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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모런의 <지식의 증류>를 읽고

이하 카톡 복붙


 

오랜만에 책 소개를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읽은 책이 최근의 우리 논쟁과도 관련이 있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추천할 만한 책이라 이렇게 소개글을 올립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브루스 T. 모런이란 과학사가의 <지식의 증류: 연급술, 화학, 그리고 과학혁명>입니다. 이 책은 2005년에 하버드 출판부에서 출간된 책이고, 2006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번역의 질 또한 괜찮은 편입니다.(물론 아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절대 비난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입니다. 책 뒤에 수록된 인물 해설만 봐도 공들인 게 느껴집니다)

 

이 저자는 “화학”의 역사에 대해 약간은 다른 역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저자가 굉장히 이상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이 사람이 인용하는 선행 연구들도 탄탄한 편이고, 고유서가 출판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옥스퍼드 초간편 입문 시리즈의 <과학혁명>의 저자 또한 이 사람의 “선행연구자” 중 한 명이거든요. 일단 인용되는 문헌들도 고전적인 저작부터 00년대의 저작까지 다양하고, 이 사람은 대체로 후대의 연구들의 관점에서 좀 더 폭 넓은 시각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뜸을 들였으니 본격적으로 얘기해보죠. 이 사람은 라부아지에를 중심으로 “화학혁명”을 서술하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탈피하여, 화학의 역사를 전통적인 과학혁명의 중요한 한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저자가 라부아지에를 평가절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라부아지에의 “혁신”이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전에 확립된, 그러한 혁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확고하게 지탱해줄 수 있는 토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하고, 이것이 17세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여러 물리학적 혁명가들이 연금술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식의 보조적 위치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연금술-화학이 갖는 문화적인 영향력은 학문 외적인 것을 넘어서 학문 내적이기까지 하며, 그 힘을 절대 간과할 수 없거든요.(혹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뭐 이런 관점도 전 좀 신선하다고 느꼈는데, 저자는 여기에 ‘과학혁명’이란 역사적 탐구에 사용되는 “은유”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말하고, 자신의 작업에서 과학혁명이란 은유를 통해서만 보일 수 있었던 것이 분명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마 이건 과학사 내부의 “과학혁명은 실재하는가?” 논쟁과 관련 있을 듯하네요.

 

