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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앤드루 페트그리 <루터, 브랜드가 되다>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전 요즘 공부가 잘 안 되어서 고생 좀 했습니다ㅋㅋ

뭔가를 좀 많이 읽기는 했는데, 남은 게 별로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얼마 전에 공유한 앤드루 페트그리의 <루터, 브랜드가 되다>는 재밌게 읽었고, 이래저래 공유하고 픈 얘기들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봅니다.

 

일단 이 책 엄청 재밌습니다.

제가 읽은 여러 루터 전기 중 가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역사학자의 저작이고, 당연히도 페트그리의 전문 분야인 매체사적 관심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만,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그냥 재밌는 전기입니다.

페트그리의 연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저자가 역사학자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책이 제공하는 재미는 저자가 루터에 접근하는 방향 덕분일 겁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루터를 사회적 네트워크 속 행위자로 이해합니다.

루터의 행위들을 신학적인 도그마나, 종교적 의의로 해설하기보다는, 매우 급격하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수행된 행위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에 의해 야기되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죠.

그러니 재밌는 것일 테고요.

다만 이 책에서 해명이 잘 안 되는, 아쉬운 부분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주장 자체는 식상한 것입니다.

당장 <먼 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는 주장이거든요.

루터의 성공은 인쇄라는 새로운 매체 덕분이었습니다.

인쇄를 통해 루터의 글들이 퍼져나가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먼 나라 이웃나라>에서 주장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여러모로 문제적입니다.

디테일이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매체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글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였고, 후에 “인쇄혁명”이라고 불릴 사태가 가진 복잡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니까요.

일단 초기 인쇄산업이 왜 망했는지, 그래서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파산 재판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쇄를 통해 많은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책이 많이 쌓여 있다고 해서 그게 사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비자가 없고, 유통망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이 인쇄기를 통해 책을 많이 찍어내는 것은 파산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 중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초기 인쇄업자들이 모두 파산한 것이였죠.

당연히 책은 대중적인 소비재가 아니었습니다.

책은 학자들이나 읽었고, 학자들이나 구매했죠.

그러니 시장이 모호한 상태에서, 유통 경로가 모호한 상태에서 책을 많이 찍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동서양의 금속인쇄의 중요성 차이를 설명할 때 보통 성경 어쩌구 합니다.

그런데 정작 당대에는 성경이 집집마다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서는 당연히 라틴어로 되어 있었고, 인쇄로 찍어내도 비싼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페트그리가 지적하듯이, 몇 쪽 되지 않는 팜플렛이 수익성 있는 사업이었지, 큰 책은 루터의 책일 경우에도 꽤나 위험한 사업이었습니다.

읽지도 못할 책을 대중들이 살 이유도 없었고, 애초에 가톨릭에서는 성서를 대중들이 직접 읽는 것을 권유하기는커녕 위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니, 대중의 수요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페트그리는 바로 이 사실, 이 상황을 근거로 루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거든요.

이 상황을 바꾼 게 바로 루터라는 것이죠.

루터는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들이 읽고 싶을 책을 내놓았습니다.

소비할 이유와 그 소비를 지속할 이유를 끊임없이 공급해냈죠.

이런 성취(?)는 “신학적 성취”가 아닙니다.

물론 신학적인 이유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강론과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체험을 제공했고, 이런 체험과 믿음이 계속해서 필요할 사건들을 제공했으니 가능했던 일이죠.

루터는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적들도 독일어로 글을 썼죠.

루터가 독일어로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일어 글쓰기의 새로운 모범을 제공했고, 바로 그 글쓰기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발견해냈다는 게 중요한 것이죠.

페트그리가 지적하듯이 이런 혁신 속에서 루터는 책의 형태와 수준 또한 변혁해냈고요.

이게 중요한 것들이죠.

 

페티그리의 지적들은 하나 같이 맞는 것들입니다.

번역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페티그리는 딱히 개신교의 신학적 우월성을 설파하지도 않습니다.

페티그리가 지적하듯이, 루터의 주장은 논박을 통해 쉽게 물리쳐질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가톨릭이 븅신짓을 하는 것과 별개로 저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정당하기 어렵습니다.

뛰어난 논객을 보내면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루터가 아무리 대단한 논쟁가였어도 한계는 분명했을 겁니다.

사태가 저렇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은 애초부터 이 문제가 단순 신학논쟁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일단 이 사태 자체가 초유의 일이었어요.

루터는 95개조를 게시하기 전에도 99개조를 걸었습니다.

그건 무관심 속에 묻혔고요.

루터가 야심적으로 게시한 것은 99개조였습니다.

99개조는 루터의 스콜라 신학 비판을 담고 있었고, 이게 루터가 대적하려 했던 진정한 문제였거든요.

루터가 성취하려고 했던 개혁은 대학 개혁이었습니다.

루터의 대학 개혁은 심지어 대학 일반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대학 일반을 개혁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대학들은 모두 자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비텐베르크 대학의 개혁이었고, 그것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게 목적이었죠.

99개조나 95개조 모두 라틴어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그로는 모두 전통적인 관례에 따른 것이었고요.

저런 OO개조를 통해 테제를 누군가가 제시하면, 이에 반대하는 누군가가 게시자와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중세 학문 전통이 있었거든요.(편의상 “학술회의”라고 부르겠습니다. 올바른 표현은 아니지만요)

루터는 학술회의를 열고 싶어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학 개념을 논의에 부치고 싶어했던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어그로가 필요했던 것일 뿐이고요.

