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다윈에 대한 오해>를 읽고나서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지 않고 의미 있는 비판을 성취하는 일은 중요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잘 못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합리성>만 해도 그렇다. 당연히 저 책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완벽한 책이란 건 없으니까.(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제외하고!) 자주 얘기하지만,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실패는 당연한 것이고, 성공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정말로 성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우리 모두가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비난 받을 일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일이 많다.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에도 일이 잘못될 수가 있다. 역사 속의 패배들은 대부분 이런 일들이고 말이다.(현대의 모든 역사 연구를 섭렵해도 세기말 빈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 일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세기말 빈 시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은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모르고 남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운명에 굴하지 않았다. 운명을 바꿔내야만 운명에 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거나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제정신을 지키며 그 어떤 무엇이라도 시도하며 사는 것 또한 운명에 굴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해낼 자신이 없다. 능력 뿐만 아니라 사랑이 부족하기에.)

하여간 <새로운 세계합리성>에 대해서 엄청 비난을 쏟아냈고, 다르도와 라발을 바보 취급했지만, 저 책은 나쁜 책이 아니고, 다르도와 라발도 바보가 아니다. <다윈에 대한 오해> 또한 마찬가지이다. 토르를 바보로 만들었고, <다윈에 대한 오해>를 비난했지만, 애초에 나의 의도는 저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 또한 누구를 바보로 만들지 않고서는 얘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주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지 않고 의미 있는 비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물론 저들이 현대인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은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산 사람은 대답할 수 있다. 그러니 현대인은 좀 바보로 만들어도 된다. 게다가 뭐… 현대의 누군가를 바보로 만드는 나의 방식은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 그들을 바보로 만들지는 않는다. 토르가 나의 비판에 응답할 수 없겠지만, 응답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토르는 이미 학계에서 인정 받는 학자고 나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인데, 내가 토르를 좀 깎아내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외려 바보가 되는 것은 나다. 최근 한 평론에 대한 반박글을 올렸는데, 올리고 나서 후회를 좀 했다. 글이 궁상맞고 허점 투성이어서 그렇다. 누군가를 제대로 바보로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었다가 되려 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쉽다. 잠시 후회했지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잘 안 되어도 쪽팔린 것은 나한 명 뿐일 것이고, 내가 쪽팔린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다르도와 라발, 토르야 나에게 대답하지 않겠지만 대답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윤아랑 평론가는 나에게 대답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나를 바보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사실 이 경우에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뭐라고...) 결국 쪽팔림을 감수해야하는 것은 나고, 그건 뭐 내가 감수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왔으니 문제될 건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단 소리다.(정신승리지만 이것이 오류인 것은 아니다.)

하여간 토르 책에 칭찬을 하고 싶긴 하다는 소리가 되겠다.

근데 토르도 나랑 좀 비슷한 성격인지,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고, 토르가 하고 있는 바보 만들기는 참 올바른 바보 만들기란 생각이 들어 관련하여 숟가락을 언져본다.

토르가 행하고 있는 바보 만들기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토르는 과학사가, 인식론 전문가고, 그러니 당연히도 똑똑한 누군가가 인식론적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열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븅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이런 케이스인데, 충분히 알법도 한 놈들이 정말 상식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할 때 생겨나는 빡침으로부터 비롯되는 외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토르를 빡치게 만든 사람들은 “반인종주의”를 표방하는 멍청한 좌파-지식인 조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말하며 “인종주의”를 공격하는데, 이게 진짜 인식론적인 기초 소양을 결여한 멍청이들만이 할 수 있는 소리임에도 유명하고 잘난 놈들이 그딴 소리를 하고 있고, 교양인이라는 놈들이 여기에 동조하며 잘난 척 하고 있다는 것이다.(토르 본인의 표현도 이처럼 격렬하다. ‘인식론적 기초 소양’을 운운하며, 유명한 지식인들의 실명을 직접 언급하며 날선 비판을 수행한다.)

뭐 토르의 지적은 나도 백번천번 동의할 수 있는 것이고, 토르가 제시하는 다윈주의가 현대에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다윈 해석 자체는 올바르다 평가하고, 그것이 멍청한 소리는 결코 아니라 평가하며, 그 전략적 가치가 높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소리가 되겠다.

