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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키스 토마스 -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카톡 복붙

 


 

이 책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고...

제가 관심 있는 감축 경로와 미독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감축 경로를 소개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일단 이 책을 읽은 동기로 말씀드리자면 이러합니다.

전 마술 자체에 대한 상세한 이해를 위해서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고, “마술의 쇠퇴” 때문에 읽게 된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초반에만 해도 영국인들은 마술을 믿었고, 그것이 법적 증거기도 했었는데(살해 당한 시체와 살인 도구의 공명 따위), 17세기 후반이 되면 그런 믿음이 사라지거든요.

그러니 이게 과학의 융성이든, 세속화의 증거이든, 합리성의 증대이든, 뭔가 설명한 필요한 사태인 것이죠.

이걸 어떻게 이해하냐가 학문과 미신의 간극을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 양반의 생각이 좀 궁금했습니다.

사실 근대 학문 설립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것이냐의 문제도 저 문제랑 관련이 크기도 하고요...

고전학-역사학 중심의 서사, 과학혁명 중심의 서사, 철학 중심의 서사 등등은 저걸 어케 해석하냐의 문제기도 하거든요.

 

암튼 그러니 이게 세속화, 혹은 탈-주술화랑 관련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 양반이 베버 테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닐 겁니다. 다만 여기서 왜 인류학이 나오느냐가 흥미로운 포인트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 양반은 역사학계에서 인류학과 역사학을 결합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람 제자 중에 앨런 맥팔레인이라고 있는데 이 양반은 인류학과 출신이기도 하고요...

이 양반 자체는 잭 구디와 다르게 인류학과 무관하고, 인류학자들의 반응도 심드렁했던 거 같은데(특히 기어츠가 비판한 걸 보면 좀 어처구니 없더군요.... 학자들의 기싸움은 언제나 좀 유치합니다...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아서 비난을 한ㅋㅋㅋ 정작 이 양반은 기어츠를 좋은 쪽으로 많이 인용하는데 말이죠) 이 양반은 인류학을 중시하고, 인류학을 본받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이 양반이 왜 인류학을 탐냈는지를 알 필요가 있겠죠.

이건 지성사의 탄생과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사적이고, 맑스주의에 경도된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맑스주의는 이상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포착할 조건들을 중시한 조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학에서는 “시대” 구별이 중요합니다.

즉 내가 어느 시대를 다루는지를 이해해야하고, 바로 그 시대를 맥락화하는 것 자체가 역사학적 탐구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장기 18세기” 이런 얘기가 다 그래서 나오는 거에요.

18세기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겁니다.

18세기의 다양함을 통제할 특정한 조건들을 포착하고, 해당 조건을 통해 18세기를 구축하고 구획짓는 것이죠.

그러니 명예혁명부터 프랑스 혁명 시작까지 18세기로 잡는 것과, 명예혁명부터 프랑스 혁명의 끝까지를 18세기로 잡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 되죠.

“18세기”란 구획을 맥락화하는 조건을 다르게 잡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암튼 맑스주의적 역사학에서는 저런 조건을 경제적 조건을 통해 구축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런 조건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맥락이 있고, 그런 맥락을 포획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을 탐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그러한 조건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조건들을 토대로 학문적인 탐구가 가능한지가 될 겁니다.

 

이 양반은 “사회” 자체를 탐구하고 싶어한 것인데, 문제는 사회를 이루는 핵-본질-실체가 없다는 것이죠.(뭐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ㅋㅋ)

잠깐 여기서 딴 얘기로 세자면 이러합니다.

 

세진 샘은 모스를 비판했지만, 브루노 카르센티의 <마르셀 모스, 총체적 사회라는 진리>는 다른 진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진 샘 비판이 통하지 않을 방향으로, 혹은 세진 샘의 비판을 다 포괄한 방식으로 모스를 해석하는 것이죠.