그런데 루터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태가 진행된 것이죠.

야심작은 묻히고, 의도치 않게 엄청나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특히 원리적으로 이 사태와 전혀 상관없어야할 민중들이 엄청나게 주목을 합니다.

이 사태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죠.

초유의 사태였고, 루터도 이 사태의 중요성과 민중들의 관심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민중들의 관심을 잃는 순간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가톨릭의 대응이 늦어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태가 도대체 무슨 사태인지를, 얼마나 중요한 사태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니까요.

가톨릭에서는 이 사태의 중요성을 인지한 직후부터 이 사태를 정치적, 정확히는 외교적인 문제로 이해했고, 이는 틀린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이 사태를 잠재우는 것은 권위로 해결되기 어려웠거든요.

일단 민중들의 소요가 진정되는 것은 신학적 논쟁과 무관했습니다.

게다가 루터에 대한 공정하고 논리정연한 판결이 선고될 지라도, 해당 지역의 군주가 거부하면 아무 소용도 없었죠. 체면만 구기는 게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프리드리히 현제를 설득하는 게 가장 중요했죠.

프리드리히가 조치를 취하면 일은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문제는 현제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죠.(심지어 현제가 루터를 보호한 동기는 미스터리합니다. 페트그리는 이 사실을 수십번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페트그리는 이 상황 속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고, 이 초유의 사태가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를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마지막 단 한 줄로만 언급되지만)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뉴스”였습니다.

예전에 말씀하셨듯이 18세기는 지금과 무엇인가가 다릅니다.

글쓰기에 대한 태도가 다르고, 그 의의가 다르죠.

바로 그러한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비록 그런 시대는 분명히 끝났고, 그것이 끝난 것이 19세기이든, 20세기이든, 적어도 벤야민이 <위기와 비판> 잡지를 기획할 때 즈음에는 분명히 끝나 있는 시대지만요.

하여간 그런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고, 무엇 덕분에 일어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죠.

사상 초유의 사태였고,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민중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중요하고, 그것이 특별한 체험을 제공하고, 그를 통해 특정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기이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죠.

페티그리는 이런 상황, 즉, 이것이 초유의 사태였고, 당대인들이 느꼈던 곤혹과 어려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을 정말 잘 그려냅니다.

재밌게 말이죠.

다만, 이런 서술에서 좀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루터는 분명 가톨릭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을 공격하는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과 다른 일입니다.

가톨릭의 어떤 특정한 부분들을 공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쉬운 만큼 가톨릭을 떠나는 일일 수도 없죠.

문제는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자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 자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죠.

도대체 누가 성직자고, 새로운 교회는 도대체 무얼 하는지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제안이 등장해도 그게 옳다는 보장도 없죠.(“역사”가 없기 때문이죠)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단순히 가톨릭의 비판에 팜플렛으로 대응하는 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물론 페티그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팜플렛 전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탄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교회란 것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일 수 있고, 도대체 어떤 것들이 수행되어야,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가 전 궁금합니다.

어쩌면 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루터는 어느 시점부터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언했고, 가톨릭과 완전히 단절했습니다.

이런 광신은 몇몇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광신을 공유했죠.

덕분에 “하여간 우리는 다르다!”라는 상황은 가능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어지는 사태들에서 개신교 내부 싸움이 더욱 치열해지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이겠죠.

종교는 단순히 믿음들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체제constitution 비슷한 것이죠.

오늘날 이슬람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죠.

믿음 뿐만 아니라 행동, 관습, 인간들의 관계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중세에 가톨릭이 “국가 비슷한 것”을 창안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죠.

도대체 이를 대체한다는 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수세기를 걸쳐 누적된 믿음과 관습들의 집합체가 아닌 것으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인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강조했듯이 당연히도 이는 “교회론”에 해당될 도그마가 창안되어야 가능해지죠.

하지만 교회론이 창안되어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론인지가 문제가 될테니 말이죠.

전 이런 믿음들의 모호함과 이러한 믿음들의 모호함 속에서도 경계를 만드는 원동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파노프스키의 뒤러 전기는 이런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세간의 평과 다르게 파노프스키는 뒤러를 모순으로 격하시킨 것이 아닙니다. 모순이 뒤러 시대의 조건이자 독일의 조건이라고 파노프스키는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독일에서 가능한 선택은 시대를 주름잡는 정신을 제작하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불모지니까요. 결국 위대한 빙켈만처럼 고향을 버리고 떠나 “그들”이 되거나, 뒤러처럼 남아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한 가지 도상을 완성하는 두 가지 선택만 가능한 것이죠.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뒤러는 남기로 결심하였고, 그 자신의 모순을 승화하는 하나의 예술을 구현해냈습니다. 파노프스키는 뒤러를 모순의 인간으로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신격화시킨 겁니다... 진정한 독일인이 선택할 수 있을 가능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한 가지 선택으로 뒤러의 삶이라는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말이죠)

 

하여간 페티그리 책은 재밌고, 저런 다른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을 장소를 제공할 좋은 책입니다.

다만 현대랑은 매우 동떨어진, 현대와 구별될 한 가능한 양태를 인식하는 데서 멈추게 할 책이긴 합니다.

여기에 불평하는 것은 당연히도 멍청한 일이겠지만, 전 또 다시 다른 방식으로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