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카톡
별 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인데, 너무 좋은 책이라 추천 겸 해서 공유합니다.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에 속하는 책인데, 분실 때문인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는 없더군요.(바흐오펜의 <모권>도 분실된 상태인데, 신청해도 안 사주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문제가 많은...)
<에밀>에서 나오는 시민vs인간 구도 등을 이해할 때, 비교연구로 참조하면 좋을 책이라고 일단 홍보하고 싶습니다.(아래부터는 본격 뻘소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단 책 자체를 약간 홍보하자면,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대를 이어받아 진행된 연구성과를 제시하는 책이라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교육학사에서 사용될 1차문헌들을 목록화하고 문헌들을 편집-출판하는데 좀 더 힘을 쏟았다면, 저자는 학계에 통용될 수 있는 일반연구를 확립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튼 아버지한테 물려 받은 범잡할 수 없는 1차문헌 목록 및 개인소장 1차문헌을 바탕으로 당파성과 무관한 학적으로 정교한 서술을 성취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당파성은 좀 얘기할 필요가 있는게, 애초에 교육학사 같은 것은 없는 분야이고, 과거의 교육학 논쟁 등에서 비롯된 도식들이 당대까지 유통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난을 위한 라벨링에서 벗어난 서술을 추구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거든요. 뭐 근데 우리나라랑은 무관하기 때문에, 전 이런 라벨링 문제, 대립 강조나 연속성에서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제 성격 상 제가 아는 것들을 바탕으로 유용하게 편집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러한 “교육”의 이론화 시도는 종교랑 관련이 있습니다.
쇨러는 코메니우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인데, 토마스 캄파넬라 같은 광신지나 베이컨도 공유하고 있는, 지식의 진보를 통한 세계의 진보라는 종교적 비전이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쇨러가 잘 보여주듯, “기사사관학교” 같은 귀족 학교에서는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실무를 가르쳤지만(피터 버크가 지적하듯, 외교학 및 외교사는 매우 이른 시기에 학과로 자리 잡는데 이게 이런 맥락이죠) 저걸 왜 가르쳐야하는가에 대한 이론은 없었고, 걍 필요성 때문에 가르친 거였습니다.
하지만 코메니우스 및 이에 영향을 받았든, 동근원적인 공통성이든 독일의 경건주의는 이론적인 이유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러한 교육에 실업교육이 중요하다는 관점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업이 무엇이고, 이게 왜 중요해졌는지는 코메니우스를 직접 읽은 제가 적당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업은 직업 교육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real에 대한 추구랑도 관련있습니다.
여기서 ‘real’이란 용어는 제가 임의로 붙인 게 아니라, 당대 인들이 이러한 영역을 가리키기 위해서 붙인 표현이고, 독일에서 ‘Realismus’나 real이 붙은 각종 표현들(Real School같은)도 이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내용적으로 반대한다기보다는 이를 가르치는 방법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사실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크리스티안 볼프의 학제를 최근 18세기 생리학 및 자연신학 연구 때문에 찾아보았는데, 걍 근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의 반대는 뭐 뻔한 구도였습니다.
죽은 언어들을 맹목적으로, 강압적으로,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문제라 이거죠.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을 대비시키고, 단어들을 외워 따라하기만 하는 것은 죽은 것이고, 살아있는 정신의 그것이 아니라는 식의 비판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대안이 중요한데, 이게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들은 죽은 자연학에 대비시키기 위해 “실험 자연학”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실험이 개념화되는데, 이는 사물 자체와 인간이 직접 연관을 맺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쪽 교육론에서는 교보재로 책보다 도구-기구들을 중요시했습니다.
자와 컴퍼스 같은 것들을 직접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하고(기하학)
송곳, 망치, 톱 등을 가지고 자연과 직접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거죠.
이런 체험 학습을 가리킬 때, 실험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이런 체험들은 활동적인 것으로, 관찰 및 조작 속에서 얻어지는 살아 있는 지식이란 게 강조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실험 속에서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을 가리킬 때 직관(독일어로 Anschauung)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는 칸트, 빙켈만, 괴테, 사비니가 사용하는 용례와 일맥상통하여 매우 흥미롭습니다.
