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카톡 복붙
슈패만 책을 보다보면 계속 몸이 아파지는 것 같군요...
번역이 구린 책을 볼 때 지력 소모가 큽니다...
세부 언어까지는 정리하지 않았는데, 대충 어떤 구도인지는 전달해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정리해봤습니다. 다만 이 양반의 논의를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도 없고, 이해도 잘 안 될 거 같아 제 방식대로 정리했습니다.
일단 이 사람이 인격 개념을 주목하는 동기를 친족-법으로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마법 전통에서 노예 또한 당연히 인간homo입니다.
노예 또한 인간이지만, 노예는 자유인과 구별되는데, 바로 그 구별지점이 인격person입니다.
여기서 인격은 지위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종속된 것인지, 아니면 독립된 것인지로 노예와 자유인이 구별되지요.
사실 이러한 “지위-인격”은 모두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독립된 것인지 불분명하지요.(라틴어 원문도 sui juris라 ‘종속’으로 퉁치는 것은 역자들의 실수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좀 재미난 관념들로 살을 덧붙이면 좋을 듯합니다. 먼저 저런 지위-인격은 사회 속의 역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즉, 어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지위-인격이 말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런 지위-인격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즉, 어떤 역할을 수행하긴 하는데, 그 수행이 열려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재미난 언어 변화를 언급하면 좋을 듯합니다.
원래 persona는 극중 역할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하지만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가면-역할 배후의 인간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원래 저런 역할-가면 뒤의 배후가 nature의 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person의 특정한 의미가 꿰찼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person과 nature가 섞이는 것이고, 이것을 어떻게 다시 나누느냐가 문제될 상황인 것이지요.
암튼 저런 혼재로 삶=연극이란 도식이 나오는 것이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배역을 잘 수행했는지를 묻는 게 합리적인 것이 되는 겁니다. “한 개인의 삶이란 열린 연극의 배역”이라는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길게 푼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인격 개념으로 넘어갈 때 이런 사유가 중요해서입니다. 열린 연극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고민하고, 그 수행 결과에 대해서 평가를 받는다는 사고가 로마의 자유인 관념과 통하는데,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풀면 그리스도교의 인격론이 되거든요.
노예도 자유인도 homo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리고 노예는 person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person의 종속성입니다. 종속성의 여부는 바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자유롭게,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지(혹은 했는지,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에 달려 있습니다. 역할 수행을 자기 스스로 떠맡았는지, 그것을 정말로 “스스로” 떠맡았는지라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특유의 문제를 다루는 person, 자유를 담당하는 person이 슈패만이 주목하는 person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그리스도교가 마음을 다루는,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따른다는, 믿음과 신앙의 종교니 이런 부분 강조가 강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게 신학-형이상학에서 어케 논쟁되었는지를 이해하면 꽤나 재밌습니다.
문제는 이런 겁니다. 중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뚝배기가 깨지는 부분은 이런 겁니다.
사자가 실체라고 할 때, 실체의 의미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종적 실체입니다. 이 종적 실체에는 수적인 구별이 무의미합니다. 사자 일반은 일종의 집합추상명사로 불가산명사 비슷한 것이니까요.
다른 하나는 개체적 실체입니다. 이것은 사자 일반이라는 종적 실체가 구체적인 질료와 결합해서 하나의 단일체를 형상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는 수적으로 셀 수 있게 되지요.
당연히도 이 적용을 인간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문제가 됩니다. 구원 때문에 말이죠.
사자 저 구도에서 문제를 만들면 이렇습니다.
사자+질료 단일체로 하나를 가리켜보죠. ‘레옹’이란 이름의 사자를 상정해봅시다. 레옹은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면 이제 걔는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레옹과 똑같은 개체가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이것은 레옹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적으로 셀 수 있는 것은 연속을 통해서만 동일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아주 합리적으로...) 생각했고, 연속성에 단절이 있으면, 종적으로는 같지만 수적으론 다른 또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속성은 중요치 않습니다. 애초에 속성은 저런 “종”과 “개체”를 식별하는 환유적 징표에 불과하거든요.(species의 원래 의미는 바로 저런 환유적 징표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이단적 사고가 됩니다. 왜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거든요. 죽었던 사람이 부활한다고 말할 때, 기독교에서는 신체까지 함께 부활합니다. 예수는 무덤에서 살아났지, 영혼만 부활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영혼 말하는 게 이단적이라는 입장도 있었던 것이고,(테르툴리아누스...) “부활=신체 부활”이란 구도는 기독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사고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활 사고는 저런 종-개체론에서는 설명이 안 되죠. 제가 죽었다 살아나면, 그냥 다른 게 되니까요... 수적으로 하나가 아닙니다. 즉 엄한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란 주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데, 그게 바로 개체 실체란 개념이고, 인격이란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뭐 문제의 해결은 이런 것이지요. 수적으로 같다는 것을 담지할 어떤 것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일종의 “영혼” 등장이지요.
