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샹뱌오 – <주변의 상실: 방법으로서의 자기>

이하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이 책 추천합니다.(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추천하지 않는 책입니다)
샹뱌오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책도 알차고요.
하지만 저에게 지금 필요한 책은 아닙니다.
미독에게 필요할 책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샹바오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샹뱌오가 20년 후에는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20년 후에는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답변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학부생 시절의 저라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 제가 느끼던 초조함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책일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초조함은 그 시절 제가 느끼던 초조함과는 다른 초조함입니다.
샹뱌오가 지금 느끼는 초조함과 비슷한 초조함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이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이 사람과 함께 문제를 찾고 해결할 단계에 놓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샹뱌오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랑은 다릅니다.(정확히 말하자면, 미독과 제 문제도 다르죠)
하지만 적어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할 조건에 대한 인식에서는 같습니다.
그렇기에 같은 단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사람을 “비교항”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샹뱌오는 젊은 날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학부 시절부터 인정받은 사람입니다.(중국은 우리나라랑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정말 글로만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베이징 대학 재학 시절 학교 교육에 대한 1만자 분량 제안서를 쓴 것을 계기로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더군요)
대학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하였고, 그 연구가 이 사람의 출세작이자, 평생 넘어설 수 없는 성과가 되었습니다.(“저장촌 연구”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이 이 사람에게 위기를 만듭니다.
누군가가 그가 31살 때에 이렇게 “칭찬”하였죠.
이 작품이 당신의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고, 이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샹뱌오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은 겨우 31살에 불과한 신진 연구자인데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샹뱌오는 그 말이 진실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샹뱌오는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샹뱌오는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어떻게 연구를 해야할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샹뱌오 자신이 밝히듯 샹뱌오는 이론에 약합니다.
이론이란 것을 모른 채로, 그저 현장에서 구르는 것 속에서 “느꼈던 것들”을 담는 것으로 최고의 성과를 냈죠.
그 시절 그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감을 잃었고,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의 연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체성’으로 얘기되는 것들과는 다르지만, “정체성”으로 말해야만 할 무엇으로 말이죠.

샹뱌오와 저는 당연히 다른 사람이고 다른 조건에서 다른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인정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고, 그래서 졸업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죠.
제가 가진 것과 샹뱌오가 가진 것은 정반대입니다.
샹뱌오는 부잣집 도련님은 아니었지만, 돈을 잘 벌었고, 학내 인정과 경제적인 안정을 쉽게 손에 얻었죠. 또 글쓰기도 굉장히 젊은 날에 완성시켰습니다. 중국은 글쓰기를 완성시키기 좋은 나라니까요.(앞의 얘기를 참조...)
반면 전 돈을 전혀 벌지 못하고, 학내 인정과 경제적 안정 모두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글쓰기를 완성시키기는커녕, 이제야 “문체”란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요. 한국은 그런 나라니까요.(샹뱌오는 어린 시절부터 르포르타주를 많이 읽었고,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전 솔직히 ‘저널리즘’에 속할 글 중 “좋다”고 말할 책은 <아파트 게임>밖에 못 읽어보았고, 근거를 둘 장르 또한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뭐 덕분에 “문체”란 것을 정말 기본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을 “문제”로 삼을 수 있게 되었죠... 이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샹뱌오는 이론을 전혀 모릅니다. 자신의 작업을 보편 속 특수로 명료화할 언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본인 또한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것이 본인의 한계의 원천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는 이론만을 알죠. 적어도 이론 하나는 기똥차게 할 자신이 있고요.

샹뱌오는 본인이 풀어야할 두 문제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되찾는 일이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실히 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게 될 때,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자신이 아니라, 돌아갈 수 있는 젊은 날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의 개인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상을 남기는 일입니다.
샹뱌오가 중국 내부 맥락을 얘기하면서 다양한 경로로 결국 중국에는 사상이란 게 없다고 진단합니다.
중국의 진짜 문제는 중국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도구가 필요한데, 도구가 없습니다.
샹뱌오 및 지금 세대에 많은 것을 물려준 이전 세대는 “물론” 훌륭했지만, “정신”은 남겼을지라도, “사상”은 남기지 못했습니다.(이는 샹바오의 표현입니다. 저라면 ‘정신’을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고정점을 만들 수 있는 담론을 남기지 못한 것이죠.
정확히는 문제와 해결이 충전되어 있음과 동시에 “방법” 또한 담겨 있는 담론을 남기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아이디어 차원에서 흥미로운 얘기들은 넘쳤지만, 끈덕지게 이를 밀어붙여 “학술”로 성취한 이가 없어서 문제인 거니까요.
그렇기에 "사상"을 남기는 일이 샹뱌오의 학술적 목표입니다.

