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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모방시대의 종말>

사실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저자(들)의 생각이 뭔지 이해가 되고, 사례 연구야 적당히 읽으면 되는 것이기에 적당한 글을 남긴다.

 

과거에 나는 김경만의 주장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고, 이에 대한 재고의 글도 쓴 적이 있다. 여기서 그때의 글들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푸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단 저자의 핵심 진단은 당연히도 “모방시대의 종말”이다.

그런데 모방시대가 도대체 무엇인가?

모방시대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동방(여기서 서방 동방 기준은 우방국 기준이고, 친미 세력권과 친소 세력권을 서방 동방으로 구별한다. 역자도 그렇게 번역했다)의 친소 정권이 붕괴한 후 동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정상화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정상화는 단순한 서방화였고, 소외 가득한 서방화였다.(이것이 하르트무트 로자가 새롭게 제시한 구체적인 소외 개념에 딱 들어맞는 예라, 난 소외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자치를 시행했는데, 이러한 자치는 답정너로 서방에서 파견된 전문가가 서방 국가의 법을 이식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선택지는 여럿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하나의 선택지만 주어진 것이었고, 그것을 기꺼이 따르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자기가 따라야하기에 따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걸 저자들은 모방시대의 개막이라고 말한다. 일단 답은 정해져있다.(자유민주주의) 그러나 답지를 쓸 때 감독관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뭐 이것만으로는 모방시대에 대해 비판할 이유는 없다.

저자들은 이걸 소외개념이랑 엮지도 않는다.

 

이제 다음 단계의 문제지점으로 넘어가는데, 모방시대가 모방을 시도한 사람들에게 딱히 큰 이득이 되지 않으면서 문제가 증폭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진단하듯, 이러한 불만은 꽤나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극심하게 표출되었는데, 핵심적인 이유는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재미나게도 저자들은 이 문제를 단순한 “정체성의 정치” 문제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이 부분에서 통찰력이 있다) 서방 세계를 모방해봤자, 국가적으로 그들은 “성공”할 수 없으며, 국민들은 서방 세계로 이주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 되는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폴란드를 발전 시켜봤자, 독일만큼 발전시킬 수는 없는 것이고, 정체성이 빠진, 자유민주주의라는 기준 아래에서 세계를 이해하면 굳이 폴란드인이 폴란드를 위해 봉사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폴란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냥 탈폴란드 해버린 것이고, 그렇게 동유럽은 단기간에 20퍼센트 이상의 인구가 유출되었다.(그것도 40대 이하의 인구로!)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정치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결국 서방, 이제는 서유럽과 각을 세우고, 그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게 그들 국가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답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경제위기와 이민자들의 유입은 동유럽 국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이것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할 좋은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 국가들이 병크를 저지르는 것을 손가락질하면서, 우리가 서유럽의 미래라고 선언하는 것은 과거 소련의 붕괴를 뒤집은 언어다. 1989년에는 서유럽이 동유럽의 미래였지만, 이제 동유럽이 서유럽의 미래고, 정체성을 지키는 “최전선”(이는 심지어 슈미트의 언어를 빌려온 것임을 저자는 보여준다...)이라는 것이다. 뭐 이게 가질 수 없으면 파괴시키는 본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상상 속의 복수는 생각보다 유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동유럽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실질성이 있는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게임이면 리겜이 최선일 테니 말이다.

 

사실 이러한 진단 자체는 그렇게 새롭지 않다.

 

뭐 후쿠야마 본인도 이런 입장에 가까웠던 거라고 난 생각하고, 헌팅턴은 그렇기에 역사의 종말 이후 핵심적인 대립각은 정체성에 기초한 폭력적 대립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았나.

