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Bevir, R. A. W. Rhodes의 The State as Cultural Practice
예전에 이 책 소개해드린 적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땐 제가 안 읽고 소개한 것이기도 하고, 그때는 저희 모두 “통치”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통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이 책은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 두 저자 모두 통치 문제 전문가인 것도 중요하겠지만(비버는 옥스퍼드 입문 시리즈의 <통치>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소개하는 이론과 그 이론을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일단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이론은 당연히도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국가입니다.
그냥 이렇게 툭 던져놓았을 때는 딱히 별 감명이 없을 수도 있고,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좀 구시대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최신 이론이자 현 시점에 채택 가능한 가장 발전된 세대의 이론으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개 자체가 맥락화이고, 이들이 제시하는 이론을 통해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담론들을 맥락화하고, 그렇게 맥락화된 사회담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실천을 맥락화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죠.
이 양반들, 특히 비버는 역사적 접근의 주창자입니다.
하지만 비버는 그냥 역사적 접근을 하면 좋다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무지성적인 역사적 접근은 구시대적인 역사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당연히도 이 양반은 역사적 접근이 대충 유의미하다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고,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비버는 자신이 제안하는 역사적 접근에서 제시되는 개념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개합니다.
상황 속 행위자, 실천, 권력, 역사적 설명, 서사, 전통, 딜레마
해당 개념들은 “역사적 설명” 속에서만 우연적이고 미결정적인 것으로서 사용될 수 있고, 국가의 우연적이고 미결정적인 것들을 주목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이죠.(이게 이들이 주창하는 주된 장점입니다. 우연성과 미결정성을 이해 가능케 하는 분석틀로서의 역사적 접근과 이에 기초한 맥락화)
이러한 장점으로 자신의 이론을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닙니다.
해당 개념들은 “맥락”이란 것을 개념화하는 도구입니다.(예전에 맥락이란 것이 무엇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얘기 나눈 적이 있는데 그러한 물음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버와 로즈는 이 도구를 가지고 자신들의 이론 또한 맥락화하죠.
기존의 국가 담론들은 어떤 전제를 가지고 국가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는지를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그들의 접근 속에서 주장되었던 것과 귀결되지 않는 것을 구별하며, 유의미했던 성과들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들 속에서 자신들의 접근이 최상위 전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요.
무지성 맥락주의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맥락 자체를 개념화하고, 자신들이 창출한 개념을 가지고서 자신들을 재평가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것들을 설명할 수 있고, 어떤 것들을 설명하기 힘든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정교화를 시도한 개념을 철학(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기도 하고요.
뭐 개인적으로는 철학사적으로나 지성사적으로 비버와 로즈의 주장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만,(저야 동의가 넘쳐나는 사람이니 동의할 수 있긴 한데, 딴지 걸면 문제가 될 부분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일단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접근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기에 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 책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책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평가하는 게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하여간 “통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틀과, 그러한 틀로 들여다볼 합당한 이유와, 그러한 틀이 유의미한 맥락을 동시에 제공하는 책이고, 자신의 접근을 다른 조류들에게 이해시키고, 구별 가능한 무엇으로 제시할 때 유용한 전략을 제시하는 책이기에 추천하고 싶습니다.(특히 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조류들과 자신의 접근을 구별하게 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것으로, 장점이 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학문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레천 바크의 <그리드>
‘인프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제가 인프라는 좀 정적인 것 같다고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정적이지 않은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고, “인프라”를 연구할 때 사용될 수 있는 한 가지 연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일단 이 책의 주된 미덕은 우리에게 있어 보이지 않거나, 경관을 해치는 것 정도로 여겨지는, 전봇대나 송전탑을 “보이는 것”으로서 전경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경화 자체가 매우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고요.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미덕은 전기가 가진 물성에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전기를 다루는 언어에서 전기는 “흐르는” 것입니다.(‘전류’ 등) 때문에 사람들은 전기 시스템이라는 것을 수도 시스템이나 가스 시스템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될 수 없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 문제-위기가 촉발된다는 것을 저자는 잘 보여줍니다.
전기는 생산되는 즉시 소비되고, 소비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보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기를 공급하는 시스템 전반에 지속적으로 적절한 전기 상태를 유지해야하고요. 모자란 것 뿐만 아니라 넘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때문에 이것들이 잘 관리가 되어야하는데, 단순히 전기망(책 제목인 ‘그리드’)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적절히 관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소비 자체도 문제가 되거든요. 저자는 전기가 가진 물성과, 이를 활용하는 경제성이 만들어 내는 내적 갈등을 잘 설명해줍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의 심각성도 잘 다뤄주고요.