사회란 것은 너무 복잡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의 무엇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회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계 맺기를 추측하고, 이들을 통해서 사회란 것을 구축해내야만 “사회적 사실” 따위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이죠.

카르센티는 모스는 그러한 작업을 한 것이고, 증여가 무엇인지, 증여로 정말 모든 사회가 포괄될 수 있는지를 단정 짓지 않고, 그러한 가능성을 열기 위해 실험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뭐가 되었든 비교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사회”라고 부를 무엇인가가 포착되고, 그러한 사회를 경유해야만 특정한 사회를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키스 토마스도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양반의 서술을 보시면 알겠지만, 단순한 게 없고, 복잡성은 언제나 모순과 역설로 드러납니다.

저 또한 이 사람이 가져온 증거들을 보고 나서야, 17세기 영국 땅에서, “그리스도교”란 것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글에는 한편으로는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을 통해 엄청난 열성 기독교 정신이 등장한 것도 다뤄지지만, 반대로 그런 것과 완전히 무관한, 통제되지 않는 다른 얼굴들도 엄청 드러납니다.

청교도주의는 마법을 배척하고, 그러한 설명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마법이 융성하고, 가장 광신적인 마법주의적 운동도 청교도들 사이에서 등장했었죠.

키스 토마스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바로 이러한 역설과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류학자는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해석보다는 상호모순적인 설명(paradoxical explanations)을 적용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이런 패러독스는 잘만 적용한다면 역사가에게 이미 상식적이라고 알려진 것을 새로 분석하게 하는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Thomas, "History and Anthropology," Past & Present 24 (1963)

 

이 양반은 이런 모순적인 사실, 혹은 풍부한 사실 속에서 통일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요소를 포착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사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고라고 하면 좀 거창하고, 걍 욕구, 욕망, 믿음 등으로 말해질 수 있는 무엇이죠.

 

키스 토마스가 은유로 제시한 것인지 실례로 제시한 것이 모를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꿈입니다. 이상한 꿈은 어느 시대든 존재하고, 그런 꿈을 꾸면 사람들을 싱숭생숭해합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이나, 그러한 꿈을 가지고 어떤 생각이나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시대적인 현상이죠. 그게 시대를 단일하게 만들 그런 본질, 실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바운더리는 정해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현상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 사례가 바로 마법과 마법의 쇠퇴 따위가 되는 겁니다.

 

이 양반은 그러니 심리적 현상에도 주목하고,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현대 정신의학과 비교하여 설명하곤 합니다. 즉 오늘날(정확히는 키스 토마스 당대) 우리가 정신분석학과 관계 맺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과 당대에 주술사와 해당 시대의 인물들이 관계 맺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것이죠. 다만 이러한 비교는 본질 포착이라기보다는, 그러한 현상이 그럴 법하다는 것을(요즘에도 그러잖아?), 혹은 그러한 현상을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때(인류학 연구를 보니 어떤 민족은 안 그런다고 하잖아?) 보통 등장합니다.

 

이 양반이 마법(사실 마법은 너무 넓습니다. 이 양반은 매우 섬세하게 활동들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좀 다 언급하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에도 주목하지만, 마법을 기능으로 환원하진 않습니다. 종교로 지배되는 것 같은 시대 속에서 종교와 이질적이면서도 친연성 있는 다수의 활동이 있고, 이러한 활동들과 종교가 어떤 관련을 맺었는지, 종교 개혁을 통해서 종교가 바뀌자 그러한 활동들과 종교들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고 어떤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을 그런 변화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했는지(새로운 유형의 사건이 등장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런 접근을 취하다보니 전 좀 도움이 안 되는 부분도 큽니다ㅋㅋ

이 사람의 큰 서사는 제가 활용하기에는 좀 맥빠질? 그런 서사입니다.

결정론자가 아니기도 하고, 인과 요소 중 무엇이 우선되는지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심스러우니 그럴 수밖에 없죠. 다만 이게 훌륭한 역사 서술, 인류학 서술이긴 할 겁니다.

