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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래프턴의 <편지공화국>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카톡


 

항상 “읽어야지 읽어야지”하면서 읽지 않고 있던 책 중에 하나가 그래프턴의 책들이었는데, 최근 그래프턴 책 중 하나가 번역되어 바로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Worlds Made by Words가 <편지공화국>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책 자체야 그래프턴 같은 대가가 쓴 작품인 만큼 매우 좋지만, 번역은 좀 많이 아쉽더라고요. 그래도 번역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르게 훑어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역사”란 주제로 흥미로울 장은 2장 3장 4장 6장입니다.

2장에서는 알베르티가 다뤄지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Historia 용례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래프턴이 적절하게 분석하듯, 19세기 역사학자들은 알베르티의 Historia을 ‘역사화’, ‘역사적 주제’ 정도로 이해하고 그렇게 번역했지만, 해당 단어를 그렇게 축소하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알베르티가 말하는 Historia가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베르티의 Historia는 어떤 것을 적절한 방식/형태/방법으로 제시한다는 뜻도 포함되고, “방법”의 철학자답게, 알베르티의 강조점은 오히려 어떤 것을 제시하는 올바른 방식/형태/방법에 있습니다.

그래프턴은 당시에 접근 가능했던 고전적인 범례들(고전적인 저작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용례들)을 분석하면서 Historia의 용례가 “역사” 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역사(서술)의 목적이 “교훈”과 “즐거움” 양자 모두에 있게 되면서 생기는 긴장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작업인 “역사”에는 사실성(역사-교훈)과 유의미성(역사서술-즐거움) 모두가 중요한데, 둘이 조화로울 수 있고 그럴 때는 문제가 없지만, 대립할 수도 있고 이 경우에는 문제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당연히도 고전적 범례 속에서는 조화만 강조될 뿐 긴장은 강조되지 않았고, 양자의 긴장이나 대립을 해소하는 모범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프턴은 알베르티를 통해서 이러한 긴장을 강조합니다.

알베르티는 분명 사실성과 진실성이라고 할 만한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역사적 증거”라는 것을 다루면서 추구하는 사실과 진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실성과 진실성은 오늘날 용어로 치면 핍진성verisimilitude(이 번역어는 언제 들어도 이상합니다만.... 대안이 없는 것 같습니다)에 가까워 보이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프턴은 상세히 다루지 않지만 제 방식대로 설명하면) 이는 로렌초 발라같은 인물에게서도 강하게 드러나는 측면이죠.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위조란 것을 증명했는데, 그러한 증명의 방식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같은 증명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현대 역사학자-고전학자라면, 당연히 해당 문서가 특정 시기에 쓰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자체를 중요시할 것이고, 파악될 수 있는 단어 사용과 문법들을 가지고서 이를 입증하는 것이 목적이지 다른 목적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발라는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그 문서는 고전 라틴어로 쓰인 문서가 아니라, 조잡하고 조악하고 천박한 라틴어로 쓰인 문서였고, 그렇기에 진실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당연히도) 위조된 것이었죠. 발라에게 있어 진실은 오직 문법적으로 완벽한, 즉 고전적인 라틴어로만 전달된다는 전제가 중요하였고, 위조 문제는 이런 전제에서 파생된 것이었습니다.(사실 그래서 증명 방식 자체도 좀 다릅니다)

발라에게서 중요한 것은 “진실=아름다운 것=고전적인 라틴어”란 구도입니다. 진리가 단순히 말의 의미를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일치할 때 밝혀진다는 생각입니다. 알베르티 또한 이런 전제가 있고, 이 전제가 중요합니다.

