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 아침에 푸코의 <담론의 질서>를 읽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자기가 정상인이라는 것을 열심히 어필합니다.
뭐 어찌보면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의 한 구절 “철학에서도 우리는 ‘정서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서적 욕구는 개념의 명확성, 방법의 결벽성, 테제의 책임성, 그리고 개인이 참여하는 협력을 통한 성취를 향한다.”로 퉁쳐질 수 있을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일단 푸코의 저 책은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강연이고, 당연히도 헌사(찬가;eloge)입니다. 책 말미에 직접 이를 밝힙니다. 이 책은 장 이폴리트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고, 푸코는 그를 계승하면서도 대체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폴리트의 헤겔 철학이 무엇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제가 예전에 얘기한 엘킨스의 “헤겔”과 같습니다. “역사”인 것이죠.
푸코는 그것과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폴리트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헤겔을 선택하지 않고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실험해야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험”은 답일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푸코 시대 프랑스, 전후 시대 유럽(혹은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담론”에는 엄청난 권력이 충전된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푸코는 푸코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들은 자신의 작업과 거리가 있는 것이며, 자신은 정상인이라고 열심히 항변하는데(뭐 난 “시대정신” 따위를 다루는 게 아니다... 억압된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따위의), 그런 항변들은 다 말이 됩니다.
하지만 전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걸로 담론에 대한 특유의 이해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 시대에는 담론은 권력이었고, 담론에 참여하는 게 매우 양가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푸코가 “우리 정신” 따위로 말하는 부분에서 허경 샘은 ‘[유럽]’을 삽입하는데, 그게 이런 늬앙스를 잘 보여줍니다.
후설에게도, 하이데거에게도 언제나 “유럽”이 문제였던 것이거든요.
푸코도 마찬가지인 것이고요.
후설에게는 “유럽”이 위기여서 문제였고, 하이데거는 “유럽”을 극복하는 게 문제였다면, 푸코는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입장이 어떤 면에서는 중도이고, 그래서 좋을 수 있겠지만, 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다보스에서의 결별>을 읽으면서 전 제가 하이데거랑 제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전 이제 학문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하이데거의 학문 비판에 백분 공감하게 되었거든요.
다만 대안이 매우 다릅니다.
하이데거의 대안은 노답이죠.
진단은 공감하지만, 대안은 1도 공감 안 됩니다.
애초에 저건 대안일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푸코도 이와 비슷합니다. 푸코는 우리가 뭘 연구해야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
근데 그게 연구된다고 상황이 달라지나요? 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지라도, 문제는 계속 남습니다.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연구에 헌신할 사람들이 어떻게 유입될 수 있는지가 문제 되거든요.
푸코는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런 연구들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만 신경씁니다.(사실 전 푸코가 말하는 “장애물”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이건 넘어가죠...)
이제야 프랑스 놈들도 그런 얘기를 하죠.
얼마 전 벤느가 타계했을 때, 한 선생님이 벤느의 발언을 인용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프랑스 엘리트계의 위기가 잘 느껴집니다.
이런 짓거리를 하려는 사람들이 이제 유입이 안 되는 시대란 것이죠.
벤느는 그걸 위해 이런 저런 의의를 말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재미를 얘기하는 게 낫다고, 정말 솔직하게 말합니다.
물론 전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당연히 전 적당한 의의를 구호로 내세우자는 입장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프라”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죠.
리오타르도, 푸코도, 벤느도 인프라를 얘기 안 합니다.
담론의 질서, 억압, 침묵, 저항, 발화 뭐... 중요하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저것들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누구”의 침묵이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의미 있을 침묵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걸 위해 필요한 인프라인 것이죠.
이건 어떤 의미에서 분명 “저항”입니다.
미독이 ‘인프라’를 얘기하면서 맨처음 “저항의 인프라”로 그 중요성을 표현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진실은 저항으로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항은 조건입니다.
적어도 이게 망하지 않기 위해, 외부로부터 지켜낼 필요가 있기에 “저항”인 것이죠.
“저항의 인프라”는 그렇기에 필요조건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그 내부죠.
물론 “저항의 인프라”가 얘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발언을 복원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연구로 밝혀내는 걸로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의 진정한 성취는 “저항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달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암튼 전 “담론”에 대한 과도한 심취가 오히려 흥미로운 현상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저항의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담론은 필수적인 전장이고, 그것에 그토록 쩔쩔매는 건 잘 이해가 안 가거든요.
뭐 지금은 담론의 질서 따위가 소멸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전 공고한 담론의 질서가 있을 때 오히려 효과적인 전복이 가능해져서 실천적으로 더 유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규범을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단 얘기입니다. 연구가 ‘연구’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지침’, ‘교본’, ‘교범’(군대 용어입니다ㅋㅋ)이 될 필요가 있단 얘기입니다.
그리고 저런 규범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지키고 싶은 것”이 명확해야합니다.
푸코나 롤랑 바르트에게는 그런 게 없었고, 제가 그래서 ‘텅 빈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아렌트는 강한 대립은 피했지만, 지키고 싶은 게 분명했습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을 강요하진 않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품을 필요는 있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들을 지키는 일로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자신의 연구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수호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을 지키는 데 활용되더라도 말이죠.
슈미트 말마따나 정치는 전쟁입니다.
상탈 무페도 이 진실을 매우 존중하죠.
다만 슈미트처럼 섬멸전을 해서는 안 됩니다.(사실 슈미트는 용기가 부족해서 문제였던 사람입니다. 순교자가 되었더라면 “그 라드부르흐”를 꺾고 20세기 최고의 법학자로 남았을 텐데 말이죠. 슈미트는 똑똑한 놈이라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저걸 못한 겁니다. 니체라면 “제발 죽여줘!”라고 외치며 싱글벙글 멋지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치겠습니까?)
개개인은 모두 다릅니다. 당연히 갈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죠.
극복은 갈등을 적당히 조율하고, 봉합하는 것, 혹은 억압하는 걸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갈등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전 인프라라는 개념이 여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갈등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군을 제대로 못 찾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얘기를 하면 모두가 “수십 수백만이 정당을 지지하는 시대에 무슨 개솔?”이라고 할 텐데... 전 저게 잘못된 인식이라 생각합니다.
수십 수백만은 제대로 “아군”이 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수십 수백만이 “친구”가 된다면, 애초에 갈등은 격화되지 않습니다.
적과의 싸움보다는 내부와의 대화가 더 중요할 뿐만 아니라, 더 흥미롭고, 더 재밌거든요.
전 그래서 적과의 투쟁, 어떤 투쟁일까도 중요하지만, 그런 투쟁을 매개로 “아군”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이건 미독이 해야합니다. 전 팜플렛 티어라... 결국 전 칼과 방패일 수밖에 없고, 쟁기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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