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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라이크먼 -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

"다케다 히로나리 – <푸코의 미학>" 보충


 

이 책도 참 괜찮네요.

<푸코의 미학>은 좀 뻔한 단점이 있습니다.

다케다가 젊은 학자다보니 좀 뻔한 한계가 있어요...

다케다가 제공하는 정보들은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배열에 있어 밀도 있는 체계가 없고, 몇몇 항목은 너무 간략합니다.

관련된 사실들과 관련된 철학적 쟁점들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이야 그걸로 충분하겠지만,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너무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뭐 대충 뭔 소린지 알고 넘어가면 되니 문제는 없지만요)

다만 저런 “불충분함”은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원하는 전문적인 독자들에게도 안 좋게 보일 겁니다.

다케다의 책을 참고해서 자신의 철학을 심화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단 얘깁니다.

라이크먼의 책이 이런 한계를 보충해줄 수 있을 듯합니다.

라이크먼은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다케다랑 같은 발판을 활용하고 있고요.

역자가 언급하듯이, 라이크먼의 책 또한 초기 푸코의 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급작스러운 침묵에 답하는 책입니다. 이 점에서는 다케다랑 같죠.

다만 다케다 책과 리이크먼의 책은 본질적으로는 대립됩니다.

물론 라이크먼의 책이 전기적이지 않고, 테마 비평과 거리가 먼 철학서라서 대립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푸코에 대한 이해 차이가 있고, 그게 대립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다케다의 푸코 철학은 말 그대로 “미학”입니다.

다케다가 포착한 “푸코다움”은 푸코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방식입니다.

그런데 다케다는 변화를 추구하는 일을 미적인 것으로서 정당화합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가진 매력으로 정당화하는 거죠.

제가 언급은 안 했지만, 전 그래서 다케다의 해석은 한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이면 철학이지 왜 미학을 내놓고 철학이냐는 거죠.

중요한 것은 제공하는 삶의 방식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입니다.

설혹 그것을 미적으로 정당화할지라도, 왜 그것이 미적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라이크먼은 애초부터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며, 철학적으로 옹호합니다.

이 또한 예정조화인지 <푸코의 미학>을 먼저 읽은 게 큰 도움이 되더군요.

덕분에 라이크먼의 논의를 술술 따라갈 수 있었고, 제가 다케다에게서 찾지 못한 문제와 답을, 라이크먼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재미났던 것은 둘의 문제와 답이 불일치하고 긴장을 야기한다는 것이지만요.

 

제가 다케다 책을 읽다가 ???했던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루셀 빠였고, “인간의 죽음” 선언은 레비스트로스 지지라고 전 알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상징주의 문학 빠돌이었고, 루셀과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언어를 위한 언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전 보통 저쪽 애들을 전부다 싫어합니다.

일단 맘에 안 드는 게, 쟤들은 자기들의 선조로 언제나 보들레르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보들레르는 저런 짓거리들이랑 완전 반대되는 양반입니다.(극혐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보들레르는 반시대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나 강조하듯이—반시대적이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역사적이고, 그 누구보다 현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형식주의는 역사성의 소산이고, 보들레르의 상징주의는 현대성의 소산입니다.

이걸로 딴 소리하는 애들은 모두 대가리 깨진 애들이고, 아무리 위대한 시인들이라고 해도 모두 대가리를 제대로 깨줘야합니다.(말라르메든 랭보든 죄다 깨줘야합니다)

전 루셀 빨 푸코도 당연히 저런 대가리 깨진 소리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푸코는 보들레르를 제 계열로 읽더군요.

다케다는 그렇게 안 느낀 것 같지만, 저에게 푸코의 루셀 사랑과 보들레르 해석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재미난 것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라이크먼이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라이크먼은 루셀 사랑이고 나발이고, 푸코가 모더니즘 문학 비판자로 출발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푸코의 문학론은 “백조의 마지막 노래”였다는 것이죠. 그러니 침묵이 이어진 것이고요.

라이크먼에 따르면 푸코는 애초부터 모더니즘 문학에 대해 매우 양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의 최종적인 죽음을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선고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푸코의 “인간의 죽음” 지지는 레비스트로스 지지가 아니게 됩니다.

라이크먼에 따르면 이는 샤르트르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 지지는 이에 따른 표면적 일치의 소산일 뿐인 것이죠.(레비스트로스의 “인간의 죽음”도 샤르트르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의 비판과 푸코의 비판은 완전 다릅니다. 요게 중요하죠.

라이크먼은 미술사 학과에 교수로 있는 양반답게 이에 대해 꽤나 흥미로운 역사적 서사를 제공해줍니다.

