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책이다. 관련해서 본 책들 중 가장 종합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이 책의 저자.
“일본저술가들의 전형적인 문제”를 극복해낸 캐릭터로 보인다.
내가 자주 주장하는 것이지만, 특정 문제에 대해서 전체를 다루겠다고 덤비면 아무 답도 내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자신이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에 맞게 주제들을 단순화하는 게 필요하다.(보통 내가 “감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것)
그런데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단순화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나 브뤼노 라투르 등이 항상 범하는 문제는, 단순화할 때 헛짓거리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되지 않게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근대가 비대칭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한다거나, 홉스가 실패해서 근대 과학이 문제라는 연구서를 토대로 근대 과학의 전형으로 홉스를 내세우며 근대 과학을 비판하는 짓거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조금이라도 해당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 되니, 결국 단순화를 통해서 얻을 이점보다 잃는 것이 많아 진다.
때문에 단순화를 할 때, 본래의 맥락들을 고려하여 단순화해야한다. 다른 말로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되겠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일단 자기가 다루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 이 사고가 작동하기 위해 요런 작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네?”라는 감각이 필요하단 얘기다.
저런 작은 문제들이 많기에 이를 처리해줄 수 있는 신뢰도가 높은 믿음 구조물을 자신의 사고 구조물 사이 사이에 배치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문제와 문제해결을 아웃소싱한다고 해야하나? 맥락화하여 다른 학문들과 접속한다고 해야하나? 하여간 그런 게 필요하고, 이를 “잘” 해야한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렇듯 “잘” 하는 게 어렵다.
적재적소에 무엇인가를 배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배치하냐도 꽤나 중요하다.
보통은 자신이 아는 걸 그냥 배치하는데, 그러면 망하기 쉽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이상해보일 수도 있고, 신뢰도가 낮아서 문제 넘기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보통 이런 문제 넘기기를 외주 맡기는데, 문제 해결을 해줄 다른 무엇이 없을 때 그런 사고 구조물을 만드는 게 보통 유명 철학자들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저자 또한 반복해서 지적하듯) 맥루헌 같은 놈은 약간 약팔이 같은 이미지를 풍기며 학자들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무엇이니 이를 쓰는 건 위험한 일이 된다.
믿음을 주어야 문제를 넘어갈 수 있는데, 오히려 의심을 주게 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약팔이나 인용하며 대충 문제를 뭉겐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는 얘기다.
<정보사회의 철학>의 저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정확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넘겨야할 문제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이에 필요한 것들을 꽤나 세심하게 선택하여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일본 저자들은 아이디어와 필요한 무엇까지는 꽤나 잘 의식하지만 마지막에서 개븅신같은 짓거리를 해서 약팔이가 되는데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미난 것은 저자가 이를 꽤나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학자와 지식인을 구별한다. 학자는 학자들을 위해 실천하고, 지식인은 좀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행위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실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정보사회의 핵심 키워드는 소통이니 당연히도 지식인이 중요하게 볼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뭐 둘 다 중요하단 주장을 하지만, 결국 지식인의 씹을 거리 또한 학자들의 생산물이기에 학적인 것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학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본인이 맥루헌과 가토 슈이치를 대표인물로 꼽은 지식인이면서 학자인 그룹에 본인을 귀속시키고, 이에 합당한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재미난 것은 저런 의식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일본인들이 딱히 더 멍청할 이유는 없다.
일본인이 이상한 약팔이 사상가 경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독자 수준이 문제일 수는 있겠지만, 뭐 그건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이며,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합의와 인정이 가능한 세계이니 딱히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참고로 우리나라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와 인정이 불가능한 그런 곳이다. 나는 보통 이걸 “모델하우스” 학계라고 표현한다. 집 같아 보이지만, 가스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주거 기능이 부재한 집이란 얘기다)
문제는 꽤나 단순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냥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정보사회의 철학>을 보며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참고문헌이 방대하다가 아니라 참고문헌 중 매우 많은 것들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공지능에 대한 실용서 뿐만 아니라 학술서 및 이론서가 엄청 많이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저런 책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고, 이에 대한 논의가 자국어로 진행되고 있으니 제대로 된 맥락화가 가능해진 게 아닐까한다.(뭐 번역된다고 꼭 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 헤블록, 스넬, 도즈가 모두 번역되어 있지만, 그걸로 논의를 나누려는 고전학-고대철학 전공자를 난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방구석 폐인이라 못 만난 것은 아니다. 국내에 관련해서 그래도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는 기껏해여 두세명이기 때문이다)
번역된 책들을 통해 일어난 반응을 참고하면, 자신이 어떤 것을 문제 넘기기 장치로 삼았을 때 어떤 반응이 날지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꽤나 신중하게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예상되는 반응을 뒤집는 방식의 선택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맥루헌과 루만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오히려 가치전도의 장치로 삼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매우 훌륭한 저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취향도 좀 있었다.
