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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로베르 에르츠 <죽음과 오른손>

이하 카톡 복붙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일단 에르츠의 <죽음과 오른손>은 좋은 책이긴 한데....

약간 설명이 많이 가미 될 때에만 좋은 책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 책 자체는 별도의 단행본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라 생전에 출판한 논문 두 편을 합쳐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덕분에 분량도 짧고 난해한 책도 아니라 읽기에 참 좋아요.

읽을 때 재미를 주는 편이고요.

하지만 현대의 연구자가 볼 때 좀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 현장 지향적인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현장 지향적인 연구자지 지금 기준에서도 현장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당대에는 현장 경험이 있고, 매우 다양한 민족지 연구를 비교하는 에르츠의 작업은 (현장적으로) 착실한 것일 수 있겠지만,(이 사람... 주석이 장난 아닙니다. 두 편의 논문에 400개 가량의 주석이...ㅋㅋㅋ) 이 사람의 비교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양한 현장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과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거든요.

또한 지금처럼 세부 연구가 많이 된 상황에서 이 사람의 연구는 굉장히 기초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루는 죽음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방주네프나 터너의 연구가 훨씬 더 상세하죠. 이 사람의 연구가 방주네프의 연구를 가능케 했다는 것은 분명하겠지만(사실상 통과의례개념을 이 사람이 만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죽음 분석할 때, 죽음을 다루는 의례에서 관찰되는 바가 출생, 혼인, 성인식 등의 전이를 다루는 의례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된다고 주장하거든요. 이를 한 묶음으로 언어화하진 않는데 사실상 통과의례 개념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방주네프 연구를 보면 되는 거지 이 사람 연구를 볼 이유는 없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볼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당연히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은 얇기 때문에 루만의 <신임보스의 사회학>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거겠죠.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이유는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신임보스의 사회학> 같은 역할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재미난 물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임보스의 사회학>은 총체에 대한 부분이되, 총체를 감축/축약/압축된 형태로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비로운 점은 저게 어케 가능한가죠.

부분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닌데, 전체 같은 역할을 해주는 부분이란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거든요.

오늘날에는 물론 전체도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란 정보이론적 개념이 동원될 수 있겠지만, 그건 오늘날에 당연해진 언어고 저 시대에 당연한 것은 아니었죠.(심지어 오늘날에도 저 개념이 상식으로 여겨질 만큼 언어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도 아니죠)

하여간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전 이게 문제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문제 만들기, 문제 인식하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문제라고 하면 그저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니...)

<신임보스 사회학>이 감축 경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책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다만 문제가 전체를 다루는 것에 비해 복잡하지 않거나(루만의 경우가 이렇죠. 사회 전체로 보기보다는 특정 문제로 보니 훨씬 쉬워집니다), 아직 그 문제를 다룬 적이 없어서 세부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을 때,(에르츠의 경우가 이렇죠. 이때는 아직 이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 없으니까요) 그 때 해당 책이 감축 경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원래 물음으로 돌아오죠.

그럼 에르츠의 책이 왜 좋을까요?

단순히 감축 때문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 문제가 원래 무슨 문제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좋은 책입니다.

한 수학자가 틈틈이 오일러의 논문을 읽는 이유로 밝힌 것도 이것이죠.

어찌보면 그건 시간 낭비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해결된 문제이거나 이미 오류로 판명된 문제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저 수학자는 다시 돌아가는 게 유의미하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처럼 수학 문제가 복잡해졌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원래 무슨 문제였는지가 바로 그 논문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요.

에르츠의 책은 지금은 너무 세부까지 연구되어 보이지 않게 된 문제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책입니다.

다만 그렇기에, 앞서 말했듯이, “설명이 가미되어야만 좋은 책일 수 있습니다.