제가 한동안 미술사를 보면서 ???했던 것 중 하나가 크라우스의 정신 나간 것 같은 현대 미술 서사였습니다.(크라우스의 대표작은 <예술과 문화>이고, 관련된 서사는 조주연 선생의 교양연구서를 참고하면 좋습니다)

크라우스는 회화의 역사를 자율성 확립의 역사라고 주장하면, 마네로부터 회화적 자율성을 확립하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근데 저에게 마네는 보들레르의 제자이고, 마네에 대한 크라우스의 해석은 보들레르에 대한 저 사악한 구조주의자들의 해석과 동형적인 것입니다.(마네가 그린 것이 “역사화”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머저리들만 할 수 있는 헛소리라고 전 일축합니다 보통)

라이크먼은 회화와 문학에서의 저런 서사의 동형성에 기초해서, 구조주의=모더니즘=자율성 구도를 뽑아내고, 푸코가 저걸 비판하기 위해 철학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결국 구조주의, 모더니즘, 자율성은 뱅뱅 도는 이야기하는 것이고, 푸코는 이런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이게 말이 되는 게, 다케다를 읽으면서 제가 ???했던 또 한가지가 이거랑 관련 있습니다.

다케다에 따르면 68혁명 지지와 함께 푸코는 보편적 지식인을 비판하고, 구체적 지식인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게 뭐냐면, 김경만의 <담론과 해방>의 논리라고 보시면 쉽습니다.

담론과 “실재”를 구별 못하고, 자신들이 세계, 구조, 역사, 민중을 대표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게 보편적 지식인이고, 저런 븅신적인 환상에 빠져나와, 현실 속에서 주목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저런 문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연구(성과)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게 구체적 지식인이라는 거죠.

다케다가 이 차이를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지만, 전 푸코가 애초부터 이런 입장이란 게 좀 ???였거든요.

다케다가 본 푸코는 구체를 가장한 보편이었고, 루셀식의 단어 놀음을 역사로 하고 있는 거라고 보는 거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거든요.(물론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원래 사람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라이크먼은 일종의 대안 해석을 제공하고 있는 거죠.

루셀 사랑부터가 저런 말장난과 뭔가 다른 것에 대한 필요와 관련 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라이크먼은 이런 맥락을 깔아두고선 푸코가 어떤 것들과 대항하며, 대안적인 개념들을 제작하여 제공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푸코가 어떤 대안적 역사(학) 개념을 제공한 것인지, 어떤 대안적 비판 개념을 제공한 것인지, 어떤 대안적 자유 개념을 제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런 대안적 개념 제공 속에서 복원될 수 있는 철학자 상, 혹은 지식인상도 제시하고요.

라이크먼 책이 푸코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푸코에 대한 철학적으로 일관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합당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라이크먼은 제가 푸코의 철학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지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이를 “푸코의 딜레마”로 정식화합니다.

라이크먼은 푸코가 저런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고, 성공적으로 극복해냈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가장 일관적이고 가장 철학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습니다.(제가 토를 단 부분보다 더 내려간 부분은 몇 개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걸 쓰면서도, 다케다의 <푸코의 미학>에 대해서 쓴 글과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안의 내용들을 요약 정리해서 제공해야하는데 그런 건 안 하고 책“에 대한” 얘기만 하니 별 도움이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게 된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 것이죠.

나름 변론하자면... 이것도 도움이 됩니다...

특정 텍스트에 대한 이해 방식은 워낙 다양해서 결과적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멍청한 해석도 해석이긴 해석이거든요. 근데 멍청함은 미규정적이라 제한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떤 멍청한 해석들이 즐비할지는 제한할 수 없단 얘기에요.

물론 오독 중에 창조적인 것들이 있고, 그런 해석들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경이가 있지만... 그건 또 해석사 문제랑은 별도입니다.

놀라운 해석이 항상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해석은 드물어요.

열심히 연구해야지 겨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왜 했느냐? 푸코에 대한 해석을 통제할 수 있는 틀로서 제 얘기들이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어제 제가 언급했듯이, 푸코랑 맑스는 상충합니다.

다케다는 맑스 얘기를 안 했지만, 라이크먼은 푸코가 직접적으로 저런 것들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하죠.(—정확히 말하자면—푸코의 알튀세르 비판을 근거로 일반화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푸코랑 맑스랑 상충하고, 둘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제가 자주 말하듯이 모든 사상은 상충하고 양립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의 사상일지라도 말이죠)

적어도 둘의 상충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애들 해석은 멍청한 것이란 소리를 하는 겁니다.

대체로 통용되는 해석은 발리바르가 지적한 것처럼 푸코에 대한 올바른 해석도 아니고, 가장 반-푸코적인 해석입니다.

그런 것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물론 사회사적으로는 푸코란 기호가 통용되는 데에 저런 멍청한 해석이 도움이 더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상을 생각한다면... 저런 해석들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건 ‘푸코’가 아니라 ‘x’로 얘기해도 달라지지 않을 행동 패턴이라 사상 연구라고 할 것도 없는 주제거든요...

암튼 그런 점에서 제가 어제 오늘 한 딴 소리도 도움이 됩니다...

무수히 많은 해석들을 참조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좋은 해석이라면 포함해야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는 언급하니까요...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렇다고 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