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카톡 복붙
이거 관련해서는 담에 만났을 때 말로 전달하려고 했는데, 언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글로 쓸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 한번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제가 이번에 참고한 책은 마이클 해트와 샬럿 클롱크가 쓴 <미술사 방법론>이란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미술사 입문서 중 하나입니다.
이 책 자체도 꽤 괜찮은 책이고, 어제 같이 얘기했듯이, 개론서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책 관련해서는 그 시각을 좀 확장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저자들이 괜찮은 사람인 것과 별개의 문제인데, 이 양반들이 다루는 19세기 (독일) 미술사는 신칸트주의란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들이 몇 번 언급은 하지만, 이 저자들은 신칸트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가 깊진 않고, 정신과학이 왜 문제이고 이를 학문으로 다룬다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좀 더 큰 맥락 속에서 미술사의 역사를 이해하면 더욱 흥미로운 점이 있고, 이것이 인류학과 통할 부분이 있기에 그런 부분을 정리해 공유하려 합니다.
일단 미술사에서,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난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19세기 미술사가들처럼) 이는 생물학적, 고생물학적, 비교해부학적인 은유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다뤄지는 대상은 개체 차원, 종 차원, 유 차원으로 이해해보죠.
개체란 것은 개별 작품에 해당됩니다.
종은 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유는 좀 복잡합니다. 작가가 속한 무엇인가가 되죠. 그것은 “시대”일 수도, 지역적 화파일 수도, 아니면 화풍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어떤 사회적인 무엇인가가 될 것이죠.
문제는 저것들을 어떻게 포착해내고, 저것들을 어떻게 연결하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 차원들은 고유하면서도 서로를 밀어내는 성질이 있죠.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작품의 특유함으로 이어지는 게 정상이고, 이는 작품을 다른 것들로부터 이탈 시키는 성향으로 이어지죠.
작가 중심으로 보면, 작가의 천재성이 강조되겠죠.
유적으로 접근하면 앞의 저 둘은 그저 사례에 불과하게 됩니다.(뵐플린의 그 유명한 “인명 없는 미술사”가 그 이상이죠)
하지만 저것들은 다 연결될 수밖에 없고, 저것들을 연결하면서도 그 개별성을 확보해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더욱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는데, 미술사의 연구 대상 자체는 개별 작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런 세 차원의 문제는 모두 특정 작품 속에서 다루어져야만 합니다.
즉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어떤 것은 사회 차원의 것이고, 어떤 것은 작가 차원의 것이고, 어떤 것은 작품 차원의 것임을 제시해야하는 것이죠.
이러한 제시는 우리 눈에 포착될 수 있는 figure를 통해서 제시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figure는 임의적인 게 아니라 유형적으로 포착되어야하죠.
그림 속에 있는 특정한 형태 요소들을 구별하여, 어떤 형태들이 어떤 차원에 속할 문제인지를 구별해야합니다.
이런 구별의 좋은 예는 모렐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렐리는 감식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손이나 귀처럼 중요하지 않은 부위들을 그리는 방식을 가지고 작가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런 세부 요소를 그릴 때, 작가의 버릇 비슷한 게 있다는 것이죠.
사실 이런 주장은 모렐리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 본인이 모렐리를 그렇게 해석했고, 모렐리는 사소한 것의 중요성을 포착해낸 인물로 여겨졌죠.
하지만 모렐리 본인의 입장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모렐리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사실 두 학문은 궁합이 잘 맞습니다. 퀴비에가 딱 이 케이스...)을 모범으로, 어떤 형태적 요소들이 어떤 유형 판별에 속하는지를 구별한 것이었거든요.
주머니와 자궁의 차이로, 유대류와 포유류를 구별하듯, 얼굴 같은 것은 유적 요소이고, 손과 귀 같은 것은 종적 요소라 이거죠.
하여간 이런 식으로 우리가 포착해낼 수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단위체적으로 구별해내고, 이것들을 유형화하여 어떤 요소로 해석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생각하심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이것들을 적당히 범주화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범주가 어떻게 성립하냐는 것은 큰 문제거든요.
이건 해석 문제 랑도 바로 연결됩니다.
그걸 어케 아냐 이것이죠.
그건 과거의 그림이고, 유적으로 우리와 구별되는 것인데, 우리가 어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 그런 개체와 종 차원의 특성을 해당 유적 차원에 귀속 시키는 것이 객관적으로 합당한지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때문에 저런 과거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라는 문제는 통문화적, 비교문화적 문제로 바로 이어지죠. 그래서 뵐플린이나 리글은 단지 서양 미술사를 정리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느 문화든 그 시각적 요소를 분석해낼 수 있는 보편방법을 그들이 창안했다고 주장한 것이고요.(자연스레 그런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죠.
하나는 단선론적 발전론입니다.
단선론적 발전론에서 다른 것들은 저발전 단계에 귀속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 속에서 포착할 수 있고, 자신들이 가장 발전된 단계에 있으면 그 이전의 단계들은 모두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거죠.