 

 

 

 

일단 이 사람의 서술 방식을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정확히 설명하려고 하는 구도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좀 논리적, 혹은 이론적, 혹은 구조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술되는 것은 에르츠가 연구한 현장인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과 마오리족의 생활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파악해낸 일반적인 구조를 이해시키기 위해 해당 활동들을 활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목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지들이 동원될 때 공통점만을 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부적으로는 매우 다를 수 있고, 깊게 해석하면 당연히도 대립할 수 있는 그런 사례들이 일반적인 경향을 표현하는 증거로서 제시되는 거죠.

이런 서술 방식 때문에 후대 연구자들에게 좀 공격을 당한 것도 같은데, 사실 저런 공격은 좀 무의미한 것이라 전 생각합니다.

이 사람도 분명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해당 의례의 의미가 본인이 설명한 것과 매우매우매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공통성으로서 비교하는 일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는 감행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해당 의례의 의미따위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사람은 해당 의례의 상징적인 의미나, 해당 의례의 기능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집단표상, 혹은 구조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아마 여기서 좀 ???가 나올 거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좀 이것저것 맥락을 얘기해야합니다.

 

일단 이 사람이 집단표상을 다룬다는 것은 뭐... 본인이 계속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게 당연하지 않다는 게 중요합니다.

 

집단표상은 당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엄청 논쟁적인 개념이었고, 지금도 그런 개념일 겁니다.

우리는 저런 시도에 익숙해져서 저 개념을 사용하는 거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을 뿐이지 저 개념이 논쟁적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먼저 저 개념이 나온 이유를 설명해보죠.

이건 미독이 자주 지적하는 단위체 인식의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제가 최근 통계학사를 보다가 정치 산술언어에 대해 고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정치의 단위체를 국가로 생각한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17세기부터 논쟁적이었더군요.

왕과 같은 대표로 환유해내면 쉬운데, 그걸 거부하니 할 방법이 없어진 겁니다.

분명히 경계는 있는데, 도대체 경계를 만드는 게 무엇이고, 내부의 단일성을 포착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뭐 그래서 경계 만들기로 이해관계-공공선이 제시된 것인데, 이건 반쪽짜리 답입니다.

내부의 단일성, 국가의 자의식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입죠.

물론 의회 같은, “정부가 자의식을 만드는 기관이란 것은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저들이 그런 기관이기 위해서는 지각할 수 있어야하는데, 지각하는 대상과 방법이 무엇인지가 문제였습니다.(전 이런 식의 흐름을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거 완전 당연하지 않습니다. 17세기 공화주의 언어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발전한 덕분에 당연해진 것일 뿐 당시에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언어가 발전한 뒤로는 당연해졌죠. 대안 언어도 마땅치 않았고요)

이 때 후보로 나온 게 이나 문화같은 거였죠.

이런 후보 중에 도 있었고요.

 

지금 여기서 정치 산술의 언어를 설명할 이유는 없으니 넘어가죠.

중요한 것은 19세기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그래서 저런 가능성들이 검토되었던 것이고요.

(여러 가능성들이 제시되었는데, 전 두 가지만 주목함으로써 문제를 명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통계를 통해서 파악되는 수로 사회를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케틀레의 사회학physique sociale”입니다.(‘physics’를 단지 물리학으로 번역하면 좀 문제적입니다)

여기에 반대한 것은 바로 콩트고 그는 본인이 만든 ‘physique sociale’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sociologie’로 갈아타게 되는 거고요.

 

콩트는 하여간 통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수들이 어떻게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지가 당시에는 제시된 적이 없기 때문이죠.(이게 제대로 제시되는 것은 회귀개념의 등장 덕분인데 이것이 제가 보는 <통계학의 역사>의 저자 스티글러가 말하는 진정한 통계학의 등장 시점입니다. 다만 저 회귀로 사회의 총체가 바로 포착되진 않습니다. 저걸 시도한 사람이 골턴인데, 골턴이 생물학주의, 사회진화론을 신봉했던 덕분에 단순한 방식으로 총체화가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을 뿐인 것이죠. 지금은 자본-교환으로 총체화가 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총체에 대한 접근인지는 괄호치자면 말이죠)

콩트는 나름 대안을 고민합니다만 구체적인 답변은 제시한 적 없습니다.