이런 접근 속에서 성취되는 주목할 만한 포인트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친환경 문제를 생각하면 대체로 “발전”의 관점만을 생각합니다. 화력 발전이 문제고 신재생 에너지를 채택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하죠. 저자는 이런 접근이 매우 문제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저자는 (솔직히 제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들에서) 신재생 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신재생 에너지로 발전 시설을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강조합니다. 오히려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하게 되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고, 그것이 위기를 만들거든요. 저자는 발전의 관점 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지속”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이러한 조건을 현실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바뀌어야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포인트는 이런 겁니다. 전기망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입법에 의해 예상되지 않은 효과가 발생하였고(저자는 이를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서 전혀 다른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독점공급-독정소비 구조가 무너진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전기망에 대한 이해, 전기망이 이용되는 방식, 전기망을 관리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죠. 물리적으로는 바뀐 게 없습니다. 법이 바뀌고,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서 전기망을 이루는 비물리적 조건이 바뀌었고, 바로 이 변화가 전기망에 엄청난 위기를 발생시켰다는 것이 중요하죠. 법적인 변화와 이에 의한 행위자들의 실천 맥락 변화가 전기 시스템의 어떤 면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어떤 면을 볼 수 없게 만들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접근 속에서는 특정 행위자의 사악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 접근 가능한 관점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가 중요하게 되죠. 이 책은 이런 차이들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이 책이 가진 문제도 엄청 많습니다…
일단 저자가 인류학자고, 그러다보니 특정한 관점으로 각을 세우는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 무차별적으로 쏟아냅니다.
나름의 주제 의식이 있고, 그게 중요함에도, 본인 스스로가 그런 주제 의식을 망가뜨린다는 얘기입니다.
예컨대 이 책은 인프라뿐만 아니라 인간을 자꾸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게 진짜 설득력을 떨구고 있습니다.
이 책이 가진 장점은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그런 게 아니고, 인간성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성과 이 물성에 기반한 시스템이 특정한 행위-기대 패턴 속에서 어떤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가이죠.(일종의 “존재의 고집”이죠.) 그런데 인간들을 자꾸 끼워팔고, 그 속에서 기업은 나쁜 놈들 민중은 고통을 겪는 이들 식으로 사건들이 설명될 때가 있는데… 정말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전기 공급 기업(책 속에서는 ‘유틸리티’라고 불립니다.)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은 광기에 가깝거든요. 한 전기 공급 기업 직원이 불평했듯이, 전기 공급 기억이 전기망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통해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자파를 심각하게 발생시키는 핸드폰은 잘 만 쓰고 있죠. 기본적으로 이런 불신은 음모론적이고 광신적입니다. 전기 공급 업체에 전적으로 독립적이려고 하는 이들이 이제 과거의 유산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저자가 그려내는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업도 문제지만 대중들도 문제입니다.
또한 저자가 대중들에게 책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일관성도 있고요.
예컨대 저자는 현 미국인들의 전기 소비 방식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 수요가 정점에 이르는 특정 시점에 전기 사용을 억제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요. 근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걸 세게 주장해야합니다. 한 여름의 미친 더위 속에서 에어컨부터 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이죠. 전 이런 주장이 좋은지도 모르겠고,(한 여름의 미친 더위 속에서 에어컨을 안 트는 게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거든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명시적으로 얘기했어야 합니다.(좀 비겁한 태도를 취하고 있단 얘기입니다.)
하여간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한 가지 가능한 방식을 탐구하고, 이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할 필요가 있단 얘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고민을 위한 비교항으로서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성취한 것과 실패한 것들이 하나의 복합체를 이루고 있는 책이니까요.
P.S. 갠적으로 정말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대니얼 리버먼의 <우리 몸 연대기>를 모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버먼은 그 누구도 바보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합리적인 것으로서 선택할 수 있게 만들고 있거든요. 리버먼은 “비용”의 문제를 통해서 겉보기에는 비용이 커보이는 정책 변화가 정부, 기업, 개인 모두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설득합니다. 이런 설득 속에서 정부, 기업, 개인은 바보로 취급되지 않고, 리버먼은 자신을 천재로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주목하기 어려운, 그리고 전문가가 탐구해야만 겨우 알 수 있을 “사소한 것이 만들어 내는 막대한 차이”를 밝히는 방식으로 서술해놓았거든요. 게다가 “경제성”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고 있죠. 정말 좋은 팜플렛입니다.
