 보면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죠.

그런데 자원으로 포괄하는 것들 중 이질적인 것들을 따로 때내어, 그것들의 고유한 논리를 복원하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됩니다.

이론적 설득력, 감정적인 자극 등을 돈과 함께 “자원”으로 퉁치거나 “동원”으로 퉁치니까 이것도 저것도 맞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근데 당장 자원과 동원도 다르고, 이것들을 구별할 때만 인식될 수 있는 현상들이 있는데,(갖고 있는 것과 활용 가능한 것조차도 다릅니다. 동원은 또 다른 얘기죠 당연히) 이것들을 구별 안 하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재스퍼는 그냥 구별해야한다는 식도 아닙니다.

하나의 저항 운동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 필수적인 네 차원을 규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시하죠.

적어도 네 차원의 분석을 종합적으로 수행해야 하나의 운동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스퍼의 이런 요구가 일반적이면서도 개별적이란 것입니다.

재스퍼는 “경험주의”도 극혐합니다.

저항 운동은 졸라게 다 다른데, 자기가 본 운동만을 가지고 저항 운동 일반을 얘기하니 멍청한 저항이 수행되는 거라고 지적하죠.

재스퍼의 저런 네 차원 분석은 저항 운동들의 개성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입니다.

저항 운동들의 공통성을 보이려는 일반 이론을 위한 게 아니라, 저항 운동들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 차이 속에서 전략을 짤 수 있게 하는 “일반 이론”이란 것이죠.

재스퍼 책은 통찰력 호소인을 양산하지 않습니다.

“저항”을 “예술”로 말하고, 규칙성을 부정함에도 말이죠.

적어도 네 차원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며 상세하게 특정 저항 운동을 기술하는 것은 당연히도 쉽지 않고, 그런 서술은 양립 불가능한 두 관점을 제시할 일이 거의 없거든요.

다른 차원들을 무시하니 할 수 있는 소리들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대단한 겁니다.

 

암튼 직접 보시면 더 입이 벌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개념들 사이의 긴장, 현장과 이론의 괴리 등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는 양반인데, 그냥 그래서 이해가 어렵다, 이런 개념으로 환원 안 된다는 틀릴 수 없는 주장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난점들을 활용해서 오히려 일반 이론을 구축하는 양반이거든요.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 시발 그거 누가 모름?”이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는 이 책은 그저 빛빛빛인데, 재스퍼는 더욱 놀랍게도 저런 어려움 호소를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으면서 포괄해냅니다.

이걸 어케 해내는지는 직접 봐야합니다...

어려움이 느껴질 포인트들을 활용해서 더욱 상세한 분석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전 진심으로 이 책이 “고전”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이 “고전”인 것이죠.

(사실 <손자병법>도 이런 거였는데... 뭐 원래 책은 성취한 바와 소비되는 바가 괴리되는 게 정상입니다ㅋㅋㅋ 재스퍼 책도 이상하게 써먹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