일단 본격적으로 책 소개에 들어가기 앞서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를 간략히 언급하고, “연금술”이란 것에 갖는 편견들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엘리아데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를 보고 연금술 뽕을 마셨기 때문이었죠. 엘리아데는 워낙 시공간을 넘나들기 때문에, 저는 좀 더 서양지성사 분석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언어들을 알려주는 책을 구했고, 그런 책 중에 하나가 바로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연금술”에 대해서 약간 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연금술 자체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형성되어 전파된 것이 맞습니다. 아마도 고대 페르시아의 마법 전통을 집대성한 것일 것이고, 그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집대성 및 발전되어 하나의 체계적인 언어로 중세 유럽에 전파된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전파 경로는 후에 서술될 라몬 룰(Ramon Llull)처럼 아랍인->유럽인->아랍에 그리스도교 전도하러 출정하기도 하는,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문화적 갈등기에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혼종적인 사람들을 통해 유럽에 전파된 것이겠죠. 그런데 이러한 연금술이 고유한 언어, 다른 언어와 구별되고, 다른 언어를 배제하는 언어가 아니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연금술은 “분리의 기술”이지만, 정작 연금술이라는 학문은 잡탕학문이었습니다. 연금술의 잡탕성은 연금술의 토대가 된 주술 언어의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엘리아데가 보여주듯이 주술언어들은 상징어와 활동을 토대로 체계화를 이루는데, 이러한 체계들은 대체로 유사한 상징어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 이러한 유사성을 하나의 중심어의 전파로 설명하든, 상호작용을 통한 수렴으로 설명하든, 유사 환경에 따른 수렴진화로 설명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엘리아데 또한 이건 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만 엘리아데는 매우 합리적인 인물입니다...) 뭐가 되었든 이러한 언어들이 유사해서 적당히 이어 붙이기 쉽다는 것이고, 이러한 언어들이 이종교배가 쉬워 잘 섞여들어간다는 소리죠. 연금술의 유입 이후 연금술의 언어는 한편으로는 성배신화와 결합해서 성배신화적 연금술, 연금술적 성배신화를 이루기도 하고(성배신화 자체가 주술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플라톤주의랑 결합하기도 하고, 민간 주술과 결합하기도, 장인들의 기술적 주술언어(?)와 결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합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연금술사들은 모두 자기만이 진리고 남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길 좋아하기에 서로 베끼면서도 서로 다 다르다고 주장되고 그러합니다. 그러니 —주의란 말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정확히 어떤 테제를 계승하는지, 설혹 특정 저자를 물어뜯더라도, 그 저자의 어떤 테제는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는 게 훨씬 더 유용합니다. 암튼 이러한 혼종성을 염두에 두고 전 그냥 넓은 의미로 이들 전부를 “연금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일단 연금술의 과학화 이전에 연금술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정도 특징 부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연금술이라고 불리던 활동들은 접점이 없는 두 계열로 나눠집니다. 연금술은 변화와 변화의 원인에 관심을 갖는데, 변화 자체와 이를 야기하는 활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체로 민중적이고, 앎의 언어와 무관한 계층의 인물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16세기에 팔린 수많은 연금술 서적들은 생활의 지혜와 특정 기술직의 지혜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굉장히 많이 팔렸고, 독자 또한 주부나 기술자, 장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책들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신비한 앎을 담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앎 덕분에 “늙지 않고” “돈도 많이 벌었다”는 광고 문구를 걸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연금술의 민중성은, 연금술이라는 고매한, 최상의 앎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주장으로 뻗어나갔고, 내 책의 지식을 남에게 비밀로 하면 전수 받을 수 있다고 주장되기도 했습니다.(공식적으로 유통되는 책에 비밀엄수 조항이 있는 것은 이상해보이지만, 이러한 문구는 오늘날에도 마케팅적으로 유용합니다...) 그렇다보니 연금술 저작의 저자가 여성인 경우도 있고, 공주에게 헌정되기도 하고, 연금술은 열려 있는 지식이기에 여성들도 연금술을 할 수 있다는 광고도 가능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실제로 여성이었는지는 역사 속 미스테리겠지만, 어쨌든 여성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출간 했고, 그 책에는 화장품을 조제하는 비법이라던가, 발기부전에 걸린 남편을 치료하는 침실의 지혜와 함께, 연금술적 비밀, 비의, 진리 또한 담겨 있었단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민중친화적 전통과 상반되는 사변적 전통도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연금술은 변화와 변화의 원인에 관심을 갖습니다. 때문에 변화의 원인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상징어, 기호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란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과학적 세계에 살고 있어서 사물들의 종류가 매우 잘 분류되어 있지만, 이 시대에는 똑같은 흙이 똑같지 않았고, 비슷해보이는 현상이 실제로 같은지 다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뭐 이런 이유 때문에 “유비”가 중요해졌던 것이죠. 하지만 유비를 위해서도 중심이 되는 무엇은 필요했고, 그것이 상징어나 기호가 되었던 것이죠. 때문에 잡다한, 서로 구별되는지 불명확한, 여러 현상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엮는 상징을 알고, 그러한 상징들의 관계를 이해해서 변화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지적인 활동이었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도 했고요. 앞서 언급된 라몬 룰의 저작은 안 읽은 지식인이 없다고 할 만큼 당대에 빅히트를 쳤는데,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바로 상징어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기호로 확립하고, 그러한 기호들을 조작하는 규칙들을 통해, 변화의 원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규칙을 “창출”해내는 것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창출이란 말은 invention의 어원이 될 무엇이고, 라몬 룰은 수사학의 “발견” 단계를 기호조작법을 통해 확립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실제로 수사학의 역사에서 라몬 룰은 매우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경향이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것과, 이러한 하나의 경향이 “학문”의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됩니다. 전자는 뭐 쉽게 설명되죠. 16세기에 민속지 보고가 유행해서 너도 나도 저기 저 먼 곳에 이러한 놈들이 이러고 살고 있다더라를 읊었듯이, 출판의 발전으로 일종의 과학적, 화학적 보고도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는 호기심을 채우는 새롭고 기이한 무엇을 넘어서, 효용성을 가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민중적 연금술은 실용적이었고, 그런 경향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실용성 또한 보고할 테니까요. 이러한 영향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의학이었습니다. 파라켈수스 같은 인물이 의학사에 중요한 것은 그의 “화학적 의학” 혹은 “의화학” 때문입니다. 그는 고대의 4원소설을 부정하고 자신의 3원소설을 주창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고대보다 본인이 낫다는 주장 이상을 뜻했습니다. 지수화풍은 질료처럼 보이지만, 여러 의미에서 질료가 아닙니다. 감각적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단순 질료로 환원되지 않는 속성들이 부여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자연종과 같은 실체를 인정해서, 단순히 지수화풍으로 자연 일반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체계는 그런 점에서 매우 동물학적이죠. 파라켈수스는 매우 애매한 언어로 세 원소를 물질적인 무엇으로 규정합니다. 뭐 유황 수은 소금 이런 것이죠. 이러한 물질은 한편으로는 물질이지만, 상징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상징이 매우 물질적이란 게 중요합니다. 유황은 불타는 것 및 불타게 하는 힘을, 수은은 증발하는 것 및 증발하게 하는 힘을, 소금은 결정화되는 것 및 결정화하는 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라켈수스는 굉장히 물질적인 언어로 자연세계에 접근한 것이고, 이러한 언어로 자연 전체가 이해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의화학적인 성과로 의학 내부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앎 전반,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이러한 물질적인 관점을 주장한 것이거든요. 프랑스 파리 대학의 의학 대학 내부의 논쟁 구도에서 친-파라켈수스파들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의학이 연금술-화학의 일부이지, 연금술 및 화학이 의학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전까지 연금술과 화학이 의사들의 약처방에 도움을 주는 보조적 기술에 불과했겠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중세의 사변적인 연금술사들이 주창한 것처럼 연금술은 학문 그 자체고, 다른 것들이 여기에 복속되어야한다고 이들은 주장했습니다. 뭐 이런 주장은 당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이단 문제 밥그릇 문제 등등을 야기한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 되겠죠.

