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K씨에게 보내는 카톡 복붙
스캔런의 책을 아직 다 안 읽었지만, 이 책을 다 읽는 건 너무 힘든 일일 거 같아서 대충 정리해봅니다.
읽기 어렵다는 것은 책이 어렵다거나 번역이 너무 구리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고요(사실 번역이 좀 구리긴 합니다.(을/를, 이/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거나 그런 문제가 좀 많습니다. 번역할 때 구문 단위로 쉼표 쓰는 버릇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제 지도교수님도 그렇고 한국 저자들은 이상하게도 쉼표 쓰는 걸 꺼리는 경우가 많더군요. 전 의미 단위에 따라 모든 곳에 쉼표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뭐 근데 전 이미 익숙한 논의들이고, 사실 오히려 익숙해서 지루하고, 딴 생각이 자꾸 나는 책이라 읽기가 어렵네요.
뭐 일단 어제 얘기한 거랑 이어서 얘기하면 이러합니다.
스캔런의 작업에는 동의하는데, 전 이게 왜 필요한지에 ???인 것이죠.
이게 필요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왜 이런 고차원의 분석이 필요한 것일까라는 차원에서 ???인 겁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러합니다.
쾌락->행동 중심의 사고를 가진 학자나, 욕구->행동 중심의 사고를 가진 학자가 있긴 할까하는 물음과, 이유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에 대해서 굳이 반대할 치는 누구고, 이런 주장이 실제로 어떤 철학적 여파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 좀 ???인 것이죠.
간단히 말하면 대충 이런 구도입니다.
콰인으로 돌아가서 콰인의 실용주의를 따른다고 해봅시다. 역시나 현상 분석이 중요하고,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과 예측력(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잘 몰라도 하여간)에 따라 기본 구도를 짜고, 이것들을 세밀하게 정교화하면서 존재론적인 문제를 정리하는 게 철학이라고 쳐보죠.
“도덕”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그냥 바보입니다.
“도덕에 대한 명제”가 존재론적으로 허구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경험적으로 “도덕”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경험하고, 이에 맞춰서 행동하거든요. 도덕은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주어진, 그리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이걸 부정하면 걍 븅신인 거에요.
분석철학자라면 그냥 주어진 상황을 잘 분석하는 학문에 숟가락을 얹겠죠.
도덕의 문제에 있어 가장 좋은 학문이 무엇일까요?
당연히도 경제학(+경영학), 심리학입니다.
그리고 두 학문에서는 쾌락->행동, 욕망->행동으로 행위를 분석하지 않아요.
이유라고 한 묶음을 만드는 그런 종류의 존재자를 도입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현상, 믿음들과 판단들이 작동하게 되는, 생리학적인, 심리학적인, 사회적인, 상황적인 맥락들을 연구하고 있죠.
그냥 저런 맥락을 일단 받아들여야지 저런 거 받아들이지 않으면 걍 바보인 겁니다.(그런 점에서 모든 게 욕망이라고 느슨한 소리하는 놈은 걍 저능아인 것이죠. 그런 형이상학이 도대체 뭘 설명하고 예측하겠습니까? 다른 필드 학자들이 하는 걸 걍 모르니까 하는 헛소리죠)
여기서 경제학을 잠깐 세밀하게 다루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경제학을 그냥 단순히 합리성 극대화 어쩌구로 이해하는 치들도 많겠지만, 당연히도 경제학자들은 똑똑하고, 그들은 열심히 잘 유형을 나누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고전 경제학과 이에 대한 공격 이런 걸 다 무시하고서도 얼마든지 복잡한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믿음과 판단에 관심이 많았고, 합리성을 무조건적인 이익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사실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는지 전 잘 모르겠네요. 경제학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이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할 때, 합리성은 매우 포괄적이에요.
여기 S란 인물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서 A라는 사실을 고민하면 P라는 문제에 있어서 Y라는 판단을 하게 될 것인데, 이 사람이 Y가 아니라 N이란 판단을 내렸어요. 경제학자들은 여기에 골치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 체계적 합리성을 분석하는 것이죠.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비용이니, 이런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지 않았고, 고민하지 않았기에 Y대신 N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해요. 그래서 이런 비용 문제를 처리하는, 특히 보이지 않는 비용 문제를 처리하는 문제도 당연히 다루죠.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모델링 차원에서 그런 변수를 도입하는 게 효율성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자신들이 다루는 문제는 그런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피하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었지요.(솔직히 전 행동주의 경제학이 그렇게 이단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단적이었던 것은 경제학의 정치성 문제 때문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이건 기회 될 때 경제학의 역사를 썰풀면서 설명합죠)
뭐 암튼 저런 건 걍 상식이고, 저게 설명력과 예측력이 가장 큰 이론이고, 저걸 이제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분할분배하는 게 “실용주의”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일단 이상한 조류들을 하나하나씩 논파하는 스캔런의 작업은 무용합니다.
솔직히 말해 그런 이상한 조류들이 철학계 내부에서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상황인 것이거든요.
뭐 전 여기에 대해서 스캔런의 동기나 이런 것보다 그냥 이런 의미에서의 실재론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빠져서 철학사나 더 파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그래도 좀 얘기할 것이 남긴 했습니다.
스캔런은 기존의 메타 윤리학적 구별들을 활용하고, 이때까지의 설명 문제들에 대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데, 전 솔직히 이런 게 다 무의미한 비용들이라고 생각해요.
롤즈, 코스가드 같은 애들이 정말 스캔런이랑 다른지 전 잘 모르겠거든요.
구성주의가 왜 이런 의미로 알려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구성주의는 비실재론, 반실재론이 아니에요 원래부터. 구성한다의 의미가 문제가 되고 있고, 여기서 “환원주의”가 유의미한 선택지로 놓여 있으니, 반환원주의자들이 좀 이상한 입장으로 구별되는 건데, 전 이 상황 자체가 코미디고, 철학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환원주의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사이비 과학적인 주장이고, 이런 주장하는 사람은 걍 상식이 없는 거에요.
저런 걸 유의미한 선택지로 여기니까, 수반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게 되고(스캔런도 수반을 다룹니다), 그러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쓸데없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원래 평가했던 것처럼, 스캔런에 대해서는 괜찮은 사람이군 정도의 생각을 하는데,
이런 책이 오늘날에도 필요하다는 그 사태 자체가 전 너무 치욕스럽네요.
지금 스캔런의 결론에서 시작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야 이치에 맞는 거거든요 원래.
분석철학은 50년의 세월을 똥구멍으로 쳐먹은 것인가 하는 한탄만 나옵니다.
뭐 스캔런의 분석은 대체로 상식적이고 합당합니다. 다만 전 이런 책을 시간 들여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입니다. 이런 건 업계 상식이어야하는 거죠 원래. 분석철학의 기원이 논리실증주의라고 할 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현업 과학자라 이런 일이 없었는데, 걍 다른 학문들이 돌아가는 걸 모르면서 나대니까 이런 상황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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