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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 <무대>

두 사람이 교양을 지키면서도 이를 악물고 싸우는 걸 볼 수 있는 꽤나 흥미로운 글이다.

또한 대화(?)에 깊이가 있다.

 

“무대”는 모티프에 불과하다.

여기서—이 또한 “무대”를 연상시키는 표현인데— 논의되고 있는 무대는 연극 무대로 국한될 수 없다. 물론 라쿠-라바르트는 연극 무대로 국한시키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이 논의의 주요 논쟁거리이기에 국한될 수가 없다. 

 

이것저것 얘기되는 것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이 동형적이기에 하나의 키워드로 감축해낼 수 있을 듯하다.

바로 ‘figure’다.

여기서 figure는 독일 철학, 특히 칸트 철학에서 Schema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낭시가 Urteil를 가져오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신칸트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Schema 논쟁에서 핵심은 결국 “판단”이었다) 

이론이성에 국한될 것만 같은 용어인  Schema를 figure로 생각하면 실천이성의 늬앙스가 덧붙여질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figure가 더 근본 있는 용어이니 나쁜 선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figure는 단순히 형태, 인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수사학에서도 전의를 나타내는 용어 중 하나이기도 했고, 성서 해석 방법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둘 다 중요한데, 개인적으로는 성서 해석 방법론 맥락이 좀 더 듣보이니 홍보하자면 이러하다.

figure은 구약과 신약을 매개하는 해석법으로, 구약을 신약, 특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준비로 이해하는 기교였다.

이 기교의 telos는 구약에 등장하는 res들을 type과 anti-type으로 읽어내면서, 문자적 의미를 그리스도의 corpus로 전유하여 representation하는 것이었다.

figure는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형태들을 의미하지만, 낭시의 주장처럼 그 형태들을 특징 짓는 윤곽tracement은 바로 그 인물Figure, 즉 예수의 흔적trace으로 여겨진다.

물론 낭시는 대문자 Figure를 주장하거나 확립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교를 인정할 것이냐가 되겠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왜 둘이 종교로 치고 박고 싸우며 서로를 “너무 종교적이라고” 비난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라쿠-라바르트는 칼뱅주의를, 즉 엄격한 우상숭배금지를 신봉하고 있고, 낭시는 이에 질세라 자신의 가톨릭주의를 천명하고 있다.(물론 해학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신학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결국 낭시가 앞설 수밖에 없다. 

라쿠-라바르트의 입장도 “비가시적이지 않은 형상주의”로 전락하기 때문.

어차피 형상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추상적인 구체적인 것들”을 좀 더 선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건 이상한 입장이 아니다. 수들을 쫓는 이들에 나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수야말로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보편자면서도 개별자인 진정한 실재들이니까)

낭시가 이를 두고 철학적 입장 차이를 취향의 차이로 퉁치려고 한다며 맹비난하고, 논쟁을 불화로 치환하려고 한다며 방방 뛰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근데 결국 취향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다 어느 정도 무대를 공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사람마다 다른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개인적인 차이로 국한될 이유는 없다.

개인 또한 분해되어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과거에 내가 느꼈던 것들을 지금은 느낄 수 없게 되었고, 흥미를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것들의 종류와 강도 모두 변했다.

이런 것들이 반드시 성장이나 진보일 이유는 없다. 그냥 변화일 수 있고, 변화조차 아닐 수 있다. 반응(책에서 ‘reaction’으로 등장하는 것)이 비결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수적 반응들을 어떤 방식으로 유형화하고 통제하느냐가 관건이고, 여기서 얼마나 차이를 의미 있게 다룰 수 있는지가 핵심 과제다.(미리 말하자면 이는 내가 마지막에 얘기할 "정치"가 바로 이 관건과 과제의 "무대"이자 "연극"poesis이다)

 

뭐 내가 취향 문제에 은근히 동의하게 된 것은 라쿠-라바르트의 취향이 나의 취향과 비슷하기 때문.

낭시의 “신체” 모티프들에 대해서 비꼬기를 시전하는데 빵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입’이라는 단어로 이 소리 저 소리하면서 빙빙 도는 꼴을 가지고 “질질 흘린 침으로 끈적거리는—게다가 냄새까지 날!— 철학적 개념어”라고 비꼬는 데 침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취향에서 절제는 중요하다.

철학적으로는 낭시에 동의한다. 하지만 내 취향은 라쿠-라바르트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절제의 경계는 모호하며, 모든 형상화를 화석화로 퉁치는 것이야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절제되지 않은 스펙터클은 사치, 퇴폐, 결국 부패와 타락일 수밖에 없는 것도 진실이니까.

그럼에도 스펙터클은 중요하다.

모든 절제는 과잉을 위한 것이었고, 절제되어 연출된 스펙터클도 당대를 기준으로는 사치스러운 스펙터클이었다.

서사시가 스펙터클이 아니라는 이해는 몰역사적인 오류란 소리다.("둘 다 그리스 문학사부터 다시 공부하시라!"고 방방 뛰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는 혼자서 읽는 것만으로도 문예poesis의 목적이 성취된다는 멍청한 소리에서 비롯되었다.

일단 저걸 받아들이고 나니 낭시는 결국 혼자서 수행하는 독서 또한 다수적인 자신“들”을 통해 수행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는데(뭐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은 비상식적일 수 있는 소리라 빈틈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애초에 저걸 안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혼자서 독서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게 문예의 목적이란 소리는 개같은 소리고, 니체라면 방방 뛰며 비극의 역사부터 다시 보고 오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혼자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자위행위랑 다를 것 없다. 그걸 “문예”라고 굳이 이름붙일 이유도 없다. 상딸을 치든, 스펙터클을 관람하며 치든, ASMR처럼 들으며 치든 만족만 되면 그만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런 것들에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멍청한 짓거리다. 

만족이 중요하다면 과정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 “방법”을 논하는 게 우스울 테니까.(애초에 “이해”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만족했는데? 오직 “이해”라는 또 다른 종류의 딸딸이를 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것은 혼자하시라!)

중요할 수 있다면 역시 그것이 공적으로 수행됨으로써 건립Aufbau되는 광장이라는 무대, 그리고 그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인물figura들이 중요하다.

아렌트가 말한 활동으로서의 정치가 바로 이것이었다. 니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figure를 얘기한 것도 이것을 위한 것이었고.

 

뭐 하여간 재미난 책이지만... 

역시 난 기승전-니체 인프라 구축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두 사람에게 부족한 것도 “인프라” 개념이다.

폐해든 가능성이든 초월론적으로 얘기하는 것으로는 현실감을 느낄 수 없다.

다른 말로 힘이 없단 소리다.(힘을 향한 의지!)

현실 속 사례를 말해야만 하고, 그러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이론적인 떠벌거림으로는 삶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대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무대인가?”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이 무대”가 중요하단 얘기다.

무대들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figure들을 지킬 수 있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는 인프라를 건립(다시 Aufbau!)해야만 하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건축 능력이다.

하지만 이 진실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라도 figure가 제대로 말해져야만 한다.

아마도 나의 다음 작업은 근대 철학의 기원을 figural methodology의 발생과 전개로 “서술”하는 “역사”, 그리고 근대 철학의 형이상학을 'figural realism'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하는 “철학”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