이 둘은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습니다.
학술적 목표와 개인적 목표가 상응correspondances하며, 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도대체 세계 속 중국은 무엇인지, 중심과 주변을 단순 위계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는, 중심-주변 관계는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보편 속 특수는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다른 말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책 제목은 이런 과제와 그 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의 상실”과 “방법으로서의 자기”
문제는 이것으로는 “학술”도 “사상”도 이룩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20년 후에 다시 “토론”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고요.(왜 ‘토론’이라고 말했는지, 원어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담’도 ‘방담’도 아닌 ‘토론’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는데, 짐작만 될 뿐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제가 전략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답변을 말이죠.
그래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말이죠.

그래도 매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적어도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진입 경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이를 정체성으로 삼는 하나의 언어적 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특히 ‘향신’처럼 지역성이 깃든 언어를 활용하여 자신을 서술하는 것은, 지역성을 제대로 내재화해본 적 없는 저에게 매우 흥미로운 참조사항을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제가 밟고 있는 시작점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시작점이 같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샹뱌오가 말하듯, 본인은 배가 불러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자리를 못 잡은 사람은 저런 고민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더군요)
또한 샹뱌오는 저보다 가진 게 많아서 제대로 고민을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샹뱌오는 본인이 연구를 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을 때, 중국 언론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연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 받았는데, 그게 호응을 이끌면서 “리바운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이건 샹뱌오의 표현이 아닙니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의 “혼맹” 장의 초반부에서 현실감의 상실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자아를 되찾는 일에 대해 콘이 사용한 표현입니다)
저와 다르게 매우 배가 부른 사람입니다.
근데 바로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저게 “리바운드”일까요? 샹뱌오가 그래서 “위기”를 극복했나요?
샹뱌오는 너무 쉽게 가려고 하고 있더군요.
정확히는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젊은 시절처럼 충동에 따라 활동해보는 것이겠죠. 현실감과 생동감을 되찾을 수 있게 말이죠.
하지만 애초부터 지금의 실천은 샹뱌오 본인이 해결하길 원했던 물음에 대한 방법과 대답 모두와 거리가 있습니다.(제가 사회적 화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런 화제에 대해 반응하는 실천을 지양하는 것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걸로는 사상을 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전 제 자신을 “팜플렛티어”라고 생각하지만, 제게 팜플렛은 <폴리테이아>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저런 실천에 투신하지 않는 겁니다)