알베르티에게 있어 Historia는 회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고, 특정한 산문 장르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해낼 때면 언제나 다뤄지는 무엇이었습니다.(사실 그래프턴은 이런 강한 주장까지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알베르티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어떤 주제와 대상을 다루는지가 아니었습니다.(안 중요하다가 아니라, 단순히 주제가 좋다고 해서 작품이 좋은 게 아니란 의미) 그것을 다루는 방식, 즉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해내는 (올바른) 방법이 중요한 것이죠. 때문에 “설계”에 해당될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설계”란 것의 합당함은 내적인 온전함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즉 부분과 전체가 구성하게 되는 방식들이 조화롭고 완전할 때 설계는 합당하고 온전한 것이죠. 건물의 청사진, 예술 작품(알베르티는 “예술” 같은 범주를 제시하진 않았습니다만 편의상)의 계획안 같은 것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문제는 역사는 안 그렇다는 것이죠...

(역사학자라면 한번쯤 느껴봤을 감정은) 사료의 놀라움입니다. 사료는 있음직한 것과 상관 없죠... 그래서 역사에서는 저 긴장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있음직하게” 서술해도, 사료가 발견되면 바로 붕괴할 수 있는 것이죠.(여기서 있음직함은 강조할 만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 비판이 나오면서 중요해지는 기준이기도 하고, “Historia”란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역사학의 선조로 꼽히는 투퀴디데스의 서술 원리도 “있음직함”이었으니ᄁᆞ요)

 

그래프턴은 알베르티에게서 강조되지 않는 해당 긴장을 첨예화하고 이런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난 예를 3장에서 보여줍니다.(사실 알베르티에게 이 둘이 대립할 이유는 없긴 합니다. 이건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래프턴은 3장에서 트리테미우스란 인물을 다룹니다.

서지학의 중요한 시조라던가 그런 것은 여기서 별로 안 중요하고요, 그가 역사적인 역사학 위조자였단 게 중요합니다.

핵심이 되는 문제는 그의 위조가 역설적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역사학적 연구 방법”을 활용하여 역사학을 발전시킨 인물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합리적인 역사학적 연구방법”을 활용하여 위조를 감행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저 방법이 같다는 것이죠.

해당 방법의 중요성을 알았으면, 위조를 색출하고, 사실에 맞는 역사학적 탐구/서술을 수행해야할 것만 같은데, 바로 그러한 기대를 배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트리테미우스는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래프턴은 이러한 역설이 역설이 아니란 것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데(사실 이 부분이 짧아서 의도를 여기에 집중시키는 것은 좀 억지지만 전 그렇게 해석하겠습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은 트리테미우스의 진리관입니다.

트리테미우스 또한 당대의 수도사 중 하나였고, 그에게 있어 진리의 원천은 계시였습니다.

그러니 계시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진실이어야만 하고, 그러한 진실이 드러날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 그것을 채우는 것이 위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그래프턴은 이렇게 강한 해석을 하진 않습니다. 그가 중간에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20세기의 이론적인 역사학자들” 중 하나일 폴 벤느가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래프턴이 강조하듯, 트리테미우스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은 그의 신비체험-계시-진리라는 구도를 비추어 볼 때에 이해되지 못할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역사학의 가상적인 성격(사실성이 아니라 핍진성에 근거했다는 점에서)을 무너뜨렸는지가 중요할 텐데, (아마도) 그래프턴은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계기로 연대학을 꼽습니다.

 

연대학은 단순히 연대표를 작성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러드윅도 언급하는 것이지만) 연대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색다름은 여러 사건들을 공통의 시간계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그래프턴과 러드윅 모두 강조하는 것이지만, 연대학은 사소한 학문이 아니라 종합적인 학문이었고, 공통의 시간 계열에 위치 놓일 이유가 없을 신화적 사건들을, 자연적인, 역사적인, 세속적인 증거들을 총 동원하여 공통의 계열 속에 위치시키는 매우 획기적이면서도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그래프턴은 연대학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나, 패망한 이유가 결국은 “어려워서”라고 말합니다ㅋㅋ)

 

스칼리제르의 작업에서 강조될 부분은, 순전히 학문적인 비교검토를 위해 공통의 기준이 될 시간 도식을 제안했다는 것이고(“율리우스 역법 체계”의 가설적이면서도 학문적인 성격) 해당 기준에서 비교 검토를 하여 결정적인 논증(“실증적 사실 입증”에 해당)을 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것이죠. 스칼리제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었고, 그 작업의 한계도 분명했지만, 그래프턴이 보여주듯, 그런 방식으로, 다양한 근거들을 비교 검토하여 무엇인가를 알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절대 평가 절하할 수는 없는 것이죠.

