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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카스트루 –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이 책(혹은 논문?)은 참 좋군요.
이 책은 <식인의 형이상학>과 다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네요.

얼마 전에 푸코를 비판하면서, 푸코에게는 지키고 싶은 “빛나는 것”이 없어서 공허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은 지키고 싶은 “빛나는 것”이 명확합니다.
아마존 민족지가 그것이죠.
이 사람들도 참 미친놈들입니다.
전쟁과 식인에 미쳐 있거든요.
하지만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삶의 방식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저짓거리를 하는 것은 그들이 탐욕스러워서도, 분노에 가득 차 있어서도 아닙니다.
전쟁을 한다고 해서 땅이 넓어지는 것도 아니고(사실 땅이 넓어져서 좋을 것도 없습니다), 전리품을 얻는 것도 아니거든요.
탐욕은 전쟁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복수가 목적일까요?
물론 복수가 명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복수를 하는 것은 와신상담식의 일생일대의 복수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적인 복수에요. 20년을 견디는 복수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들은 복수해야할 죽음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에 엄청난 감정을 투사하지 않습니다.
명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저짓거리를 하는 이유는 심심해서입니다.
타히티인들에게 유혹과 섹스에 해당될 것이, 이들에게는 전쟁과 식인일 뿐입니다.(그리스인들에게는 “경쟁”과 “승리”일 거고요)
여가 그 자체입니다. 킬링 타임인 것이죠.
복수의 성취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집니다.
그게 당연한 거고, 애초에 그걸 기획하는 작업입니다.
복수로 한 주기를 끝내고, 다시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죠...
의미 있는 “역사”를 확정하는 작업입니다.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말이죠.

이들의 이런 활동에 눈이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제가 살린스의 <역사의 섬들>에서 본 타히티에 눈이 돌아간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전 민족지가 이런 “빛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드로의 <부갱빌 항해기 보유>에 결여되어 있는 것 또한 “빛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전 불만을 품었던 거거든요.
디드로는 타히티를 그리면서 살린스가 그려낸 것과 같은 “빛나는 것”을 그려내지 않았습니다.
타히티 인들을 만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얘기들밖에 하지 않았죠.
그래서 전 저 책이 쓰레기 같다고 방방 뛰었던 것이고요.
타히티 인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해 정말 의미 있게 말하고 싶다면, 타히티 인들을 만나야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빛나는 것”으로 말하는 무엇이 될 것이고요.
살린스는 “빛나는 것”을 발견해냈고, 자신의 저작을 통해 그것을 너무나도 매혹적이게 구상화해냈기에 훌륭한 작품을 성취해낸 것입니다.

