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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후쿠시마 료타 - <신화가 생각한다>

기대하지 않고 본 책인데, 정말 좋은 책이다.

저자의 학술적 명성을 놓고 비교할 때,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가”인 스넬이나 뮌클러의 작업과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이런 평가는 특정한 전제 아래에서만 성립하다. 이는 후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이 책은 제목부터 어그로를 끌고 있다.(혹은 그렇게 의도되었다)

대체로 신화는 비이성적인 것이고, 사고는 이성적인 것이라 이해된다.

때문에 신화와 사고를 등치시키는 이러한 작업은 신화와 사고의 대립이라는 일반적인 이해에 반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 본인은 이러한 입장이지만, 저자 본인이 이러한 것이 어그로라는 것을 꽤나 분명히 언급한다.

오늘날 신화를 말하는 것은 분명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료타는 어떤 이유에서 신화를 말해야하며, 그것이 사고와 단순히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고”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저런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료타의 “신화”는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자신의 작업을 또 다른 “신화”라고 말하는 것 또한 레비-스트로스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는 무엇인가?

흥미롭게도 료타는 “신화”가 무엇인지는 정의내리지 않으며, 그가 이 책을 보기 전에 읽으면 좋다고 말한 <키워드 해설>에서도 신화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다양한 용어들을, 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정의 내릴 때 난점이 많을 그러한 용어들도 정의내리면서 논의를 전개해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신화를 정의하지 않고, 신화가 사고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는 신화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어야할 문제가 아니고, 바로 신화란 무엇을 통해 다른 것들이 설명되는 것이라고, 즉, 신화가 설명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사고임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논의에서 료타의 신화 개념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접근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글의 전반부를 채우도록 하겠다.

 

료타에게 있어 신화는 사고라고 말하였다. 즉, 신화(함)은 사유(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이것을 말하는가?

료타는 신화를 원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사회를 말하기 위해서 신화를 내걸고 있다.

료타에게 있어 현대 사회는, 모던이라고 부르든,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든(그는 실제로 <키워드 해설>에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함께, 대립이 아니라 동일한 사태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경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전제해야할 조건이다.

그는 현대 사회를 설명할 때, 하이퍼-리얼리티로 시작한다.(첫 장의 첫 절이자, <키워드 해설>의 첫 단락은 “하이퍼-리얼리티”이다)

왜 하이퍼-리얼리티인가?

우리에게 하이퍼-리얼리티란 말은 붕 떠있는 것, 가상적이고 근거 없는 것이란 인상을 남긴다.

즉 하이퍼-리얼리티는 리얼리티, 즉 현실성이 없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소리다.

료타는 우리의 이러한 인상을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하이퍼-리얼리티는 “비현실”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또한 그의 하이퍼-리얼리티 정의 “현실”과 너무나도 밀접하다.

료타는 하이퍼-리얼리티를 “피드백 구조를 통해 강화되어 구성된 현실”이라고 정의내린다.

즉 하이퍼-리얼리티도 현실인 것이다.(또한 우리의 “현실” 또한 피드백을 통해 강회되어 구성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료타는 현실과 하이퍼-리얼리티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는 료타는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이퍼-리얼리티를 하나의 현실로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들이 비현실이라면 딱히 설명될 필요도 없고, 방치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법을 통해 규제되면 될 무엇인가에 불과할 것이다.

료타는 바로 이 하이퍼-리얼리티란 특수하고 국소적인 현실을 진지하게 보는 것이 현대 사회 이해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료타에게 있어서 현대 사회는 복잡한 것이고, 현대 사회를 단일하게 통합하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실제적인 현실은, 현실들로 쪼개져있고, 그것들은 모두 하이퍼-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현실, 현실이 현실들로 조각나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이퍼-리얼리티가 형성되는 것은 복잡한 것을 복잡한 그대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부터 현실은 그러한 것이다.

료타는 의미를 “복잡한 정보를 감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저러한 의미 형성(복잡성 감축)이 반복되어 패턴을 형성하는 것이고, 저러한 패턴 형성이 “리얼”이다. 현대 사회에는 이러한 패턴 형성이 다수적이라는 것이 료타의 진단이며, 이러한 다수적인 패턴을 단일 패턴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현실 이해이다.

 

여기서 “다수적”이란 말에는 주석이 달릴 필요가 있다.

료타는 저러한 다수적인 패턴들이 집단별로 분화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화”라고 할 때, 신화의 변형들은 집단적으로 분리되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이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받아들여질 만한 전제이고, 이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신화의 다수성을 저렇게 말하는 것은 복잡성을 감축할 수 있는 좋은 표현 방식이다. 레비-스트로스 또한 신화들의 다양성을 지역적 분포와 연동시키는데, 그러한 선택은 문제적일지라도 유용하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다)

하지만 료타가 현대의 신화(들)을 얘기할 때, 그러한 다수성들은 지역적 차이, 집단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집단 안에서의 차이이고, 심지어 한 사람 안에서의 차이일 수 있다.(때문에 ‘다수성’보다는 ‘다중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다)

료타는 이러한 다수성들이 한 사람 안에서의 욕망들 사이에서 패턴을 만들기도 하고, 집단 안에서의 욕망들 사이에서 패턴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욕망과 소비, 소비 패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생산, 다시 소비의 피드백 구조와 연결한다.