하여간 관념(이념?)이 그런 역할을 하고 그래서 종교가 중요하단 소리에서 끝났죠.

 

뒤르켐이 이걸 발전시키는 겁니다.

그는 일단 총체문제와는 상관없이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인 인식들과 이로부터 결과지어지는 패턴들만을 연구했을 뿐입니다.

이 패턴이 총체의 패턴일 이유는 없었고요.(초기 뒤르켐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라고 전 생각합니다)

뒤르켐은 본인의 연구를 발전시키면서 방법론도 발전시키는데 그러다가 문제적인 지점을 마주합니다.

구체적인 인식들은 어떻게 비슷할 수 있는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었거든요.

아마도 뒤르켐은 초기에 통계적인 변칙들이 통제된 경향성으로서의 동일성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케틀레의 평균인처럼 통계적인 분포로 동일성이 확보되는 것이라고 유추했겠죠.

하지만 이건 설명일 수 없습니다.

뒤르켐이 보여준 것처럼 집단마다 저런 인식이 다릅니다.(<자살론>에서는 종교에 따라 달라짐)

저런 집단구획하는 것부터가 그래서 근거 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을 평균으로 설명하면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인식을 담보해줄 평균은 또 다시 인식으로 담보되는 거거든요.(가톨릭과 개신교도의 차이는 평균의 차이인데, 그런 평균의 차이를 포착하게 할 근거는 가톨릭과 개신교도라는 사실의 차이가 되고, 그 사실의 차이는 다시 평균의 차이가 되는....)

 

뒤르켐은 그래서 인식론적 문제, 범주의 문제에 몰두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뒤르켐의 선택이고 에르츠도 그 선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에르츠가 직접 얘기하듯, 이것을 선험적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경험적으로 해결하는 것 모두 한계가 큽니다.

여기서 경험적이란 말은 좀 더 해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적인 접근은 저런 인식 문제를 매우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인식이 합리적이면(도움이 되면... 즉 위생적으로 도움이 되니 시체를 분리시켜 보관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합당하다는 식)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고, 저런 인식들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굳이 왜 저러는지를 이해하려하지 않는 것이죠.

이런 문제는 프로이트가 지적한 것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터부는 합리성과 무관합니다. 불에 손을 넣지 말라는 터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이유도 없고, 그게 터부라고 주목할 이유도 없습니다.

연구자들이 터부로 주목하는 것은 그게 비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이거나 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헤르츠는 여기서 재미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본인이 제시하는 이런 의례는 귀찮고 힘들어서 의례를 간소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간소화 경향이 있음에도 이렇게 귀찮고 힘든 의례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사실 최초의인류학자라고 불러도 될 조셉 뱅크스가 타히티 원주민들에게서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타투 문화인데, 문제는 타히티 인들도 이유를 잘 모르면서도 그 귀찮고 괴로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뱅크스는 타히티 인들의 설명이 오락가락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설명이든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에 근거해서 타투 문화는 자기의식적인 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이상한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당근 본인은 대안을 제시한 적 없죠)

 

헤르츠는 바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사회라고 생각했고, 사회의 집단표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죽음 같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헤르츠는 동일한 사고가 당연히 반복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바로 그 반복재생산에 주목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지점에서 그러한 차이화를 억압하는 기제, 차이가 있는 생각들의 차이를 은폐하거나 그러한 차이를 흡수하는 기제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죠.

이러한 기제는 단순히 기능의 영역도 아니고, 단순히 사고의 영역도 아닙니다.

논리-규범에 가까운 영역입니다.

