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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랑코 벤투리의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서론에 대한 단상: 철학사를 위한 변명

프랑코 벤투리의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서론에 대한 단상: 철학사를 위한 변명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특히 이 책의 서론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어 글을 남긴다.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의 저자 벤투리는 지성사 연구자로, 이 책 또한 지성사 연구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비록 이 책은 강연록으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본문 또한 흥미롭지만, 서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맥락을 정리해주기에 서론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계몽사상의 유토피아와 개혁> 서론은 지성사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짧고도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벤투리는 철학사와 사회사의 연구물들에 매우 신랄하면서도 집약적인 코멘트를 남기면서, 철학사와 사회사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성사가 왜 필요한지를 언급한다. 벤투리의 코멘트를 요약하자면, 철학사는 근원에 대한 집착이, 사회사는 마르크스주의적 (하부 토대) 환원주의 때문에 한계점을 가진다.(특히 사회사에 대한 벤투리의 코멘트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회사가 곧 마르크스주의라는 진단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특수한 의미로 사회사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철학사로 철학사에 대한 벤투리의 비판만을 점검해보도록 하겠다.

벤투리에 따르면 철학사는 '근원Ur'에 대해 집착한다. 철학사가들은 이후의 논의가 등장할 수 있는 배경으로서 개념의 발전을 제시하곤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물 철학자의 사상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이후 논의의 바탕이 되는 개념의 등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사상사 작업을 수행한다. 즉, 거물 철학자의 사상 속에 이후 논쟁의 핵심이 되는 모든 논쟁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고, 이를 밝힘으로써 거물 철학자의 위대함을 옹호하는 것이 철학사가들이 주로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도 이후 논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를 다루지 못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벤투리의 진단은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철학사 저술들은 하나같이 벤투리가 비판하는 방식의 서술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연구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을 보여주며, 이후 모든 논쟁이 "이미" "이 속에" "있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은 근원만을 추적하지, 그것이 어떻게 흘러 나아가 강을 이루고 바다에 도달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위대한 철학자의 위대한 통찰력만을 찬양할 뿐이다.

분명히 이러한 철학사 책들은 많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사의 본질은 아니며, 벤투리가 철학사를 비판하면서 언급한 철학사가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한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여기서 특히 카시러에 대한 벤투리의 비판에 반대한다.