카스트루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디드로가 <맹인에 대한 편지>에서 그려낸 “체감할 수 있는 것만을 믿을 수 있는 인간”과 카스트루가 그려낸 “체감할 수 있는 것만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을 비교해보십쇼.
미친 정도가 다릅니다.
디드로는 정말 맥아리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체감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살 수 있는지를 디드로는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하긴 이게 디드로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존 사람들은 정말로 미친놈들이기 때문에 상상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도대체 인간들이 어떻게 이렇게, 그러면서도 일관적이고 합리적이게 행복할 수 있는지, 도대체 이렇게 끔찍한 짓거리를 하면서도!
이걸 만나지 않고 "상상"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도 이런 삶은 그려내지 못할 겁니다.
상상을 넘어서니까요.
그러니 민족지로서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빛나는 것”을 그냥 그리는 것으로는 “학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카스트루의 잡다한 얘기들은 모두 그의 “빛나는 것”에 학문적 의미를 부여하는 주석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뭐... 의미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죠.
의미 있는 것도 있습니다.
소위 피해자 중심적인 관점 따위는 부정할 수 있으니까요.
식민화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고, 상호적이라는 얘기는 맞는 얘기죠.
물론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저 “빛나는 것”이 동원될 필요는 없겠지만요.(저 얘기를 안 해도 할 수 있는 얘기란 소립니다. 디드로의 책처럼 말이죠)
이게 문제입니다.
저 빛나는 것을 그냥 그리는 것으로는 학문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자꾸 이상한 주석을 덧붙이게 됩니다.
반식민주의, 국가에 저항하는 사회, 존재론적 전회 따위로 말이죠.
근데 사실 이런 얘기들은 필요하지도 않고, 그렇게 설득력 있는 얘기들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쟁과 식인을 지금 이 땅에 재현할 건가요? 미쳤습니까?
저 세계는 지옥입니다. 아마존 부족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흥미진진한 지옥일 뿐인 것이지, 저 세계가 지옥이란 것은 확실합니다.(타히티도 마찬가지로 “천국과도 같은” 지옥입니다)
어차피 재현도 안 되요.
전쟁-식인이 남미 지역에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거든요.
이 또한 특정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지속하다 몰락한 양식Stil 중 하나일 뿐이죠.
절대화할 수도 없고, 절대화할 이유도 없습니다.
저짓거리의 매력을 아는 이들도 저걸 계속하진 않았으니 말이죠.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카스트루는 섀그넌을 (당연히도) 부정적으로 한번 인용합니다.
야노마뫼족의 전쟁-식인을 정치-신학으로 보지 않고, 사회생물학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 이로 말이죠.
근데 섀그넌의 저런 연구에는 주석이 좀 필요합니다.
섀그넌은 저런 관심이 있어서 저런 논문을 쓴 게 아니었어요...
섀그넌이 야노마뫼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부터가 의료연구재단의 도움 덕이었습니다.
섀그넌은 도리를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료재단에서 사회생물학적인, 유전학적인 연구를 원했으니 그걸 한 것이죠.
애초에 저들을 통하지 않았다면, 현장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기에 보내주지도 않고, 지원도 안 해주니까요.
섀그넌은 저런 연구를 “적당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노마뫼족 주변 지역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는 것을 알게 되고, 섀그넌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의료재단에 예방접종을 요청합니다.
예방접종을 하면서 혈액 샘플을 얻을 수 있다는 구실로 말이죠.
섀그넌은 그냥 적당히 구실을 붙이며 논문을 써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본 것과 느낀 것과는 매우 다른 논문들을 낸 것이죠.
<고결한 야만인>에서 논문 얘기들을 언급할 때, 섀그넌의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적당한 아이디어로 적당히 쓴 것들입니다.
그럼 섀그넌의 진짜 관심은 무엇이었나?
그냥 킬링 타임입니다.
<고결한 야만인>에서 “그래도 내가 인류학자인데 뭐라도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섀그넌이 자꾸 일을 벌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고생을 하고 씨발씨발하는 상황이 닥치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섀그넌의 이런 시도들 자체가 섀그넌의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식인처럼 말이죠.
결국 얻은 성과는 초라할 때가 많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말이죠.
하지만 섀그넌은 싱글벙글하며 저런 이야기들을 내놓습니다.
카누 여행 중 해먹에서 자다가 푸마(재규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또한 대등한 존재임을, 그 또한 푸마임을 보여야 안전하다는 야노마뫼족 친구들의 말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참고 “뭐 어쩔건데?” 식으로 눈싸움을 해서 살아남은 얘기들 따위를 내놓죠.
섀그넌 본인이 생각하기에 “빛나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을 겁니다.
야노마뫼족 사람들과 전쟁에 참여하고, 장례에 참여하고, 굳이 일을 벌려 한번씩 개고생한 이야기들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들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섀그넌은 적당한 구실을 붙였던 것이죠.
그걸로 욕을 먹은 것이고요.

카스트루는 욕먹을 소리를 하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구실”도 빈약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클로스트르의 “구실”도 마찬가지죠.
여기서 고민을 시작해야합니다.
살린스는 민족지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연속적이고 총체적인 것만 같은 “역사의 대륙”으로부터 이탈하여 “역사의 섬들”을 방문할 수 있는 작업으로, 이제는 불가능해져버린 것만 같은 “항해”가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한 것이죠.
타히티가 그래서 뭔 소용이냐?라고 물으면 살린스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것들이 기억될 가치는 있다고 말하며, 너무나도 찬란하지 않냐고 되묻겠죠.
여기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일 겁니다.
이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빛나는 것”이 명확한 연구였다...
너무나도 멋지고,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