사자 실체는 사자 일반이거나, 질료와 결합된 우연적 사자 실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 일반과 질료와 결합된 우연적 인간 이상의 개체적 형상(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적이긴 한데, 질료적 우연성이 아니라, 신의 선택으로 인한 우연성이 개입된 실체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체를 perso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nature의 여러 의미 중 “개별 본성”이라는 의미에 해당되는 사용에서 파생된 걸로 보이는데, 핵심은 “차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저런 person은 바로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다른 것과 다르게 만드는 고유한 형상이란 것이지요.
“인격은 오직 어떤 고유한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이다.” “자기 홀로 고유한 이성적 실존의 방식으로 실존하는 자가 바로 인격이다.” “본질이 아니라 실존,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존재, 그것이 인격이다.”
이런 인격의 의미는 단순히 종적으로, 질료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데, 세상의 존재를 “생명”이 아니라, “실존”에 두는 존재로서 인간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개체적 실존은 “생명”을 통한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였는데, 여기에 “생명” 대신 다른 것을 넣은 것이고, 그것이 “이성적” 능력과 관련짓게 만든 것이죠. 뭐 구체적인 것은 없는데, 바로 특정한 삶의 양식을 갖는다는 생각을 만들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까지를 인격으로 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데카르트나 데카르트 이전의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사고인데, 영혼이 단순 정신이 아니라, 개체적 정신이고, 그런 개체적 정신은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갖고, 그런 “자신의 몸”이 단순 질료가 아니라, 바로 영혼의 특별한 성향(개성character)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이성적임이라고 하면 일반적이기에 개별자가 아니잖아요... 그럼 개별적 영혼이란 개념이 안 되니, 이성의 활용 차원에서 “개성”이 개입해야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세상은 창조되었다가 예정조화이고, 그런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단일한 세계가 공화정체라는 사고가 이래서 나온 것이지요.(라이프니츠가 이런 입장)
뭐 암튼 그런 의미에서 인격은 총체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개별로 환원되지도 않는, 사이에서 존재하는 “Indifferenzpunkt”라고 할 수 있고, 여기서 심리적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실재로 환원되지도 않는 세계가 실존하고, 이 실존 속에서 인격성이 실현된다가 슈패만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사실 저의 논리 전개는 슈패만을 거의 안 따르고, 제가 알고 있는 중세의 개체화 문제를 경유해서 설명했는데, 슈패만은 “나”, “너”, “우리(그들?)”이라는 1인칭, 2인칭, 3인칭의 “인칭” 개념으로서의 person을 가지고 삼위일체로 인격 개념의 원천을 그리스도교로 귀속 시킵니다. 뭐 전 어느 정도 설득력 있다 생각하지만, 좀 문제적일 거라고 평가하고 싶네요. 갠적으로는 제가 설명한 쪽이 더 낫고, 제 설명 구도에 인칭 개념을 활용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이쪽 전통으로 마르틴 부버의 “너”와 “우리” 현상학, 뱅베니스트의 인칭 개념과 objectivity 연결이 결합될 수 있지요. 다만 3인칭이 우리인지 그들인지를 결정 안 하는 건 핵문제....)
뭐 근데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인격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 무수히 널려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인격들이 귀속된 상태로 시작하고(사실 이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독일화된 유대인들, 카프카, 벤야민, 바르부르크 등은 자신의 정체성이 결국 선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부여된다는 진실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것들에서 어떻게 배치하면서 전체를 향한 인격 개념을 완성해내는가가 핵심이겠지요. 얼마나 많은 “인격들”을 포괄하는 “인격”을 형성해내는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튼 자유와 인격은 연결되는 개념이란 생각에 저는 동의하고, 주관성, 특히 내밀한 주관성은, 저런 인격적 다양성을 실현하는 하나의 연결고리에 불과(주관성이란 성찰의 한 계기, 혹은 매체란 생각)하다고 전 생각하고, 자꾸 저런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려고 하니 헛소리가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슈패만도 이런 비판적 입장에 가깝고, 이 점에서 슈패만, 알랭 쉬피오, 저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바로 저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격(들)이 쉬피오의 실정성 존중, 슈패만의 현실주의 실재론이고, 저걸 어기면 비실재론(슈패만), 전체주의(쉬피오)가 된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주관 또한 복잡하게 세분화하고, 어떤 능력을 어떤 매체들로 연결하는지를 가지고 설명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자유 같이 큰 얘기를 할 때, 좀 더 상대화해서 얘기하는 게 전 좋다 생각해서 슈패만은 확실히 서구인들을 상대로 얘기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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