희랍어, 라틴어, 불어, 독어, 영어 등을 엄청 섞어서 병기를 하던데…
일본은 이런 게 좀 먹혀서 이런 짓을 하는걸까?
뭐 나도 저런 걸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데(해당 언어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뭔가 얘기하다보면 고대 철학의 용어들을 검토하게 된다. 존재의 근원 어쩌구 하는 븅신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게 실제로 논의된 적 있으면서 흥미로운 논의거리를 제공해서다) 그래도 저런 건 좀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저게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괜히 전공자들이 지랄염병하면 귀찮고, 듣는 사람들이 좋아할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정말 열심히 요상한 용어들을 쓰기에 좀 놀라울 따름이었다.(fur uns 같은 것은 진짜 맥락적으로 애매할 때도 열심히 써서 좀 신기)
저게 먹히나? 암튼 좀 신기하다.
뭐 그래도 정상인이란 생각은 든다.
본인이 뭘 하는지를 의식하고 있고,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의식하며 도움이 될 장치들을 공수하여 배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루만의 논의 자체는 규범성과 무관하지만 이를 토대로 규범 확립 전략을 짤 수 있다고 지적하며 아감벤과 네그리의 반성없는 규범 제시에 극딜을 먹이는 것을 보며 “이 새끼는 뭘 좀 아는 구나”하였다.(3장 주석 22 내용)
마지막 정보사회의 윤리가 좀 맘에 안 드는데 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말해 이런 식으로 윤리학들을 비교하며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기본 접근은 내가 맨날하는 가능성 중심의 윤리라 동의가 가능한데, 이걸 이런 식으로 옹호하는 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윤리학적인 앎이 모자란 것이 아니기 때문.
윤리적으로 문제되는 짓거리를 정말로 윤리적 성찰이 부족해서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본인은 멍청한 사람이니 나대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 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그냥 상식이 없고 븅신 같은 식으로 대충 일들이 진행되어 생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가치 자체를 확립하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에 맞게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생긴다.
대표적인 게 교육이다.
창의적 인재 육성. 이게 목표가 아닌 나라가 있나?
재미난 것은 그 어떤 나라도 창의적 인재 육성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창의적 인재 육성의 방법이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그걸 하는 게 정치가들에게 큰 이득은 되지 않고, 그런 걸 해내려면 졸라게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해서 그런 것이다.
좋은 제도로 개혁하는 것은 그래서 힘든 것이다. 총대 멜 사람이 없고, 웬만해서는 메도 성공할 수 없으니 더더욱 아무도 안 하는 것이다.
뭐 저런 사람이 있으면 방해는 안 해야할텐데, 걍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많아서 안 되는 것이기도 하고(멍청하거나 탐욕스럽거나 둘다이거나), 말로는 떠들면서 실제로는 관심 없는 사람 뿐이라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뭐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그래도 체계적으로 창의적 인재를 탄압하고 고사시키는 제도는 개선하자 정도인데, 이것조차 안 되니 할 말이 없다.
(뭐 국내 학자들이 입으로는 연구 환경 어쩌구 하지만 정작 연구 환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고 떠드는 것과 같다. 한국이 규모가 작아서 어쩔 수 없다는 지식사회학적인 상식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헛소리를 꽤나 알려진 학자들이 떠들고 다닐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튼간에 정보사회의 윤리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잘 하면 된다.
법칙주의가 문제인가? 문제라면 문제이다. 뭐든 법칙으로 환원하는 놈들이 있으니까.
근데 걔들은 뭘 주장해도 븅신짓을 할 멍청이들이다.
법칙주의를 따라서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이 병신이고 윤리적 책임의식이 없고, 역량이 부족해서 문제인 것이다.
최근 나온 <나노기술의 미래로 가는 길>도 비슷하다.
거기에서도 지적되지만 걍 나노기술에 대해 이해도를 높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면 될 문제이지,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게 새롭다면 사실 모든 윤리적 실천이 새로운 것이다. 하늘 아래 똑같은 실천은 없으니.
하여간 이건 굳이 꼬집어 본 얘기다. 관련해서 플로리디 같은 놈이 이상한 소리한 걸 까고 싶은 것도 당연한 것이니 저자가 딱히 문제적인 짓을 했단 생각은 안 들지만, 정말 지루했다는 얘기가 되겠다.(생각해보면 앞에 기존 윤리학과의 비교가 지루해서 그렇지 책 구조상 해야만 할 얘기를 한 것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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