 

하지만 저자들이 새로운 부분은 정체성 정치를 국가 내적으로 복원한다기보다는 국가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선택지의 가짓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별거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옳다는 진단은 생각보다 많은 선택지를 폐쇄시키고, 다양한 사고와 개성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런 전제아래에서 뻘개입을 한 사례들을 저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모방관계에서 생기는 폭력성의 역할을 정치 언어로 도입했으니, 지라르가 무덤 속에서 박수쳐줄 일을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이는 저자들의 진단과 해결책과 독립적으로 제기하는 나의 문제다) 그래서 동유럽이 잘하고 있냐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좋은 답일 수 있겠냐고 물으면 기분 좋게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이 파시즘이랑 뭐가 구별되는 것인지 물으면 멋쩍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뭐 난 동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상황이었고(여기서 등장하는 “벨벳혁명”이란 말 자체를 난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이게 우리 정치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으니 우리나라나 고민해보련다.

 

일단은 우리 현실과 별로 맞지 않는 것 같긴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정체성 정치가 굉장히 희한하게 등장할 뿐인데, 전형적인 사례가 상상속의 “토착왜구” 만들기를 통해 “민족” 개념을 얻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전도 없다. 그냥 일본 이기기 정도라 서유럽에 자신들이 모범을 제공한다는 의식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 뭐 난 아직 우리나라에 정체성 담론이 그렇게 유통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K-국뽕 시리즈나 친일 몰이를 가지고 표심을 얻는 것들이 정체성 담론을 의도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의도했다고 치더라도 이게 그렇게 통할까도 의심이다)

 

동유럽 국가들도 소국이고, 역사적 위협 속에서 국가의 소멸이 실질적인 위협이기도 했던 국가라는 점에서 우리랑 비슷한데(그래서 난 동유럽 학자나 문학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에 꽤나 공감이 간다), 정작 그들이 갖는 정체성의 순수함을 우리도 갖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전통에 호소하기에는 조선과 너무 멀어진 상황이고, 그렇다고 근대성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기에는 딱히 서양의 근대성과 차별성을 못 갖고 있기 때문이다. 뭐 동유럽 국가들도 바로 이런 애매모호함 때문에 적을 만드는 언어가 유통되는 거겠지만, 그들은 과거를 들먹거리며 “유럽을 위기로부터 구한 게 누구?”라고 말할 건덕지라도 있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더욱 애매하다.(사실 그런 점에서 소련이 망하기 전부터 러시아에 유통되던 국뽕은 나름 탐나는 포도다. 그들은 들먹거릴 역사가 꽤나 많기 때문이다)

 

뭐 나는 언제나 근대주의자고 우리의 공화국을 설계한 사람들은 이씨왕가를 극혐하여 공화국을 주창한 사실을 들먹거리길 좋아하지만, 정작 한국인에게 전통은 조선에 반대하며 이루어진 근대보다도, 한국인들이 미개하다고 부르는 조선의 것에 기초하고 있다.(소위 “전통 문화”라고 칭해지는 것들을 봐라)

 

얘기가 중구난방이 되어 내가 도입부에 김경만 얘기를 한 이유가 좀 망각된 것 같은데, 김경만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여러번 지적하지만, 한국 학계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멍청한 놈들이 학자 행세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정체성과 갑질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폐해이다. 학자로서의 정체성은 자신의 앎이 어떤 사회적 효용이 있는지를 의식하는 것에 기초한다. 즉, 내가 믿고 있는 이것이 세상의 어떤 부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의식하고, 이것이 얼마나 객관적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갖는 것이다.