또한 “살아있음”, “능동성”, “활동” 등은 모두 생리학적인 개념이었고, 물질과 생명체를 분리하든 연속적인 것으로 보든, 강조되는 중요한 특징이자 개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저런 도구들을 가지고, 세계와 인간이 관계를 맺어야하고, 그것이 어려울 때는 시각화 가능한 방식으로 스스로 분석하여 관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해가 주어져야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게 문제라는 게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것도 덧붙여야겠군요.(이때 도해 등을 가리키는 말로 “모형”이란 용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원어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코메니우스 및 저런 주장이 신학적이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코메니우스가 교육을 강조하며, 미래 세대에 희망을 거는 것은 정신승리의 측면도 있지만, 코메니우스가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기 전부터 교육에 관련된 저작을 썼다는 점에서 단순히 상황 논리에 따른 귀결은 아니었습니다.(코메니우스의 첫 저작부터 주입식 문법 교육의 대안이 되는 문법 교재였습니다)
종교 논쟁이 벌여질 때 누가 옳은가도 문제이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대체 저런 바보 같은 미신을 어떻게 믿는지가 이해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때문에 양쪽 진영에서 모두 서로를 미신으로 부르면서, 미신 개념 자체를 일반화하고, 미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서술이 등장합니다.
영국에서의 예를 찾자면 <미신의 자연사>가 대표적인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믿게 되는 이유들이 다루어짐과 동시에, 가톨릭 교리들에 대한 비판도 다뤄집니다.
또한 이러한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미신의 원천이 되는 악의 세력을 척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미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키워야한다는 생각도 강조됩니다.
‘정신의 발전Improvement of Mind’라는 개념이 강조되고, 이를 얻는 방법 또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코메니우스의 <세상이라는 미로, 마음이라는 천국>이나 버니연의 <천로역정; 순례자의 나아감>은 이러한 정신적 발전을 다룬 책이었습니다.
현 세상을 체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종합하고, 그 속에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다루는 책이었죠 모두.
둘은 이러한 체감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개개인이 체감 가능한 일상 속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물론 현대인이 직접 읽으면 매우 지루하고 도식적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이게 엄청나게 새로운 생생함을 제공했습니다. 프리스틀리나 프랭클린이 어린 시절 버니언 책을 보면 공포에 떨었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회고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8세기 어느 부터인가부터 저런 생생한 저술이 븅신같고 미신적인 책이 되어버린 것이죠)
암튼 독일 경건주의는 저런 관점을 받아들여서 세계/자연과 삶과 인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그리스도교-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저들의 사회개혁적 주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이쪽 조류에서 그래서 유의미한 실업 교육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이런 이중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경건주의는 신학적, 형이상학적으로 주창되는 교리(이론적 명제)에 반대합니다. 경건함이 가장 중요한데, 이는 마음-정신의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활동성)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직업이란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코메니우스 및 버니언은 이런 입장이 강했고요.
하지만 경건주의는 저들이 비판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였던 체감 가능한 신앙을 사회적으로 유통 가능한, 항구적일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냅니다.
경건하기만 하다면, 직업적인 활동을 좋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들이 구체화하려고 했던 것은 직업적인 활동 속에서 경건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였습니다.
그들은 아까의 “실험”을 여기서도 활용합니다.
자연적인 활동 속에서 직접 신이 창조한 질서를 체감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다는 것이죠.
때문에 다양한 직업 활동 사이에서의 상호의존성이나, 그 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체계를 포착할 수 있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이들의 교육 목적이 됩니다.
재미난 것은 이런 교육이 일종의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는 직업 교육을 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뭐 길드에서 알아서 가르치는 것이죠.
경건주의자들은 수도원이 독점하고 있는 쓸데없는 교육을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직업인들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고, 받는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다른 교육들을 모두 갈아엎자는 주장은 아니었고, “자연”과 “자연 탐구”가 강조되었지만, 이 또한 좀 모호한 포지션으로 교육되었습니다.
18세기의 박애주의 운동은 이런 모호성을 극복하고 선명하게 재구성합니다.