저 문제에 대해서 내 버전으로 썰풀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갔다온 선생님들이랑 공부를 하다보면 가끔 노예제 문제나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 연구를 접할 수 있는데, 그때 내가 느낀 어처구니 없음은 이런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종이나 노예 개념은 18세기에는 없었고, 그런 틀로 생각해서 도움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그것이다.

내가 자주 애기하는 거지만, 소유권 지상주의는 철학적 주장이 아니고, 20세기 중반에서야 등장한, 별 고찰 없이 무지성 정당화 전략으로 등장한 뻘소리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에 근거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짓거리는 19세기에 나온 뻘소리이고, 노예제에 기반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는 세력들이 (할 말이 없을 때) 뭐라도 지껄일 수 있게 만드는 뻘소리에 불과해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 그런 뻘소리는 이전 시대에는 당연히도 존재할 수 없었고 말이다.(돈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개븅신 같은 뻘소리를 왜 하고 다니겠는가?)

노예와 인종이 연결될 이유가 전혀 없다.
17-18세기의 탐험기에 미개인을 노예로 다뤄야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악한 주장은 등장한 바가 없다.(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타히티인들을 마주한 이들은 여러 모로 충격을 받았고, 그들의 미개함에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타히티인들을 노예로 삼아야하고 노예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고 그 누구도 주장한 적은 없다. 도대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어떻게 정당할 수 있겠는가?(간섭은 언제나 정당성을 요구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 소박한 진실을 잊은 것 같지만 말이다.) 애초에 저런 주장을 가능케 하는 맥락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었다. 17-18세기에 정당화 되곤 했던 노예는 전쟁 노예였다. 유럽인들이 노예제와 관련 맺게 된 것은 다른 지역에서 판매되고 있던 전쟁 노예를 구매하면서이다. 이를 구매해도 되는가가 그들이 생각했던 문제라고 할 수 있곘다. 물론 이렇게 보았을 때, 타히티와 전쟁을 해서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도 정당화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이런건 경우가 다르다. 전쟁도 무조건 가능한 것이 아니다.(전쟁을 모두 사악한 것으로 몰아 세우는 것은 그래서 여러모로 불합리하다. 똑같이 나쁘다고치면, 인종청소를 하나 국소적 타격을 하나 다 같은 것이 되니 말이다. 미국의 자칭 반전 윤리학자들은 사회를 좀 먹는 사악한 이들이다.)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이 있고,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 있다. 멀쩡히 잘 사는 사람들을 침략하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당연히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은 잘 모르지만 아프리카의 부족들 사이에서의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 맥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발생한 정당성이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전쟁은 맥락이 중요하고, 역사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형성된 틀 속에서 정당성이 가려지니 당연한 것이고, 해당 지역 사람들을 멍청하고 사악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가져야할 신뢰였고 말이다. 문제는 거기서 판매되는 노예가 원격무역을 통해 세계화가 되었다는 것이고, 본인들이 전쟁을 겪었던 내적 맥락 속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면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 맥락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반격을 노렸을 사람들이, 뜬금없이 이상한 곳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수세대에 걸쳐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특유의 끔찍한 역사적 조건이었고 말이다.(갠적으로 아프리카 내부 맥락이 외부 맥락보다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게 세계화되는 것은 아예 다른 맥락이고, 여기서 생기는 특유의 문제가 있으며, 편안함의 강도로 이 현상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게 맞다. 이 맥락에서는 “전쟁 포로의 노예화가 가진 법적 정당성” 따위는 얘기될 수 없는 게 당연하고 말이다. 전쟁이란 양자 관계에서 이탈하니 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암튼 저런 짓거리들에 편승하고 나면 당연히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스스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조건에 빠졌음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걸 직시하지 않고, 적당히 외면한 것이었을 뿐 정당화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하여간 인종이랑 노예는 직통 연결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특히 백인, 흑인 식의 구도는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았고 말이다.