이것을 자본주의라고 부르든, 소비사회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라는, “생산 조건의 재생산”이라는 목표를 이러한 피드백 구조를 가진 패턴 형성 기제를 통해서 달성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순환 속에서 창조와 소비의 경계는 흐려지고, 패턴들의 차이를 표현할 내용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말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패턴이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료타는 애초부터 의미를 내용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의미는 패턴 형성을 가능케 하는, 감축에 해당되는 기호에 불과하다.

즉, 저러한 패턴들을 파악할 때, 전통적인 “유의미성” 즉,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실을 전제하고, 해당 현실에 입각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료타는 이러한 패턴들, 이러한 현실들,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티들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서브컬쳐”고, 그가 이 책에서 분석하는 대상들이다.

이러한 서브컬쳐들에서 유의미성은 소비 패턴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패턴 안에서,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치도 않다.

료타는 이러한 것을 “신화소”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소는 하나의 기호가 같다고 여겨지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을 가리킨다.(이는 하나의 신화권 아래에 다양한 변형태들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 해당 신화권 안에서 개별적인 신화들을 만들어내는 주역들이 공통된 등장인물인데, 그것을 신화소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같은 신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소비로 치환한다.

같은 신화는 다양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가 말하듯, 네트워크 소비의 핵심적인 특징(그가 <키워드 해설>에서 볼드체로 강조한 특징)은 “자유로이”, 그러면서도 “기껏해야 고유명” 정도의 “구속”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패턴 형성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실제로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는 것뿐이다.

즉, 신화는 네트워크 소비의 이면에서, 네트워크 소비를 가능케 하는 차이소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보기 시작하면, 그가 왜 신화를 언급했는지, 그것을 왜 그가 분석하는 서브컬처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는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신화라고 부르면서까지 신화를 얘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신화는 공유하면서도 다양한 것들이 파생될 수 있는 느슨한 연결망이다. 그는 이러한 “느슨함”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저러한 현상을 통해 현대 문화 현상들을 이해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저러한 현상들이 전통적인 관점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분석되지 않았던 것은, 저런 현상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러한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해서 저것들을 소비하고, 저토록 열심히 참여하는지는 연구될 수가 없었다.

료타는 바로 이 지점, 저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괄호치자고 말하는 것이다.

저것은 단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애초에 저런 패턴 형성에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그것이 중요했다면 저런 패턴 형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소리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할 경우 료타가 제공하는 개별 작품론들에 대한 불만은 잠시 접어둘 수 있다.

그의 작품 분석은 대상 지향적이지 않다.

그것은 진리를 가리키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다.

료타 자신의 신화를 형성하기 위해 동원된 신화(들)이다.(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신화에 대한 학문임과 동시에, 신화들이며, 또 하나의 신화인 것처럼, 그리고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북미신화를 동원했던 것처럼)

작품론들은 분석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례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료타가 제공하는 특정한 분석 패턴에서 분석함으로써, 해당 대상들에 대한 인상을 조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료타가 하루키의 특징으로 저러한 “인상 조작”을 제시한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단 소리다.

 

이를 구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자체가 하나의 패턴을 형성케 하기에 허구적이진 않다.

그의 표현처럼 비현실이 아닌 초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즉 서브컬쳐도, 그리고 서브컬쳐를 분석하는 학술적 작업도 초현실이라고 부를 때 생겨나는 이점은 무엇인가?

이것이 실천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초현실의 단위들로 대상을 포획하면, 복잡한 것들을 감축할 수 있고, 그것들을 토대로 “설계”와 “실천”이 가능해진다.

저런 초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초현실에 대한 현실적인 개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료타는 서브컬쳐를 찬양하고, 현대 사회를 찬양하기 위해서 이 책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아즈마 히로키의 말을 따와 말하듯, 이는 “동물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로서 살 수 없고, 이는 사회개선이라는 인간 욕망에도 맞지 않으며, 논리적으로나 규범적으로나 동물로서 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때문에 이에 개입할 적절한 분석과, 적절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료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첫 장이 공과 사, 즉 “정치”에 대한 분석을 위한 것이고, 그가 책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다루는 마지막 소재 또한 바로 이 “정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현대 사회에 적합한 정치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다.

 

다만 저러한 분석에서 어떻게 규범이 나오는지 물을 수 있겠다. 바로 이 문제가 이 글의 다음 주제가 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