당연히도 다를 수 있는데(필연적이진 않은), 그럴 수 없게 하는 것(규범)이기 때문이죠.(여기서 규범이 꼭 선악 구도로 이해될 이유도 없고, “좋음이라는 보편 표상과 결합될 이유도 없습니다. 규범은 원래 이유 없이도 무엇인가를 통제합니다. 이유에 근거해서 통제되는 것은 규범들 중 도덕이라는 특정 부분에 불과합니다)

 

헤르츠의 서술은 저런 영역의 존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저것이 왜 생물학적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는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합리적인 추론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는지를 보이면서 저 영역에서 고유한 논리 전개(양극성에 기초한 논리 전개)가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게 주된 목적입니다.(사실 세진 샘의 <성적 결합관계와 가족의 형태들>도 딱 이런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논문이죠... 반복되고 있습니다....)

환원에 대한 반대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고유 논리는 입증이라기보다는 예증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저러한 의례 방식들을 서술하면서 내적 논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죠.

(다만 이것이 입증되는 수준은 아닙니다. 내적 논리를 정확히 규정해내진 않기 때문이죠. 레비-스트로스는 이걸 해낸 것이죠)

 

 

 

이런 영역이 존재하고 내적 논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인류학적이지도 사회학적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에르츠는 저것이 사회를 매개로한 활동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집단표상 개념을 통해서 가능해지고, 근거 지어집니다.

집단표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전제할 때, 그것이 기이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저런 의례의 지속성과 내적 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관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집단표상의 실재를 증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로 저 구조를 경유한 실천들 속에서 집단표상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동일한 구조의 반복재생산, 사회의 반복재생산일 수 있게 됩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가 단일한, 하나의 의미로서 제시될 이유는 없습니다. 세진 샘의 최근 논문에서 주장된 것처럼, 저런 총체성 생산의 기제를 통해서 총체가 생산/재생산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고, 그렇게 생산/재생산되는 총체들은 여러 가지일 수 있고, 그것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에르츠는 여기서 다양한 유형을 제시하고 비교하는 것을 요구하진 않는데, 이는 그가 이 영역이 연구될 수 있다는 것과, 이를 양극성과 인식될 수 있는 변화들에 주목하여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기 때문이지 단일 총체의 신화에 근거했기 때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애초에 모스의 증여-교환에 기초한 총체화와 다른 방식의 총체화를 연구하고 있고, 그렇다고 모스의 방식을 비난하기보다는 여러 사례들을 비교할 때 잘 써먹고 있는 걸 보면 이 사람은 다형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저런 설명을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의 유의미성이 모호하기 때문이죠.(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가 가진 모호함 같은 것입니다)

내적 논리가 규정되어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적 논리가 규정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이 설명이긴 어렵습니다.

내적 논리가 공고해도 여러 선택이 가능하고, 그러한 선택들 하나 하나를 설명하는 것은 내적 논리일 수 없으니까요.

또한 에르츠는 저런 의례들이 집단성, 집단의식, 집단적 정체성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에르츠는 저런 전이 과정 속에서, 집단에서 집단으로의 이행이 인식되고, 그러한 이행을 가능케 하는 작용을 내적 논리가 표현하고 있다 정도까지만 주장합니다.(사실 이것이 바로 이 집단을 전제하기 때문에 집단표상의 한 방식일 수 있고, 총체성 생산의 한 방식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에르츠는 이걸 분명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사실, “이행을 가능케 하는 작용을 내적 논리가 표현한다고 할 때, 이 표현의 의미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저것이 설명인 걸까요?

신화가 설명을 한다는 고전적인 주장은 바로 이것과 같습니다.

분명 저런 방식으로 무엇인가가 성취됩니다.

그런데 저 성취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부를지가 애매한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설명입니다.

정신적으로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는(사실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그런 문제들의 긴장을 관리(해소할 수도, 아니면 보전할 수도 있습니다. 해소만이 관리는 아닙니다)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다만 저걸 설명이라고 부르는 순간, 현대적 설명개념이 대비되고 저게 무슨 설명이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프레이저를 비롯한 수많은 신화 연구자들은 저것이 어떤 의미에서의 설명이란 것은 확신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해내진 못했습니다.

 

이 문제는 현대에도 해결된 상황은 아닙니다.