흑인 대 백인 식의 구도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나 성립할 수 있고, 미국에서도 20세기에나 확립된 구도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백인 흑인 황인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잘 모르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라 , 잘 아는 중국인과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흑인이라고 한 묶음으로 부르곤 하지만, 애초에 흑인이란 범주는 성립하기 어려운 범주이다. 아프리카에는 다양한 민족이 있고, 당연히도 그들을 피부색으로 한 묶음으로 묶을 이유가 없다. 피부색도 민족적 차이가 있고 말이다. 굉장히 피부색이 진한 민족은 심지어 매우 늦은 시기에 형성된 거고, 이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이 다른 대륙의 민족들보다 피부 색이 진한 것도 아니었다. 뭐 백인들이야 자신들과 자신들이 아닌 놈들로 “유색인종”이라고 부르겠지만, 그것도 이상한 분류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백인은 원래 앵글로-색슨계만을 의미했었다. 당연히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는 백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이탈리아계가 백인으로 포함된 것은 20세기에 필요해진 범백인 정체성을 확장하는 전략에서 실현된 것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같은 곳이 아니라면 흑인 백인 식의 분류가 필요하지도 않은데,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그런 분류를 왜 고려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인종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범주도 흑인 백인 이런 비학술적인 븅신 같은 분류가 아니었다.(게다가 그런 식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런 분류는 시도될 수조차 없었다.)

암튼 토르는 이런 18세기적 맥락은 따로 언급하지 않지만, 정확히 필요한 지적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유전학적으로 “인종” 같은 분류 도식이 규정될 수 없을 수야 있겠지만, 유전학적으로 그것이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출되지 않는다. 토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분류학에서 아종 및 변종이란 개념이 사용되고 있고, 분류학에서 사용되는 아종 및 변종 개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인종 또한 충분히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대중이든 뭐든)이 인종적 분류도식을 인식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현실(토르는 지적 안 하지만, 이건 인지과학적으로 필연적인 직관이다. 이런 직관을 거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인지”란 게 뭔지 모르는 멍청이고 말이다. 이건 걍 변경될 수 없는 현실이다.) 속에서 이를 단순히 외면하며, 그런 개념이 없다고 앵무새처럼 씨부리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일 수 없다는 소리가 되겠다. 토르가 지적하지만, 저런 전략으로는 인종주의적인 수사에 기초한 선동을 막을 수가 없고, 그런 쪽에서 학술적으로 공격했을 때도 언제나 수세적인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암튼 이런 문제 상황을 깔아두고 토르는 전략적인 판짜기를 기획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곘다.
토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흥미롭게도, 인종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이들이 인종 차별적인 정책에 반대하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토르는 이런 실천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한다.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반대되는 주장들에 어떻게 응답하며, 학술적인 구축과 상대방들을 폐쇄하는 전략적 실천을 수행하였는지를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다윈은 한 가지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토르가 지적하듯이, 애초부터 인종 개념이 왜 등장했고, 어떻게 쓰였는지를 이해하지 않고, 심지어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서 부정하는 것은 멍청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토르가 당당하게 목소리 높여 인식론적 기초 소양이 부족한 뻘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토르가 말하지 않은 18세기 맥락을 추가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인 흑인 황인 식의 멍청한 분류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저런 범주는 왜 등장한 것이었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그들이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보면 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이다. 이러한 인식적 조건 속에서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인종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같은 인간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존재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고, 이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뭐 신에게 호소할 수 있을 때에야, 그냥 계시 받지 못한 것들이라고 퉁칠 수 있었겠지만, 그런건 불가능한 답변이 되었다. 일단 그런 호소가 먹힐 수 없었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하는데,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들과 관계를 맺다보면, 그들 또한 도덕적이고 지혜롭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단순히 무시하는 방식은 “설명”일 수가 없었다.(덧붙여 선교를 위해서라도 그들은 인간이어야만 했다. 18세기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해 세계 민족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전적으로는 민족들의 차이는 물리적인 이유로 설명되었다.
환경 차이 때문이란 것.
더운 지역에서 사람들은 어떠어떠할 수밖에 없고, 추운 지역 사람들은 어떠어떠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떠어떠한 차이들이 발생하는 것이란 소리가 되겠다.(햔대에도 이런 주장이 넘쳐난다. 개븅신 같은 게 대부분이고 말이다. 더위가 문명을 저해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 <잃어버린 도시 Z>의 주인공 퍼시 포셋이 반박하였고, 그것이 틀렸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장되었다. 열대 지역이 기후적으로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워서 잘 안 보였던 것 뿐이지, 열대에도 당연히 문명은 있었다. 암튼 적당한 환경적 설명은 도움이 되지만, 그게 과도해지면 멍청한 소리가 된다. <총균쇠>는 좋은 책이지만, 그것에 대한 요약은 너무나도 위험하단 소리이고 말이다.)
뭐 이런 도식에서 중위도가 짱짱이라느니, 문명이 나올 자연 조건은 그럼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따위의 얘기도 나왔었는데, 이건 중요치 않다.