아미르 D. 악젤의 <수학 미스터리, 니콜라 부르바키>, 제임스 엘킨스 <학교 안의 미술, 학교 밖의 미술>
먼저 부르바키에 대한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책 자체가 엄청난 것은 아닙니다. 수학적 체험이 제대로 설명되고 있진 않고, 일화적으로 서술되고 있거든요.(덕분에 재미 있게 읽긴 했습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 20세기 중반의 부르바키파를 이해할 이유가 있어서 추천하는 게 아니란 얘기죠.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모임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서입니다.
특정한 학파, 그것도 매우 밀도 있는 학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형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그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지속적으로 보존되어야하는지를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걸로 학파 형성 및 지속에 대한 지식사회학 연구서를 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책에서는 학파의 주장 자체를 열심히 연구하곤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인간적으로만 다루고 있고,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되는 강점이 있다는 거죠.(일단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추천의 이유가 될 거 같고요.)
또한 부르바키가 “교과서” 혁신을 목표로 했기에 추천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엘킨스의 책은 어쩌면 정반대의 이유로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 책은 이론적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미술계 내부에서만 읽을 이유가 있는 책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바로 이 이유들 때문에 참조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엘킨스는 문학, 미술, 미술사를 전부 거친 인물이라(전 미술사가로 알고 있었는데, 미술계에도 있었더군요.) 미술계 내부인의 정체성이 강하면서도, 바깥 속에서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책은 미술 제도가 학생들을 가르침에도 이 사실을 부정하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의식 없이 가르치고 있고, 그것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극복 방향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킨스가 내부인의 관점에서 내부인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저라면 그냥 뚝배기를 깨야한다, 개븅신 같은 소리를 한다, 5분만 생각해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수십년 종사한 새끼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씨부리고 앉아있다, 생각이란 것을 할 줄 모른다, 종사자란 놈들은 도둑놈 심뽀가 가득한 인간 쓰레기들이다, 사람들에게 돈 내놓으란 소리만 하지 보답이란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지들이 멍청한 걸 모르고서 다른 이들이 멍청하다는 헛소리를 씨부린다, 뇌가 없다, 걍 제도 자체를 폭파시켜야한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미술이란 게 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 조건은 이런 것이니 적어도 이정도의 역량은 길러낼 생각을 해던가 그게 싫으면 그냥 사회에서 사라지라는 식으로 책을 썼을 겁니다.
엘킨스 책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제 말이 틀린 것은 또 아닙니다. 다 맞는 얘기죠.
근데 엘킨스는 절대로 저렇게 얘기하지 않고, 절대로 저렇게 얘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본인이 내부인이고, 그 자신도 해당되는 일이고, 설득에는 저런 식의 비방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물론 전 철학계에 속하지만 저런 식으로 비방하죠…)
엘킨스는 무지성 창조 지향의 뻘짓들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물론 잘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려 들진 않습니다. 비난하더라도 교수를 비난하지 학생을 비난하진 않고요.(이것은 사실로선 틀렸지만, 올바른 선택이죠. 사실 학생들의 문제도 크거든요.)
헛소리를 공개적으로 떠드는 일에 대해서 반박할 때도, 단순히 헛소리라고 일축하지 않습니다. 미술인이라면 받아들여야할 다른 어떤 무엇을 말하고, 그 사이에서 난점이 생긴다는 것을 지적하는 식이죠. 엘킨스는 딜레마를 만들고 가능한 선택지는 결국 자신이 제안하려는 것임을 보이는 방식으로 설득합니다.
암튼 내부인으로서 내부의 개혁을 위해 책을 쓴다면 어떤 것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좋은 책입니다.
특히 미술계처럼 “합의”가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집단 속에서, 그런 전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향할 수 있는 것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이유가 있고요.(엘킨스는 교습의 맥락을 바꿔야한다고는 주장하지만, 현재 차용되는 교습 방식들은 대체로 유지하는 게 낫다는 입장인데, 이것도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죠. 뭐 실제로 더 나은 것을 주장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엘킨스가 미술계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 전제를 긍정하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읽으면서 철학을 배우는 학생들의 체험을 나는 엘킨스처럼 제대로 서술할 수 있을까라는 성찰과(이거 엄청 강점입니다…), 이런 책을 철학계를 위해 쓴다면 어떤 형태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좋은 책이고, 내부인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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