샹뱌오도 이걸 알겁니다.
이걸 모른다면, 그 자신이 인정하듯, 샹뱌오의 한계지점이 “이론”이란 게 명확해지는 것이죠.
샹뱌오의 이론 실력은 정말 문제적입니다.
샹뱌오는 “역사”를 싫어합니다.
샹뱌오는 ‘역사철학’으로 말해야할 것을 굳이 ‘역사서술’로 말하면서 이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부정을 말하면서도, 앞 뒤가 안 맞는 소리를 계속해서 합니다.
수백페이지 사이에서의 모순이 아닙니다. 한 발화 안에서의 모순, 연속되는 대답 속에서의 모순입니다.
샹뱌오의 이론 부족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는 모순이죠.
샹뱌오는 중국은 너무 역사서술이 강해서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영국은 역사서술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웃긴 얘기를 합니다.(제가 자주 얘기해서 잘 아시겠지만... 역사서술은 영국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전통입니다..ㅎㅎ 심지어 영국에서 제일 발전했고요. 영국은 철학이 없지 역사는 넘쳐납니다)
뭐 이거야 모를 수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역사는 젬병이었던 양반이고, 그러니 모를 수 있죠.
근데 본인의 진술들이 뒤죽박죽이란 것을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혹은 인식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게 강하지 않을 영국의 학자들이 “역사를 너무나 중요시”하고, 샹뱌오에게 왜 역사를 참고/참조하지 않냐고 묻거든요.(모순이죠)
샹뱌오는 연극과 영화의 차이를 비유로 민족지와 역사서술의 차이를 언급하며 자기는 역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연극은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관찰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영화는 수년에 걸쳐 찍은 것을 편집할 수 있는 차이가 있다는 걸로 얘기합니다. 그리고 연극이 더욱 강렬하고, 더 폭발적이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얘기를 곁들이죠)
당연히도 영국의 학자들은 납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샹뱌오의 작업도 “역사”기 때문이죠.
샹뱌오는 바로 이어지는 대답에서, 중국의 “역사서술”은 왕조교체기에 걸치며 이전 왕조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중국 해남성은 “역사적으로” 동남아와 더욱 밀접해서, 중국 중앙 정부보다, 동남아권과 더욱 유사하다고 주장하죠.
너무나도 당연히 이 모든 것은 다 역사이고, 샹뱌오는 거의 모든 문장에서 모순을 범하고 잇습니다.
“정체성” 담론의 중요성, 중국 지방들의 “지방색”의 원천, 본인의 “향신” 정체성, 중국의 경제 성장(+사라진 ‘데 선생’democracy) 중 고려되지 않은 “도덕”의 중요성(학부 시절 ‘시science 선생’과, ‘데democracy 선생’만을 말하는 베이징 대학 학생들에 자극을 받아 ‘도morality 선생’을 설파하는 “신도덕” 운동을 활동한 적 있습니다 샹뱌오는) 등 모두 다 “역사”에 근거하고 있거든요.
샹뱌오는 자신이 꿈꾸는 작업, “보편 속 특수”를 말하는 “학문”의 옛 이름이 “역사학”이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샹뱌오가 정말 저걸 모르는 걸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샹뱌오는 서구 담론을 얘기할 때는 반역사주의자가 되어 말하지만, 중국 얘기를 시작하면 갑자기 역사주의자로 변신합니다.
“역사적 감각”의 중요성을 말하며, “역사적 탐구”를 주창하거든요.
심지어 샹뱌오는 “설명”을 비판하며, 학문의 진정한 역할은 “이해”와 “해석”이라는 전형적인 정신과학의 역사학 옹호 테제를 반복하기도 합니다.(정신과학의 역사학 옹호를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붕어빵처럼 표현을 찍어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정말 몰랐다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또한 “역사”, “역사적 감각”, “위기” 등등... 부르크하르트나 니체를 읽지 않고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속적인 “위기” 담론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요)
만약 샹뱌오가 “정신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알고도 저런 소리를 한 거라면, 샹뱌오는 비겁한 겁니다.
서구 담론과는 제대로 맞붙을 자신이 없으니 대결이 필요할 때에는 역사를 부정하고, 중국 맥락에서는 자신 있으니 역사만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보기엔 비겁한 게 맞습니다.
제대로 대결할 자신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고요.(저도 “베버”랑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진실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비겁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기까지 한 것이 됩니다.