여기서 박애주의는 Phil+Anthropoi를 어간으로 갖는 조류인데, 이쪽이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인류사랑은 단순히 이웃사랑을 실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당근 이웃사랑이 들어가긴 합니다)
이들의 인류사랑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듯이”에 해당될 무엇입니다.
이들은 자연교육, 자연학, 자연사 등이 필수과목이며, 이러한 교육은 학문적으로 나가든, 직업인으로 나아가는 모든 인간이 배워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연히도 “인간사랑”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고요.
이러한 교육, 즉 자연을 알고, 자연 속에서의 자신을 아는 것은 보편적으로 교육되어야할 필수 교양이고(이들이 ‘보편 교양’이란 단어를 도입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러한 필수 교양은 보편적이며, 당연히도 보편적으로 교육되어야한다고 주장되었습니다.
하여간 이쪽에서는 항상 실험을 강조하는데, 실험은 과거의 도구 사용과 같은 의미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발전한 다양한 과학적 실험 또한 이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이쪽 조류의 특징은
1) 실업 교육에서 비롯된 유용성 강조가 신학적인 이유에서 정당한 것으로, 또한 모두에게 요구되는 규범으로서 옹호되었다.
2) 인간성이 우선인데, 이러한 인간성 교육은 필수적인 것들로서 옹호되었다.
3) 2에서 언급한 필수성은 필연성과 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즉 자연학과 경제학 같은 실용학문에 대한 옹호를 의미했다
4) 실험 속에서만 발명과 발견이 가능하다고 주장되었고, 이는 공공성 증진과 정신적 진보로서 주창되었다.
가 될 수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코메니우스나 버니언의 정신의 진보는 좀 신비로운 우화에 가까웠는데, 18세기에는 이런 흐름이 과학으로 변화해버립니다.
영국에서도 아이작 와츠 등의 인물들이 쓴 자기계발서(신앙인을 위한)도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미신의 문제는 이성의 문제인데, 이성이 제대로 각성되지 않는 것은 죽은 언어들을 공염불 외우고 있다가 이성이 말라붙어버린 탓이라고 지적하며, 논리학 및 과학을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할 필수 교양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활동이라고 옹호되었던 것이죠.(와츠의 책은 19세기에도 계속 인기를 끄는데, 패러데이는 와츠의 책을 보고 그 규범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살다보니 과학자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비국교도 과학자들은 굉장히 많은 경우 이 흐름에 속합니다. 프리스틀리는 정말 전형이고요)
이게 독일 버전으로 주창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미난 것은 신의 관점에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게 매우 오만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이를 잘 통제했다는 점입니다.
신의 초월적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오만이고 이단이 될텐데, 이들은 이것들은 노터치하고 오직 자연에 집중합니다.
자연은 필연적인 것, 필수적인 것으로서 신께서 보기에 좋으신, 그리고 인간이 그 속에 있을 이유가 있는 것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때문에 필연성과 필요성 모두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여겨졌고, 이것들을 이성으로서 포착 가능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해도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실험”에 기초한 교육, 자연사와 자연학 강조, 자연에 기초한 인간사(경제학 등) 탐구가 옹호되어 저런 특징들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발견과 발명은 인간의 임무일 수 있는 것이니, 자기계발과 세계진보의 연결지점이 될 수 있었고요.(이 맥락도 중요하죠)
근데 이 조류가 “신인문주의”(헤겔이 거두 중 한 놈)로 욕을 먹습니다.
재미난 것은 이런 비난이 매우 복잡한 맥락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이고요.
당연히 박애주의는 유물론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계속해서 질료+형상의 언어가 활용되고,
저런 실물 교육은 질료적인 것으로, 전통적인 고전 교육은 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박애주의는 이런 분리를 비판하고, 질료와 형상의 조화를 위한 교육을 제시한 거였거든요.
단지 질료를 좀 더 강조하고, 질료에 밀착해야만 진정한 형상(신이 우리에게 열어두신 앎)을 포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죠.