 

이 책의 섬세함이 얼마나 좋은지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이 책에서 다뤄지는 마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마법은 이거다!”, “과학은 이거다!” 식의 구도가 없습니다.(참고로 기어츠는 얘가 이런 구별을 갖고 있다고 욕했습니다... 븅신 새끼...)

외려 그런 구별 의식 자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 양반이 보여주듯, 주술과 종교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16세기에 등장합니다. 키스 토마스는 이러한 시도가 19세기 인류학의 구별 시도와 비교해볼 만한 것 같다는 언급도 덧붙입니다.

그러니 당대의 용어로 활동들이 어떻게 분류되었고,

해당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였는지에 집중하죠.

민중적 주술은 재판기록을 가지고 하고, 좀 더 지성적 활동들은 책을 통해서 하고 그런 식이죠.

여기서 재미난 사례 중 하나는 점성술입니다.

점성술을 수행한 사람들의 장부가 남아있는데, 그걸 가지고,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의뢰를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러니 점성술을 형식적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의뢰 했는지를 가지고, 사람들이 점성술사에게 원했던 게 무엇이고, 점성술사는 어떤 앎을 가지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식의 분류를 키스 토마스는 굉장히 꼼꼼하게 수행해줍니다.

 

뭐 이런 탐구를 통해 당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믿음들이 다양했다는 것과, 그 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흐름 또한 발견할 수 있죠....

이 양반의 2000년대 작업물이 <The Ends of Life>인 것은 우연이 아니죠...

믿음과 믿음 속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누구였고,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뭐 이런 걸 추적하는 것이니까요ㅋㅋ

 

 

암튼 그래서 일단 민족지로 볼 만한 책이란 것은 확실합니다.

이 양반은 그래서 인류학과 역사학의 차이를 약간 신체적 차이로 구별합니다.

현장에 가보지 않고 연구할 수밖에 없어서 다르다, 인류학의 사회는 그래도 좀 닫힌 사회에 가까워 교류 연구는 최소화할 수 있는데 근대 영국은 교류가 활발해서 경계 나누기가 어렵다 따위의 차이 정도만 언급합니다.

다만 인류학자들의 통찰에 기반해서 논리 전개를 하기보다는, 역사학의 연구사 맥락 속에서 사료에 기반해서 자신의 연구를 기술하다가, 특정한 부분, 즉 여기서 어떤 복합적 사태를 이해할 때 설명이 어려운 부분에서 인류학을 소환해서 넘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환이 언제나 인류학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인류학적 추론”이라고 할 법한 것을 가지고, 해당 문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맑스주의로 포괄되지 않을 역사기술이 가능하기 위해서 탐구될 수 있는 조건을, 인류학을 경유해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스키너가 화행론에서 가져온 것과 비교하면 됩니다)

 

사실 저런 기능 문제에서 좀 눈물 날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아마 이걸 가지고 세르토랑 비교하면 좋을 겁니다.

 

키스 토마스가 다루는 시대는 <루됭의 마귀들림> 시대이고, 이 양반도 마귀들림을 다룹니다.어떤 것을 “마귀들림”이라고 불렀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기소했고,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따위를 섬세하게 따라가죠...(사실 이런 점에서 세르토 같은 양반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입니다. 역사학적인 기술,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을 잘해주거든요)

 

토마스가 지적하듯 이는 복잡한 현상이었는데, 영국 맥락에서 중요한 한 특징은(다른 지역은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고, 이 특징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마녀사냥”의 주체가 민중이었단 것이죠.

 

판사들은 그런 것을 최대한 거부하려고 노력했고, 유죄 판결의 경우에도 유죄 선고를 하지 않을 경우 폭동이 일어날까 유죄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고 그랬습니다....

당시 재판에서, 재판 비용을 피고가 치러야하는데, 피고는 대체로 가난뱅이었고, 피고가 돈을 못 내면 마을이 부담해야하는데도 그랬다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많지만, 좀 단순화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종교개혁을 통해서 미신 타파가 이루어지고, 교회 주도의 퇴마 및 착한 주술이 미신으로 몰려 사라지죠.