 

연대학에서 흥미로울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는 핀집성을 위해 강조될 유려하고 문예적인(문학적인, 교양적인 등등에 상응할) 기술법보다, 기계적이고 적확한 서술이 중요해졌다는 것이고(“표”라는 표현방식), 이런 방식을 매개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학문”의 “방주”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정확히 말하자면 문제 해결과 동시에 이런 방식의 문제 해결 방법을 옹호하는 수사가 등장) 논의의 공통 근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논의의 공통 근거 문제 또한 그래프턴이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논쟁들을 해소하려고 하는 시도가 멜랑크톤 계열에 있었고, 비슷한 방식이 가톨릭 및 개신교 모두에게서 발견된다는....)

 

하여간 중요한 것은 ‘fact’가 “확정될 수 있을 증언” 정도의 의미로 학문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고, History 탐구/서술에서도 당연히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겁니다.(전 좀 현대적 사실 개념은 19세기에 등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는 로레인 데스턴과 피터 갤리슨의 Objectivity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17세기와 19세기의 object/fact 개념은 좀 더 체계적으로 비교될 필요가 있는 상황입니다. 해당 연구자들 사이에서 소통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핍진성이 사라졌다고 해서 핍진성의 근거가 될 논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요.

핵심이 될 논리는 “제작”입니다.

알베르티는 설계안을 실제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설계안과 작품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죠.

(재밌게도 이 간극은 private과 public의 간극으로도 묘사됩니다. 르네상스기의 작품들은 공적/공공적 성격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 설계의 원리와 공명할 제작의 원리입니다.

 

그래프턴은 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제작”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는 일을 말이죠.(아까 괄호치고 언급한 “예술” 문제가 이것입니다. ‘Art’가 “예술” 개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제작 자체를 이론적/형이상학적/학문적으로 설명하고 옹호하는 시도가 시작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역서에서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서술되지만,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하고 더욱 연구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역사도 결국 인간사입니다.

그런데 인간사가 학문적으로 연구되면서 체감된 것은 차이입니다.(범례로서의 역사에서 시대적 구별로서의 역사 서술... 이는 5장에서 베이컨적 역사 서술의 선례가 될 교회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래프턴은 주장합니다. 르네상스기에 과거와 현재의 이질성이 포착되었다는 것은 바르부르크 학파 계통의 핵심 테제인데, 그래프턴은 이를 좀 더 다양한 맥락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지금은 달랐다는 사실이 인식되면 설명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주장되는 차이는 단순히 “타락”이나 “섭리”로 퉁쳐질 수 있는 차이가 아닙니다.

역사학적인 근거에 의해 “추론”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의 차이입니다.(conjecture의 중요성을 그래프턴은 강조하는데 번역본에는 그게 제대로 잘 안 드러납니다)

역사적 조건의 차이는 타락이나 섭리로 퉁쳐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만들 설명요소들이 중요해집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풍토-지리일 것이고(이건 글래컨의 <로도스 섬 해변의 흔적들>에서도 언급되죠. 보테로가 주목할 만한 모범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가 바로 Art입니다.

 

여기서 Art는 예술 이런 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기술입니다. 바로 이 Art를 매개로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영토를 개척해낼 수 있죠. 다른 말로 말하자면 조건을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프턴은 4장에서 근대 시기에 Art의 역사들이 주목받고, 적극적으로 탐구된 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결국 “시대적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Art”이니 이것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세상?-인류?-역사?를 바꾸어왔는지를 역사서술하는 것이죠.