아까 레비-스트로스의 모호함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문제거든요.

레비-스트로스는 <구조 인류학> 시절에만 해도, 저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해 세대의 혼란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신화적 해답을 찾는, 대지에서 태어났는가 아니면 부모에게서 태어났는가 하는 인간 기원의 미결 문제,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에 관한이야기일 수 있다고 분명 얘기했거든요.

(프롭과 프롭의 영향을 받은) 토도로프 또한 저것이 어떤 의미에서 대답이라고 말했었고요.(토도로프는 저게 이야기/서사의 근본적인 목적이자, 기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저것이 어떤 의미에서의 대답인지, 그런 의미가 하나인지 여럿인지는 현대에도 아직 해결된 상황은 아닙니다.

 

터너는 저런 대답이 삶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의미/가치를 부여하는 데 주목합니다.

하지만 모든 의례가 현실감과 의미/가치를 제공해주는 것은 또 아니거든요.(물론 터너는 그런 것을 제공하는 의례/신화/구조만을 규범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런 작용이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욕망(정확히는 충동)을 매개로한 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프로이트의 진정한 기여가 저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요.

다만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답변일 뿐이죠.

언제나 그렇듯 결국 의례/신화/구조의 어떤 측면에 주목할지를 보는 게 중요한 것이고, 여기에 단일하고 유일한 정답을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것이라 전 생각합니다.(중요한 것은 결국 현대에도 정답은 없는 상황이란 것입니다)

 

다만 에르츠는 여기서 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저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거든요.

또한 신화에 대해서도 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저런 의례적 활동, 굉장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내적 논리가 분명 있는 저런 활동들이 신화와 관련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만, 그런 신화는 사제들이나 아는 것이고, 그게 꾸며진 것인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에 대해서는 괄호를 쳐버립니다.(좀 모호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건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면서도, 그것이 거짓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정도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사실 에르츠가 진정으로 연구해야할 대상에는, 그가 주목하는 내적 논리가 발견되는 가장 좋은 소재는 바로 저 신화기에 에르츠의 이런 태도는 한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에르츠는 바로 저 사회”, “구조”, “집단표상”, “사회적 삶의 영역은 제시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에르츠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고, 저게 하여간 중요한 영역이란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저런 걸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한 주장이고요, 에르츠는 저런 영역의 존재와 함께, 그것을 연구하는 맥락을 압축적으로, 유의미하게 전달하고 있기에 충분히 훌륭한 연구를 수행한 것이라고 전 평가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저 문제를 다룬 것이 단순히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 따위를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 통과 의례 일반을 포착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집단표상사회연구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저 접근을 할 때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안 보이는지(과거 연구를 볼 때 오히려 무엇이 안 보이는지가 잘 보입니다...)를 알 수 있다는 점 등 이 책은 현대에도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물론 짧다도 중요한 이유입니다ㅎㅎ

 

 

마무리 하기 전에 세진 샘의 최근 논문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고 싶군요.

세진 샘이 최근 <알랭 테스타의 진화주의: 프로그램, 유형학, 실습>이란 논문을 내셨는데, 이 논문에서 제시되는 테스타의 방법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게 많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고, 이는 유형화라는 활동에 기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테스타는 저것을 사회인류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연구하는데 에르츠를 통해서 저런 접근과 다르면서도 상보적일 수 있는 접근을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즉 문화인류학적인 방식의 접근을 포착해낼 수 있단 얘기입니다.

테스타는 설명에서 분명 사고의 측면도 활용하는데, 활용에서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논문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짐작하기로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토테미즘을 세계관과 등치하는 것 따위는 현명하지 않거든요.

구체적인 사고 조직선(organization의 경로, 시퀀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들로서 토테미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거든요.

하여간 이런 부분에서 테스타의 접근과 이런 문화적 접근을 종합할 필요가 있고, 그런 차원에서 두 시도를 겹쳐 읽는 것은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테스타가 19세기 인류학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런 것도 사실 이런 맥락과 관련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