여기서 발전은 과거의 성취를 소멸시키지 않고, 누적적으로, 추가적으로 얻어낸 것이란 전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진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누적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실 누적적이지 않아도 발전일 수 있거든요)
다른 하나는 심리학적인 분석입니다.
뵐플린 리글이 이쪽에 속하고, 이게 지각심리학 및 신칸트주의로부터 저들이 배운 방법이죠.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기본 단위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좀 더 추상적 단위체를 이루는지를 탐구하고, 바로 그 결합 공식들을 가지고 다양한 시각적 인식을 분석하자 이겁니다.
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분석론의 작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감각에 불과한, 정제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차이소를 포착해 차이화를 진행)할 수 있는지를 범주화하고, 이것들로 쌓아올라갈 수 있는 끝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이런 범주는 그래서 대립적 요소이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 차이나는 것들의 관계를 포착하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뵐플린, 리글, 파노프스키 모두 마찬가지이고, 이건 칸트도 그렇게 확립했습니다)
저런 관계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이러한 확인을 통해 작품들의 구조를 포착할 수 있고, 이는 해석이면서 객관적 판별 기준일 수 있다 이거죠.
역사적이든 심리학적이든 어느 쪽이든 이런 분석은 규범성을 함축합니다.
저기서 객관적인 실체는 해석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칸트에서 온 건데, 객관은 걍 객관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의 대상 포착이 필연적일 때 객관인 겁니다.
그러니 해석=객관이고,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요소들의 연결망을 포착해서 해석하는 것이 성립되었을 경우, 그렇게 읽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읽은 것이 되고요.
그러니 “오해”, “잘못된 평가”가 가능하단 말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이게 좋은 것은, 관람자를 포괄하면서도, 관람의 방향성을 한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관람자는 무시되는 게 아니라, 중간항에서 객관적인 기본요소들을 통해 재구성됩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관람자는 이러한 감정-정보의 재생산의 매체에 속하고, 관람자 일반은 해당 체계의 구조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원래 얘기로 돌아와 이게 인류학과 관련 될 만한 부분을 강조해보겠습니다.
일단 파노프스키 본인도 iconography(도상지학)와 iconology(도상학)의 관계를 ethnography(민족지학)와 ethnology(민족학? 인류학?)에 은유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방법이 민족지학과 민족학의 관계처럼 성립되어야하는데, 천문학과 점성술처럼 관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거죠.
뭐 이런 것은 작품 안에서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으로 얘기된 것이지만, 이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얘기입니다.
작품 안에서 이 작품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graphy에 기초한 사례-유형 수집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총체화되기 위해서는 그런 수집을 통해 작품 자체의 정립 또한 제시되어야합니다.
여기서 이게 들어갈 수도 있고, 저게 들어갈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이것이 들어갔냐를 보여줘야하니까요.
그러면 그런 설명에서 어떤 가능성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포착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게 단순히 특정 부분을 그리는 테크닉 측면일 수도 있고, 작가의 습관일 수도 있고, 그 당시 해당 문제를 표현할 수 있는 테마와 모티브, 즉 도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의뢰자의 취향 문제일 수도 있고,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예술가적 천재성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한 작품을 총체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총체성들도 모두 동원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이 순환되면서 총체를 이룩할 수밖에 없다 이거죠.
그래서 한 작품은 다른 그라피들을, 다른 사례들을 매우 잘 수집하고 분류하고 기록할 수 있어야하고, 동시에, 그러한 사례들 속에서 하나의 logos를 포착하여 그 실현태로서 작품을 분석해낼 수 있어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게 천문학과 점성술의 관계처럼 보일 수 있단 얘기를 한겁니다.
일단 유형화와 규칙을 통해서 한 작품의 특성을 묘사하는 것은 누적적인 포착을 통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려진 기법들과 주제들을 수집하면 어떤 작품이 어느 시대 어느 화풍이란 것은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진짜냐 아니냐는 것은 전자의 문제로 끝까지 간 것에 불과하고(이걸 감식이라고 하는데, 감식의 아버지인 모렐리나 배런슨도 결국은 평가로 갑니다)
결국에는 이 작품의 총체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평가가 가능해집니다.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 이런 것이 말이죠.
이런 평가에서는 저런 요소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결합하였고, 어떤 긴장 속에서,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으로든(파노프스키), 긴장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으로든(바르부르크), 특정한 선택 속에서만 총체화가 가능한 것이죠. 이런 총체화의 선택에서 가능한 선택지를 비교 분석하고, 그 긴장들의 배치를 통해 해당 작품의 가치(좋은 작품이냐 나쁜 작품이냐 천재적이냐 범작이냐 따위)가 판별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비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교의 유의미성까지 가는 게 미술사학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교와 유의미성이 포착되기 위해서는 grapy와 logos가 결합되어야한다는 것, 그것을 결합하기 위해 보편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들을 어떻게 배치해야하는지, 얼마나 배치해야하는지 따위가 고려된다는 점에서 인류학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말이 되는지는 미독이 평가해주시길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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