문제는 저런 도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뭐 좀만 생각해봐도 저런 도식이 안 먹히는 것은 당연한데,(저 고전적인 환경결정론 담론들을 집성한 글래컨이 지적하듯, 도대체 사하라 북부 지역부터 극동지역까지가 어떻게 “하나의 기후”일 수 있겠는가? 좀만 조사해봐도 말이 안 되는 건 당연한 것이었으나, 정보가 부족해서 대충 퉁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태평양 항해였다.

놀랍게도, 쿡 선장의 2차 항해 때부터 멜라네시아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은 구별되었다.
1차 항해 때 멜라네시아인들만 만났는데, 2차 항해 때 폴리네시아인들을 만나자 유럽인들은 두 인종의 차이를 바로 알아 차렸다.(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직도 두 인종을 구별하지 못한다;; 뭐 내가 두 인종을 구별하는 민족지를 본 게 아니라, 각각을 설명하는, 그리고 국소 문제에 집중하는 현대의 민족지만을 읽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구별이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그런 지적을 하고 싶다.)
유럽인들은 두 인종(민족이라고 해야하나? 좀 복잡하다…)의 차이가 환경일 수는 없다고 옳게 판단내렸다.
기후가 다른 것은 아니었고, 환경적 차이가 그렇게 차이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확연히 문화가 다르고, 외형적 특색 또한 차이가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고, 두 인종의 차이를 환경에 호소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이건 포르스터가 주장했으니 실시간으로 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르스터는 쿡의 2차 항해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저런 게 학문적으로 문제화되기 이전부터 대안적 차이 원리가 주장되곤 했었다. 원조는 뷔퐁이고, 뷔퐁을 까는 뫼페르튀이에 응답하여 칸트도 참전한 주제고 말이다.
핵심은 이런 것이다.
환경이 인종적 차이를 결정한다 쳐도, 결국 환경에 반응하여 사람들의 특성이 변화되어야만 인종적 차이가 가능할 수 있다. 1세대 만으로는 저런 차이는 생기지 않으니 말이다.
저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변화하는 힘” 자체가 중요하다고 지적된 것이고, 그 힘 속에서 인간들이 하나의 어떤 존재로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해낸다고 이해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인종/민족의 차이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혹은 자연의 종들이 가진) 잠재력의 표현이란 것이도, 이렇게 보았을 때 인종/민족의 차이는 당연히도 그 자체로 존중될 그런 차이가 된다.
애초에 인종 개념은 이런 것이었단 소리가 되겠다.
인종이란 단어는 애초부터 생물학 냄새가 나는 단어가 아니었다.
‘race’는 계보를 뜻하는 단어 아닌가?
당연히 종적인 차이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들이, 그들이 이룩해내는 역사 속에서, 수세대를 걸쳐가며 자신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 만들어낸 특유의 개성을 가리키기 위해 저 표현이 차용된 것이었다.
이런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겠다는 게 이상한 짓이고 말이다.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고, 예전만큼 민족-인종 경계가 분명하진 않지만, 오늘날에 주목되는 문화적 갈등들을 이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과거 인종 개념이 취했던 차이 설명 전략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고 말이다.

암튼 이런 이해 없이 18세기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였다느니, 흑백 논리로 가득하다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빡이 칠 수밖에 없다.(흑백 논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정말 아무 이해 없이 비난하는 걸 보면 열불이 난다.)

토르는 저런 뻘소리들, 그리고 그에 기반한 담론들을 박살내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도 이건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토르를 바보 취급했지만, 나 또한 토르가 바보 취급한 놈들을 극혐하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토르 편을 들 것이다.
뭐… 내전이 더 치열한 경향이 있고, 그래서 토르에 대한 비난이 앞섰던 거였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