 

이러한 논쟁에서 우리는 두 경향의 화합의 유용함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금술은 한편으로는 매우 실용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게다가 관찰에, 실험에 의거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기법들은 점점 발전하고 있었고, 이전의 애매모호한 상징 언어들의 늪에서 벗어나 연금술 저작들은 정밀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즉 실용성을 증대시킬만한 기예를 확보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보고들의 잡다함에 질서를 부여할 언어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죠. 당장 저 새끼는 사기꾼 내가 참 연금술사라고 주장하려면, 쟤가 무엇을 틀렸는지 제대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교차검증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고, 실험을 시연하면서 눈으로 확인시켜준다거나, 아니면 왜 이러한 해석(이론적인?)이 옳은지를 검증시키는 방법(“환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연금술은 실용적 지식, 관찰, 실험 등과 결합한 체계로 발전해나갔고, 또한 이러한 언어들로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곤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득이 되는 것은 우리라는 얘기지요.

 

이러한 언어들을 좀 더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일종의 공화정의 은유를 사용해 호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의 연금술사들은 전제정적이라, 독자들은 “창부”와 “노예”로 부렸지만, 자실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들은 이러한 교환과 협력을 증대시켜 “인류의 이익”을 증대시킨다는 그런 소리를 합니다. 뭐 이러한 언어도 흥미롭지만, 좀 더 물질적 언어를 가진 연금술이 “친화력”, “공명(sympathy)”, “이끌림”, “관계”, “능동적 원리” 따위의 말을 사용하길 좋아했으니 이러한 언어가 이상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뭐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파라켈수스가 악의 축이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그는 <왕도>를 작성한 “군주정체적 인물”로 낙인 찍힙니다)

 

이제부터 진짜배기 문제를 다뤄보죠. 바로 연금술의 화학화입니다. 이전까지 ‘연금술’과 ‘화학’은 비슷한 단어로 쓰였습니다.(17세기 초반 기준이며, 이것이 <화학강의> 저자의 소개입니다) 물론 연금술은 보편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화학은 그 밑에 속한 무엇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뭐가 되었든 둘은 크게는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정에서 약팔이로 활동하는 것을 넘어서, 학문계, 즉, 대학에 연금술-화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연금술이라는 넓은 영역의 부분에 불과한 화학을 넓혀, 오히려 연금술을 화학의 부분으로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니 “연금술=금이나 만들려는 망상”이라는 구도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연금술의 보편지식으로서의 역할을 뺏어오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화학의 원리”죠. 여기서 약간의 이상야릇함이 있지만, 우리는 기계론이 그러한 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에게 기계론은 합리주의, 물질주의의 극치이지만, 당대에는, 심지어 18세기 말까지도 기계론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연금술사들이 적극적으로 기계론을 차용해 연금술적 “원리”를 증명하였거든요. 연금술에서 등장하는 저 이상한 물질적 원리는 한편으로는 물질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이었고, 물질계를 가능케 할 원리로 “기하학적 원리”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 아래에서 이러한 영적 원리는 무차별적으로 도입됩니다. 때문에 세계는 물질이라는, 입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이들의 모든 활동은 “작용인”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주장과, 영적인 원리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주장이 양립 가능했고, 오히려 영적 원리의 실재성을 그러한 “과학적 활동”, “실험”, “관찰”, “증명”이 입증한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뭐 당장 왕립학회의 보일이나 뉴튼은 자신의 과학적 입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 신학적 문제를 고려하였고, 신학적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자신의 관점이야말로 정통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들은 심지어 그러한 이유에서 과학을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게 참 신앙인을 길러낸다고요.(뉴튼에게 있어 물질의 상호작용은 신의 역동의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물질의 기하학적 성질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거든요. 그래서 뉴튼은 공간=신의 편재라 주장하고 자신의 과학을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호소하고, 과학을 그리스도교 호교론에 사용한 것이죠)