“얼마나”, “어느 정도”, “어떤”이 난무해서 애매하겠지만, 이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보통 사회운동가들을 븅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주장에 사회적 맥락이 없다는 데 있다. A라는 주장이 합당한 것은 나도 동의가 되는데, 그게 얼마나 시급한지가 항상 문제가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문제가 얼마나 시급하고, 얼마의 재원 수준이 필요한지는 항상 맥락 의존적이고, 이것들을 의식하는 것은 운동가로서 중요한 앎이다. 여기서 재원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이러한 투자를 얼마나 하는 게 합당한가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즉, 이런 것을 모두가 하면 사회가 망하는 건데(생각해봐라 모든 재원을 복지에 쓰면 국가 운영은 불가능하고, 모두가 학자가 되고 모두가 사회운동가가 되면 국가는 붕괴한다),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에 자신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좋은 감각이 필수적으로 요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게 없고, “내가 전공하는 이 영역에 금송아지가 있으니 일단 돈을 줘!” 이상의 것이 없다. 적당한 말로 금송아지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정치성”의 전부이다. 보통 이렇게 되면 당연히도 시스템은 붕괴하는데, 이런 시스템 붕괴를 막는 장치가 기가 막힌다. 바로 내가 김경만의 주장을 재고하면서 언급한 상징권력이 그 장치다. 상상 속 “이세계”의 우월함으로 권위와 실질적인 시스템 규칙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저 세상은 잘 돌아가니, 저 세상을 흉내내면 이 세상이 운영될 것이라는 믿음이다.한국에 도대체 왜 이런 제도가 있는지 찾아보면, 별 이유 없이 본인이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기초로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과 그 주장에 의해 도입된 제도인 경우가 많다.(아니 전적으로 그렇다) 뭐 그것 덕분에 어쨌든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뭐 이런 무비판적인 모방은 한편으로 “모방시대”와 매우 잘 맞아 떨어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언급했듯, 미국은 다르다, 북유럽은 다르다 식의 구체성을 가장한 허구적 유토피아론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맥락인데, 맥락에는 법칙이 없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파농의 경우에서처럼, 저항까지 가는 것은 좋은데, 그래서 어쩌면 좋을까가 문제의 핵심이 되어야한다. 저자들이 진단하듯, 모방시대는 끝났는데, 그렇다면 모방 없이 각자가 알아서 할 수 있는지는 또 의심의 영역이다. 결국 모방이 개성화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 구체적인 모방이 중요하고, 여기에는 허구적이지 않은, 실정성에 기초한 정체성 의식이 요구된다. 저자는 “동도서기”를 은근슬쩍 좋게 평가하지만, 동도서기도 병크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잘 맞는 특질을 개성으로 무장시키고, 이에 맞춰 제도 설계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문제 해결에서는 학자들이 꽤나 중요한데, 바로 우리의 특질을 개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문화이며, 학술언어이기 때문이다.(파농은 그래서 학문을 한 것이다) 바로 이 감각을 갖는 것이 학자 의식에 중요하고, 그것들이 부재하니 학계가 븅신이라는 진단이 타당한 것이고, 학계가 그 모양이니 새로운 정체성 형성이 안 되는 것이라는 나의 진단도 성립할 수 있다.(그러니 학문에 어느 정도 투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다)

 

뭐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이제 어떻게 제도를 변혁시켜야하는지에 대한 얘기로 이어지는데, 이건 얘기하자면 좀 길긴 한다.(나에게야 재밌는 얘기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모방시대의 종말>은 어떤 면에서는 좀 뻔한 얘기지만, 뻔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데, 지라르와 허시만과 파농과 현대 정치 담론들을 연결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방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지라르가 제시하는 이입과 폭력성 증대, 허시만이 제시하는 이탈의 정치학, 파농의 정체성의 정치를 결합하고 있다. 뭐 근데 이런 하위 모티프들이 모방을 중심으로 잘 엮이는지는 모르겠다. 나야 이미 믿는 자고, 내가 아는 모든 앎을 총동원해서 이것들이 어떻게 엮이는지를 머릿속에서 짜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만큼 신박한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그냥 단순 정체성 정치학을 지향하되, 과거처럼 경관이니 역사니 하면서 이상한 얘기하지 않고, 현대의 부족tribe을 다루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역시 모방 개념은 중요해질 것이다. 부족들 사이의 다툼, 내부적 싸움에서 모방의 문제는 실질적인 메커니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