그런데 그런 미신적 활동은 사회적인 욕구에 부합하는 거였는데, 그걸 없애고, 그저 신앙으로 버티라고 하니 사람들이 못 견디는 것이죠... 그러니 정신 이상도 늘고 그랬습니다....(사실 이런 사례 중 좀 눈물 나는 사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별 볼 일 없는 노파들 중에 몇몇은 악마적 생명체-두꺼비 같은 거-와 같이 산다고 기소되곤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동물에 정붙이고 살았다는 것을 언급하더군요. 그리고 그 현대적 사례로 파리를 말동무로 삼으며 진심으로 그것을 돌보는 노파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숙연...)

 

뭐 저런 상황이니, 외려 반기독교적, 비기독교적 주술이 나왔던 것이고, 그런 주술들을 빌미로 공격적인 행동들이 터져나온 것이죠....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카톨릭이 저런 것을 처치할 수 있어서 개종한 사람도 있습니다. 루됭 사태를 카톨릭이 잘 마무리했다 이거죠....

 

암튼 저런 민중들의 “변용”, “이탈”, “이종학” 따위에 세르토처럼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거기도 하지만... 전 좀 저런 사태를 잘 다루는 기법을 고민하는 게 나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서 르네 지라르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거 같네요.

지라르는 저걸 다루기 위해 연구한 겁니다.

사는 것은 어렵고(키스 토마스 책 1장은 <환경>인데, 당대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문제들은 실질적으로 해결되거나, 정신적으로 극복될 필요가 있죠. 그런 극복의 모델이 얼마나 좋은지를, 그게 얼마나 효과적이고, 나쁘지 않은지(희생자를 양산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공격성을 분출할 수 있는) 연구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이거죠...

 

키스 토마스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지만, 심리라는 실제, 충동이라는 실제는 중요한 조건이죠... 지라르는 그런 것을 통해 이해와 설명 이상의 것을, 기능성을 좀 많이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심 됩니다. 키스 토마스도 기능성을 어느 정도 말하지만, 지라르는 좀 세게 가고, 그런 기능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사고 모형들을 어느 정도 범례화할 수 있고 비교해볼 만하다는 주장까지 나아간 것입니다(신화 유형들을 통해 희생자 제작 메커니즘을 비교하여 “원형들”을 솎아냅니다)

 

뭐 이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지라르가 왜 레비-스트로스를 그토록 싫어했는지 좀 이해될 겁니다....

 

 

암튼 키스 토마스는 저런 것까진 가지 않지만, 적어도 저런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저런 것들을 매개로 “사회”란 것을, 총체적 사실로서 제시하진 않더라도, 그 다양성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보심 될 듯합니다....(그러니 이를 욕하는 기어츠는 정말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것이죠... 외려 키스 토마스는 클룩혼이 추론할 때, 현대나 서양에 대해서 너무 일반화하고 본인의 구별법을 투사한다고 비판합니다...)

 

 

뭐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세르토가 비난의 대상일 것은 없습니다. 키스 토마스 저작에서도 민중은 꽤나 중요한, 단일체가 아니고 얼굴이 너무 많아 하나로 불리진 않지만, 행위자이고, 세르토가 발견하려고 한 것을 저 또한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세르토를 단순하게 읽으면 위험하긴 하지만요. 세상이 바뀌고, 그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공간적이지 않은, 정신적인 탈출이 가능해야한다는 것에 저 또한 세르토에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 17세기의 신비주의 사상을 한 가지 모범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 슬프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서요....

 

 

사실 요 문제를 뒤집으면 이런 것이 됩니다.

김실장 유튜브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고인물 방지와 신규 유입 촉진이잖아요.

정신-문화도 마찬가지란 것이죠.