벤투리가 언급한 카시러의 저작은 <계몽주의의 철학>이다. 이 책은 나도 본 책이기에, 벤투리의 주장이 어떤 점에서 어긋났는지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벤투리는 두가지 점에서 카시러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카시러의 작업에 근원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것, 즉, 철학사에서 이미 중요하게 여겨지는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상사적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앞의 한계를 가지기에 카시러의 책은 그러한 사상적 발전의 결과물들이 현실화되는 과정, 특히 정부에 관한 문제와 경제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인물들의 등장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비판을 카시러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카시러가 서술하려고 한 것은 벤투리와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것들이 "누락"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언급될 필요가 없었던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카시러가 도대체 어떤 관심을 갖고 <계몽주의의 철학>을 썼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여기서 카시러의 관심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저작 속에서 등장하는 그의 문제의식이다.) 일단 사실 관계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카시러는 <계몽주의의 철학>에서 이미 유명한 철학자를 다들 다루듯이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당대의 새로운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사실은 예상외로 물리학이다.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물리학이 반박될 수 없는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으면서, 수학적 엄밀성에 기초한 사실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실제로 사실은 복잡한 맥락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는 역사적으로 결정되어야만 한다.(이는 쿤이 많은 사람에게 환기시킨 사실이기도 하다.) 카시러의 주장에 따르면 갈리레이의 과학혁명은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지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범례로서 작동했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성과로 인해 모든 분야에 분석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따져봐야만 확인되는 것이며,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고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이 요소들이 무엇이어야만 하는 가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더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이어야만 한다!)로 분석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한편으로 수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사실들이 사실로서 들어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사실 이외의 사실이 무엇이 있을 수 있냐는 물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식화된 흐름이라기보다는 당대 과학의 성공이 가져온 경험의 변화에 따른 사고와 행위의 변화라는 것이다. 카시러는 <계몽주의의 철학>초반부에서 과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경험의 변화들을 그리고, 그 변화에 따른 자연 개념의 변화, 새로운 자연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학문 등장의 필요성을 그린다. 그리고 나서야 각론으로 들어가고, 각론도 나름의 순서를 갖는다. 카시러는 종교의 변화를 먼저 그린다. 이게 꽤나 중요한 전제들을 보여줘서인데, 종교는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질서고, 종교가 어떻게 타격을 받고, 새로운 신학이 등장했는지를 보이면서 은근 슬쩍 계몽시대의 철학이 가야하는 예정된 길을 슬쩍 내비친다. 세계의 합리성이 무너졌을 때, 무너진 합리성을 재구축할 수 있는 방향이 어디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지는 정해져있는 법이기 때문이다.(종교 다음에 등장하는 역사, 법, 미학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순서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카시러는 사상을 기원을 통해 설명하는 게 아니라, 변화된 시대 속에서 시대적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발전은 본인이 설정한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물음이 해소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처음 등장한 답들이 왜 망할 수밖에 없었고, 성공한 답은 어떤 점에서 성공했는지를 밝히면서 그 사상이 이후에 전제되었던 근거를 대는 것이다. 때문에 카시러는 특정 사상가를 찬양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며, 무엇이 시대정신에 속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맥락 속에서 발전되는 사상들을 하나의 서사로 재구축하는 작업을 한다. 때문에 카시러는 물줄기가 어떻게 분화되는지를 단순 현실만을 통해 보지 않고, 그것의 배후에 존재하는 추상적 구조를 통해서 파악한다. 때문에 현실정치는 카시러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상이 유행했는지는 카시러에게 어느정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실현은 필연적 결과이지 몇몇 행위자의 행위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예컨대 미국혁명 당시 연방주의자의 승리는 어떤 점에서는 기적같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반연방주의자들이 주창한 대표가 국민과 동일하냐는 물음에 대해서, 연방주의자들이 그러한 물음을 씹고 넘길 시대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좋은 국가는 더이상 교육의 장이 아니라 정책의 장이었고, 자연적 귀족이 통치는 연방주의의 장점이지 단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사가 실제로 실현되는지보다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는 기저의 근거를 찾는 게 카시러의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본인은 철학사를 연구하고, 지성사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라 당연히도 벤투리보다는 카시러를 옹호해주고 싶다. 다만 카시러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는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역사적 연구들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카시러가 뛰어난 학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후반에 수행된 뛰어난 역사연구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시대 연구에 대한 재점검들이 있고, 그것들을 반영해서 카시러의 서사가 현대적 연구들을 토대로도 작동할 수 있는지를 검토할 필요성은 분명 있다.(뭐 현대적 연구가 항상 고전적 연구를 뛰어넘는 건 아니다. 이 다음 서평이 될 버나드 마넹의 연구도 굉장히 뛰어나지만, 마넹이 지나가면서 몇번이나 까는 쿨랑주의 연구가 마넹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 서평에서 다룰 예정이다.)

두번째로 필요한 것은 카시러의 서사를 정확하게 서술하는 일이다. 카시러는 역사학자 마인드가 있어서인지 본인의 서사를 정확히 안 밝히는 경향이 있다.(이건 가다머도 마찬가지이다. 가다먼 이 양반은 역사학자도 아닌데 왜 숨기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가 정확히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그의 개별 연구들을 통해 짐작해야하는데, 생각보다 이게 어려운 작업인 걸로 보인다. 왜냐하면 카시러에 대해 말해지는 대부분의 뻘소리가 그의 큰 그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 애초에 카시러야 요즘 시대 연구자들에게는 별 관심도 못받는 게 현실인 것도 사실이지만, 카시러를 읽는 몇몇 사람들도 카시러가 뭔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상징형식의 철학의 2권만 읽으면서 카시러의 신화론 어쩌구 하는 건 제대로 된 연구일 수가 없다.(애초에 그 신화는 그들이 연구하는 신화와 다르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카시러의 연구를 재평가해주기 위해서 카시러가 정확히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밝혀주는 것은 필수 작업이다. 방금 살펴보았듯이 벤투리가 카시러를 비판하는 지점도 사실은 카시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지점이다.(카시러는 기원을 따지는 인물도 아니고, 신구논쟁 속 등장하는 고대를 현재적으로 이해하는 바보도 아니다.) 벤투리의 오해가 벤투리 개인의 문제인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이 카시러의 작업을 벤투리처럼 보거나, 벤투리처럼은 안 봐도 뻘 소리로 보는 걸 보면 카시러의 잘못도 크다. 카시러의 큰 그림, 특히 <인식의 문제>에서 다뤄지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를 요약정리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 같다.


아마 내가 이런 작업을 하게 될 사람인 것 같은데(다른 사람들은 카시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할 일이 많아서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그 사람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밝히려면 이것 저것 많이 봐줘야하는데, 내가 그 정도로 카시러를 볼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다.(일단 난 칸트나 제대로 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