근데 요게 프랑스 혁명 맥락과 결합하자 바로 문제가 됩니다.(재미난 것은 프리스틀리도 완벽히 동일한 이유에서 영국에서 쫓겨납니다)
질료적 앎, 물질에 대한 앎을 강조하며, 이에 기초한 형상을 강조하고, 스스로의 탐구를 강조하는 것은 당근 개혁-혁명 가능성 옹호였습니다.(이건 데카르트 시대, 장미십자회의 구도이기도 했고, 코메니우스나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로 여겨지곤 했던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습니다. 앎으로 뭔가 가능하다고 떠들면 “너님 장미십자회 이딴 거이심?”이란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냥 수학을 잘해도 의심 받았고요)
그러니 저기에 대해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견제의 언어는 형상 강조일 수밖에 없었죠.
쇻러(이 책 저자)가 잘 밝혀주듯이, 그래서 신인문주의 세력은 중상모략을 섞어가며 박애주의를 비난합니다.
저들은 형상을 모르고, 형상을 부정하고, 형상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죠.
또 이런 비난이 잘 먹힐 수밖에 없는 게, 박애주의가 제시할 형상, 고정점, 세계 이해는 구체적이지 않았거든요.
“세계 이해”, “세계에 대한 관점” 등을 언어화하고 이를 강조한 것은 물론 박애주의였지만, 스스로 깨우친다는 전제와 능력 부족으로 비전이 구체화된 적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발달 순서에 맞춰, “심리적인 연쇄” 속에서 가르쳐야한다고, 자연적인 것부터, “단순하고 고귀한”(얼마 전 얘기한 자연성이 단순함과 숭고와 엮이는 맥락이 그대로 반복되고 빙켈만의 언어가 선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것부터 가르쳐야한다고는 얘기되었지만, 전체상은 제대로 제시되지 못했고, 지지자들도 엄청 비판합니다.(처음에는 모두 열광하다가 성과물을 보고는 다들 비판했다고 쇨러는 서술합니다)
그런 상황이니 “종합적 체계”가 부재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합당하고, 이걸 좀 뻥튀기해서 그들은 유물론자고 그래서 문제라고 비난하는 것도 대충 들어맞는 말이 되었던 것이죠.(이게 20세기 중반까지 당연시되어서 문제였다가 쇨러의 문제의식 중 하나지만요)
암튼 그렇게 박애주의는 유물론, 프랑스적인 것(심지어 표현이 “골적인 것”입니다. 피에르 세르나가 보여주었듯 제3신분 중심 사고에서 프랑스 민족은 골족으로 표상되곤 했었는데-귀족과 사제는 순수한 골족을 탄압하는 외국인으로서 표상- 이게 독일에서도 유통되고 있었던.... 놀랍습니다)으로 여겨지며 혐오의 대상이 되죠.
뭐 암튼 재미났던 것을 풀어보았는데....
저쪽 박애주의랑 루소가 엮이는 부분이 많습니다.(책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박애주의는 루소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시민이냐 인간이냐가 양자택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둘이 조화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도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죠.(진정한 유용성 인식은 자연 교육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박애주의 비판자들은 저들이 루소와 다르지 않으며, 시민이 아니라 야만인을 기르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요런 구도에 얽혀 있는 여러 문제들이 꽤나 상세하게 다루어져있으니... 프랑스에서 나온 해당 주제 연구서를 볼 때 비교 대상으로 볼 만하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그리고...
이 책에서 사용되는 철학 용어들이 많은데, 정말 유용한 용례를 제공해줍니다.
전 열심히 과학사 연구하면서, 철학 용어들의 구체성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이쪽 맥락으로 오니 걍 구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직관, 실재적인 것, 사물 자체, 사물에 대한 인식, 활동(손 사용의 중요성도 강조됨), 합목적성 등에 대한 매우 좋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용례들이 등장합니다.(추상성은 구체성 속에서만 획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다루어지니 당연히....)
엄청 좋더군요. 추측만 하던 게 사실로서 작동하는 광경을 본 기분입니다.
고고학의 역사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다른 필드 연구서들을 주기적으로 봐줘야하는 것 같습니다...
이쪽에서는 추측에 불과한데, 저쪽 업계에서는 확립된 사실이고, 그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수많은 연구성과로 제시되거든요... 암튼 멋졌습니다.(지루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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