이러한 서술 속에서 자연사는 인간사와 결합하게 되는데, Art라는 활동이 자연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기에 자연사와 인간사가 Art를 매개로 결합할 수 있고, 그 조건들의 변천이란 관점에서 시간적으로 서술될 수 있고, 서술되어야만 하기 때문이죠.(과정이 누적적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만 서술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그래프턴 책 소개는 이렇게 마무리 짓고, 제가 최근 18세기 스터디에서 발표했던 흥미로운 사례에 접목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프턴이 자세히는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면서 서술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연대학의 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학은 종합적인 학문입니다.

어떤 사실을 확정시키기 위해서는 천문학, 지리학, 금석학, 고전학 등등의 모든 지식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저런 독립적인 학문들이 종합될 수 있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여기서의 의문은 현실적인 의문, 즉 너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의문이 아닙니다.(물론 그것도 큰 문제였다는 것을 그래프턴은 강조합니다)

더욱 심대한 의문은 그런 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게 뭔 소린가 싶을 텐데, 홉스가 제시하는 역설과 비슷합니다.

파편들은 파편일 뿐 통일체가 아닙니다. 해당 파편들이 하나의 통일체의 파편일 때만 그 파편들을 발견하고 이어 붙이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홉스가 다중은 민중과 다르다고 말하며 강조했듯이,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다고 할 때, 그것을 하나로 묶을 것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묶는다는 게 좀 중요합니다.

하나로 묶는다고 할 때 그것이 다중으로 하나로 묶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사실 현대적인 논리학에 익숙한 사람들... 집합론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하나로 묶일 근거”는 체계적이어야만 합니다.(이후 “유기체적”라고 불릴 무엇인데... 뭐 “system”도 16세기 말에 등장한 신조어고 이런 맥락에서의 의미도 있으니 “체계적”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연대학에서는 저런 체계가 주어져있었죠. 계시된 섭리입니다.(정확히 말하자면 계시된 섭리라고 이해될 수 있는 역사철학적인 구도가 될 겁니다. 성부의 시대→성자의 시대→성령의 시대로 이어지는 시대 구별법과 이런 구별법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교회론적인 질서가 좀 전제될 수 있죠)

하지만 (비코가 역설하였듯) 이교도들은 계시된 섭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게 필요하죠.

이 “다른 거”에 바로 “발생→성장→절정→쇠퇴” 도식이 들어옵니다.(이 구도도 그래프턴의 4장에서 언급됩니다)

비코나 헤르더가 이걸로 “민족”의 “역사” 혹은 “문명Art”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죠.

 

재미난 것은 바로 저 서술에서 재미난 시간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의 <입법과 법학에 대한 우리 시대의 소명에 관하여Vom Beruf unserer Zeit für Gesetzgebung und Rechtswissenschaft> (1814)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가 역사철학이었습니다.(사실 이 책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여러모로 중요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는데 번역은 살짝 아쉽지만, 뒤에 붙은 역자의 긴 연구해설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딴 거는 다 빼고 역사철학만 보자면 이러합니다.

샘도 아시다시피 근대는 “늙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타락 뿐이고 새로운 시도가 매우매우 어렵습니다.

비코도 “새로운” 과학을 주창하지만, 역사철학적으로는 이게 좀 역설적인 주장이 됩니다.(정말로 “새로운” 것이 시대를 바꿀 수 있을지가 불분명합니다. 역사철학적으로 쇠퇴의 국면에 들어선 “근대”가 새시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되지 않고, 그것이 주장될 근거도 없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입장은 루소에게서도 반복됩니다.(여기서는 좀 논쟁적일 수 있겠지만, 전 루소가 안 된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그런 책을 쓴 것이 분명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루소의 입장 자체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양가적이고 모호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양가적이고 모호함 입장 자체가 루소의 근본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이건 중요하지 않은... 하여간)

 

사비니에게서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역사철학을 제공해서였습니다.

 

사비니에게 있어 로마법은 역설적입니다.

그는 로마법 연구의 대가이고, 로마법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로마법을 역사화하고, 상대화함으로써, 여태껏 법원(법적용의 근거)으로 활용되어 온 로마법의 지위는 부정합니다.