학문이나 고급문화란 것도 뉴비가 계속 유입되어야하고 그게 고인물화가 심해서 신규 유입 장벽이 안 되야만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 학문과 문화도 저런 게 심해요... 그래서 반문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사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도 선해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근대가 더 올바른 길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판 같은 것은 근대가 덜 되어서, 근대적 사상과 실천의 진짜 맥락만 알면 알아서 해결되는 문제긴 합니다.

하지만 이걸 역사학으로 보자고 하면 고인물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짬이 생명입니다. 수학 같은 건 피지컬 싸움이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인문학은 걍 아냐 모르냐에요... 특별한 이해력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제가 “이걸 왜 모르지?”라고 반응하는 건 이해되면서도 바보 같은 일인 것이죠. 이해하는 게 어렵진 않지만, 인문학의 파편들이 많아야만 알 수 있는 게 있고, 이건 시간 투입 싸움이거든요.

즉 시간이 지분이 커요.

그리고 저런 시간은 심지어 문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버프 효과....)

격차가 심화되는 형태가 생기죠.

때문에 저런 걸 잘라낼 필요가 있는 거에요.

너무 피지컬 싸움으로, 너무 시간 투입 싸움으로, 너무 돈 투입 싸움으로 가지 않게 말이죠.

그러니 현대 철학자들이 고대, 중세, 근대 철학은 하나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은, 바로 저런 지분을 잘라내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고, 그게 갖는 이점도 있다는 것이죠....

 

저것들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반지성주의가 나오는 겁니다....

호프스태터가 어케 분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지성주의의 한 맥락은 이거에요.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하고, 그런 노력이 투입될 요소 중에 하나는 문화겠죠.

즉, 문화적 재화, 문화적으로 규정되는 앎과 덕을 쌓는 일도 성공을 규정하는 요소란 소리에요.

근데 저 문화적 재화를 충당하는 맥락이 좆같으면? 어차피 해도 안 될 게임이면?

그럼 하기 싫어지는 것이죠.

지들끼리 쑥덕거리는 은어 만들고, 유입은 어렵고, 선조들은 언제나 위대하고 나는 병신일 수밖에 없으면, 그럼 참여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뭐 현대에 등장한 문화 요소가 그러면 더욱 “공정”하냐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닌데, 적어도 지금 기준은 위선, 즉 노력으로 얻으란 소리는 안 한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죠....

 

 

암튼 그러니 키스 토마스 작업으로부터 앎의 양가성, 반지성주의, 학문의 실천성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단 소리가 되겠습니다....

 

 

P.S. 키스 니거스가 생각났다는 건 이런 겁니다. 대중문화는 특정 매체를 통해서, 특정 장르로 국한되어서 연구될 필요가 있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대중문화 일반보다는 락의 역사가 더 낫다 이거죠. 근데 저런 장르에 국한될 때면, 저런 다양성, 사회적 니즈가 안 보이게 되는 듯합니다. 결국 “사회”란 것을 경유해야 보이는 뭔가가 있고, 바로 이걸 통해서 보아야할 게 있으니, 세진 샘의 비판은 과도하단 소리가 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경계를 축소해서만 보면, 진정한 역동성을 못 보게 되지 않나 이런 얘기죠.... 특정 장르가 그 자체로 무슨 욕망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다만 그런 다수의 활동들 속에서 어떤 욕망이 그늘져있는지는 언제나 고민해볼 필요가 있고, 이것은 기술description만을 목적으로 하면 보이지 않는 것 아니냐 이거죠... 규범은 그렇기에 필요하고, 그것은 단순히 사회를 축약하고 환원하여, 자신의 언어에서 순환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라, 자꾸 바깥을 찾아 헤매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단 소리가 되겠습니다... 제가 키스 니거스의 <역사> 챕터에서 느꼈던 불만이 바로 이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걍 “락의 역사”를 서술할 조건들로 제시한 것들이 저같은 젊은 락덕 세대에게 1도 공감 안 갈 그런 거여서 걍 싫었던 거였겠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