샹뱌오가 대결을 피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샹뱌오도 나름의 “이론 언어”가 있습니다.
샹뱌오는 같은 시작점에 있는 인물답게 제가 얘기하는 것들을 표현을 달리하여 얘기합니다.
제가 ‘figural realism’, ‘figural methodology’ 따위로 얘기하는 것을 샹뱌오는 ‘비전Vision으로서의 이론Theory’으로 ‘도경圖景’으로 얘기합니다.
근데 비전으로서의 이론과 도경은 그다지 잘 어울리는 용어가 아닙니다.
‘도경’은 “경관”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이는 “비전으로서의 이론”의 적용 문제로 얘기되어야할, 귀속-판단-도식-유형의 영역에 해당될 개념입니다.
그런데 샹뱌오는 둘을 등치시킵니다.(참고로 전 등치시키지 않습니다)
이론을 전혀 못하니까 이런 실수를 하는 겁니다...
본인의 담론이 어떤 층위를 공략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는 “사상”을 구축Aufbau할 수 없습니다.
저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죠.
그러니 대결을 피하는 건데 사상 구축은 대결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뭐 그래도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한국인이면 만나서 같이 협업하고 싶을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같은 동료 연구자로서 그래도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니 위안도 되더군요.(프레게 말마따나 “비참한 이에게는 함께 고통 받는 이의 존재만으로 위안이 됩”니다)
특히 제가 최근에 이런 얘기를 떠든지라 더욱 위안을 느꼈습니다.
얼마 전 철학과 사람 중 한 명과 비구경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양반이랑 철학 얘기를 하다가 정말 중요하고 진심이 담긴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양반은 자신이 철학하는 이유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재빠르게, “전 무신론자이지만”이란 얘기를 덧붙이더군요.
왜 그러는지가 너무 이해가 되어 위로를 건냈습니다.
“그것이 철학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전 생각”한다고,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설명해야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전 제가 뭘 하는지를 좀 한정 짓고 싶다는 얘기를 하며, 샹뱌오가 한 얘기와 비슷한 것들을 얘기했습니다.
다만 전 현실과 맞닿은 이론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진짜 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에 알맞을, 보이는 “사상”의 언어를 한정 짓는 일이라고 얘기했죠.(상뱌오의 표현은 맘에 안들지만 그렇게 틀리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샹뱌오가 말하는 사상은 독일어 “Denken”에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그때 제대로 말을 했는지 고민하던 중,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를 보니 너무 반갑더군요.
그래서 다른 어떤 단점을 제쳐 놓고 추천하게 되었습니다.(실제로 미독이랑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창조를 물질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현장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쫓으며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것, 추상적인 모순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순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단순하지 않게 말하는 것... 모두 미독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용어도 비슷하더군요...─사실 샹뱌오의 "언어들"은 저의 언어들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표현들을 거의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샹뱌오가 수집한 “구체적인 모순들”에 전 감화되지 않았지만, 미독은 분명 놀라운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샹뱌오는 사회과학의 "깊이"를 얘기하는데, 제가 얘기한 것과 같은 것을 얘기하더군요.(https://cynicaldog.tistory.com/140참고)
심지어 표현까지 비슷하게 말이죠. 괜찮은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샹뱌오와 리링을 읽으니, 중국 학계는 이제 넘사벽이 된 것 같더군요.
국내 신진 학자들은 전형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사가 부재하거나 조악합니다.(사실 “악마적”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서사가 악마적입니다)
중국 학자들 중 대단한 양반들은 이런 문제를 잘 극복해내고 있더군요.
아마 고전 중문학은 앞으로 영원히 한국어 논문을 인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에게 읽을 가치가 있는 문헌이 없을 테니까요.
리링... 고전한문의 “멋짐”을 알면 진짜 진가가 더 드러납니다.
그냥 잘 해석한다 이런 게 아니에요.
서구에서 볼 수 있을 현대적인 학술적 글쓰기와 고전한문적인 멋진 산문을 잘 결합해냈더군요.
대담하고, 숭고합니다.(사실 “영국적인” 문명인들에게는 투박해 보일 겁니다. ‘숭고’도 원래 문자적으로 투박하다는 의미였으니 이게 정상입니다ㅋㅋ)
서사가 깔린 채로, 고전의 담론들에 “철학”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서도 얘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더군요.(“동양철학”, “중국철학”, “한국철학” 같은 걸 말하는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그것들이 “철학”일 이유도 모르면서 떠들고 있는 자동응답기들이죠. 리링은 그런 사람도 아닌 사람이 아닙니다. 리링은 고전 사상을 애초에 “철학”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중국철학사”를 창안한 후스와 펑유란으로부터 시작하면서도 말이죠. 이제 그런 적당한 이름 붙이기 따위는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있으니 할 수 있는 선택이죠. 후스와 펑유란이 “중국철학”이란 것을 말해야만 했던 것은 중국인들의 절망에서 비롯된 반동이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리링은)
이런 글을 전 쓸 수 없을 겁니다.
아마 국내 어떤 학자들도 쓸 수 없을 것이고요.(뭐 우리나라는 애초에 학계란 게 존재했던 적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다만 중국 학계가 정말로 이런 뛰어난 이들로 넘쳐날지는...
제가 자주 인용하지만, 사비니 말마따나 학계의 수준은 최고들을 기준으로 산정될 수 없습니다.
쓰레기들이 얼마나 설칠 수 있냐가 기준이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샹바오가 지적하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도 꽤나 병신이거든요.(샹바오는 저랑 천생연분인지 제가 맨날 하는 얘기를 똑같이 얘기하더군요. ‘일대일로’를 입에 담는 놈들은 뇌가 없는 놈들입니다. 그걸 입으로 담는 순간 외교적인 불이익만 쏟아지거든요. 중국 외교관들은 제발 30년전쟁부터 1차세계대전의 발발까지의 외교사부터 다시 공부했으면 합니다. 멍청함이 지나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