로마법이 법원이 아니라면 로마법을 연구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남기윤 선생(사비니 책 번역 및 연구하신 분...)이 잘 밝히듯 이것이 사비니 당대의 풍조였습니다.

로마법은 고대의 법이지 현대의 법이 아니고, 그러니 법원이 될 수 없고, 그러니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게 당대의 분위기였다는 것이죠.

사비니는 이런 전제를 다 받아들이고도 로마법 연구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사비니의 근거는 로마법이 모범으로서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범은 단순히 법원으로서의 모범이 아닙니다.

사비니가 로마법이 모범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체계, 학문, 사회적 기구로서 모범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비니 및 사비니 이전 시대 로마법 연구자들이 밝혀냈듯, 로마법도 발생→성장→절정->쇠퇴를 겪은 무엇입니다. 그 중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절정에 도달한 무엇일 뿐이지요.

사비니는 바로 이 성장/발전/전개를 모범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는 고대랑 다르고 근대의 사회는 복잡하고, 법 또한 복잡합니다.

하지만 그냥 복잡하면 성장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비니는 이런 복잡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복잡성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하는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성공 사례를 알아야합니다.(흄식의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교를 해야 안다는 것이죠)

근대에 접근 가능한 실례는 로마법입니다.

그러니 로마법을 연구하고, 이에 맞춰 법(학)적 발전을 도모해야한다가 사비니의 주장입니다.

 

사비니는 근대는 단순히 노쇠한 시기가 아닙니다.

독일 민족은 하나가 된 적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발생기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이중적인 상태에서, 근대가 단순히 노쇠한 시대로 전락하지 않고, 발전과 성장의 시대가 되기 위해서는 발전과 성장을 이끌어낼 실천을 수행해야한다가 사비니의 주장입니다.

 

이런 시간감각이 좀 흥미로워서 이게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한번 추적해보았습니다.

제가 찾아낸 것은 빙켈만-슐레겔 형제의 선례입니다.

빙켈만 또한 고전을 모범으로 삼는데, 그 모범을 산출의 관점에서 보자고 주장합니다.

빙켈만은 여기서 회춘 같은 것을 직접 언급하진 않습니다만 중요한 기여를 많이 합니다. 빙켈만의 <고대 미술사> 초반부에서 빙켈만은 넓은 의미에서의 “historia”와 좁은 의미에서의 “historia”를 구별하고, 전자를 “체계-이론”으로 후자를 사실들의 서술로 구별합니다. 당연히도 체계-이론에 해당되는 것은 발생→성장→절정->쇠퇴에 해당됩니다.

슐레겔 형제는 빙켈만의 기여를 바로 저 역사적 분석틀이라고 말하면서, 저런 서술을 통해 “회춘”(젊어진다)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그리스 문학 연구> 및 역사 서술이 관련된 단편과 역사 서술의 서문 등)

 

남기윤 선생이 지적하듯 사비니도 인문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낭만주의 쪽 인물들과도 교류했으니 이런 주장들은 시대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여간 근대라는 몰락의 시대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역사철학 전개는 분명 흥미로운 것 같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역사 탐구여야하며, 그것을 통해서만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식의 사고는 중요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뭐 여기서부터 딴 얘기인데, 제가 최근 19세기 독일 정신과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저쪽에서 주장하는 자연과학-물리학vs정신과학-역사학 구도에서 역사학은 역사학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탐구 형식 일반에 속합니다. 또한 정신과학의 핵심 주장이 단순히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정신과학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고(모든 학문은 혼합적입니다), “역사학”으로 대표될 탐구법의 가능성과 효용에 대해서 검토한 것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카시러가 보통 신칸트주의를 종합해내었다고 철학사적으로 평가받는데, 초기에 논리적인 접근vs생물학적인 접근으로 갈렸던 신칸트주의 분파들도 결국에는 “역사학적인 종합”으로 수렴하고 있었다고 전 보고 있고, 카시러가 그런 수렴을 종합해낸 것 같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역사학”이 역사학 이상이란 생각은 중요한 주장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