 

아무튼 이러한 원리 확립에서 기계론은 매우매우 애매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편으로 화학은 보편지식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러한 성질들을 분석할 실재의 원리로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학에서 다뤄지는 게 당장 기계론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뭐 여기에는 여러 가지 대처법이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화학은 기계론 철학 그 자체이지만, 우리의 연금술적 원리는 아직 부족하여,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탐구하고, 발견해내는 역할 정도만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학은 물리학과 동일하고, 화학의 고유한 영역은 과도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 과도기인 것은 아닌 게, 당장 물리학적 현상들도 화학적 원리 없이 설명되지 않는(질량이나 인력 등이 설명 안 된다는 점에서) 상황이었고, 일차적으로 이러한 “친화력”들을 목록표로 만들고, 그 성질을 분석하되, 이들은 장기적으로 좀 더 일반적인 물리학적인 원리로 분석해내자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이러한 목표는 데카르트주의 입장에서는 기하학적 원리로 물리적으로 환원해낸다고 생각했을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그게 진짜 화학적 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 애초에 연금술이 분리의 학문, 잡다한 것들로부터 순수한 것들을 분리해내는 것을 뜻했고, 이 순수한 것은 영적인 것, 힘 있는 것, 능동적인 것, 영원한 것 따위를 뜻했으니, 결국 “힘”은 화학적이라는 그런 소리가 되겠죠. 뉴튼주의는 이러한 입장을 따르되, 이러한 입장을 좀 더 수학적으로 주창합니다. 뭐가 되었든 이러한 인력은 도입해야하는데, 이것의 근본적 인과가 무엇인지를 따지지 말고 현상-수학화로 보자 이거죠. 이러한 관점에서는 근본적 인과는 무지에 놓이지만, 이것은 신의 섭리인 것이니 우리의 신앙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우리는 “가설”을 거부하고, 현상=수학화를 그 목적으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력의 도입이 마법적이란 주장에 대해 뉴튼 및 뉴튼주의자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마법적 힘을 도입하지만 그 마법적 힘이 자신의 그 인력 그 자체는 아니고, 마법적인, 보편적인 힘이 드러나는 특정 현상을 자신이 포착해낸 것이고, 그 현상의 이름이 인력일 뿐이라는 그런 소리죠.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러한 반뉴튼주의 논박이 <화학강의>에서 주창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학은 바로 인력이라는, 하여간 “힘”을 다루는 무엇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고, 화학은 근본적으로 물리학과 구별되지 않는 보편학이라는 관점이 은근 깔려 있는 것이죠.

 

모런은 기계학적 원리를 화학의 원리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그 해석을 거부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모든 17세기 화학 옹호자들은 그러한 주장으로 화학의 정당성 및 한계를 주창합니다. 그리고 물리학이란 것도 정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고, 운동학 자체로는 당장 여러 현상이 설명 안 되니, 애초에 물리학이란 것이 명확히 확립될 수 있는지 조차 문제시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뭐 이 책에서 본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이 강하게 과학을 규정한다는 다니엘 가버가 반박하지 못 할 역사적 사실은, 데카르트가 통 속의 물이 빠지는 현상을 설명할 때, 운동학 이상의, 힘을 도입한 동역학 법칙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 본인조차 순수한 운동학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당대인들에게는 그것이 “화학”의 도입을 요청하는 현상의 목소리로 여겨졌던 것이죠. 뭐 암튼 그런 점에서 화학의 역사는 물리학의 역사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자율성을 지닌 특정한 역사로서 소위 “과학혁명기”에서 추방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그러한 과학혁명을 가능케 하는 굉장히 중요한 이론적, 실천적 작업의 토대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게 모런의 주장입니다. 그가 마가렛 제이콥을 인용하면서 말하듯, 당대의 과학자들은 코스모폴리탄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극경을 넘나들어서가 아니라(물론 국경도 넘나들었습니다), 궁정과 대학 사이를, 민중과 엘리트 사이를, 신학과 과학 사이를, 물질과 영 사이를, 물리학과 화학 사이를 넘나들었기에 코스모폴리탄이란 주장이 되겠습니다. 뭐 그리고 이러한 코스모폴리탄적인 면모를 지탱하는 토대는, 화학 성립에 필요했던 필수적인 요건에서, 화학이라는 학문을 학문으로서 성립시키는 보편적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은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화학은 화학사 이상이라고 할 수 있고, 바로 그러한 주장의 결론이 화학의 역사와 (전통적인) 과학혁명의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는 모런의 주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