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맥락과 외적 맥락의 구별, 전문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구별은 이미 전문화된 삶 속에서만 정당화되는 이기적 자기정당화에 불과하다.
이론적 사유는 활동적이고, (게걸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럽다. 사유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에는, 그 누구도 사유를 침묵시킬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사유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비록 사유는 그 어떤 형식 체계로 한정되어 담아질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입맛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는 모든 방향에서 사유로 흘러들어오고, 다시 사유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흘러넘친다. 정신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그것의 재료만 바뀔 뿐이다.
스트렌스키는 신화를 이론화하는 자신의 방법을 20세기의 역사적 우연이 만들어낸 환경에 한정지으려 한다. 물론 그의 지적처럼 신화 이론은 역사적 비극 속에서 제도적으로 정당화되는 직업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학적 인생을 성숙시킬 수 없었던, 즉,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해야만 했던 인물들의 삶 속에서 형성되었다. 하지만 직업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간극이 반드시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구체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가 퀜틴 스키너의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지향에 대해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그의 역사적 맥락주의 또한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재료를 모두 공급했다. 이론은 탐욕적인 것이고, 직업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간극은 오직 직업적으로만 정당한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 넘어온 순간부터 흐릿해지고, 결국에는 지워질 수밖에 없는 습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명목상의 경계에 불과하다. 이론이 가진 이중성, 신성과 바라보기, 구조와 현상, 존재와 생성, 성충동과 죽음충동의 간극은 항상 인간에게 이중적인 명령을 내리며, 인간은 그 사이에서 갈등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항상 두 욕망을 모두 지닌다는 것이며, 그것들이 설사 조화될 수 없을지라도 둘 모두 포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베일을 찢고 베일 너머의 대상에 입맞춤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짜낸 베일을 관조하며 그것의 아름다움 속에 침잠하고 싶어 한다. 두 욕망은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으며, 양보할 수 없다. 우리를 갈등하게 하는 두 욕망, 우리를 추동시키는 두 욕망, 이 두 욕망은 충분히 일반적이다. 설사 그것이 무시간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풍파 속에서도 수그러들지 않을 만큼 굳건하다는 점에서 초시간적이다.
그렇다 두 욕망을 동시에 사로잡는 것, 우리가 짜낸 명징한 이론적 직조물을 관조하는 동시에, 그것을 찢고 그 너머의 입술을 탐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영원한 문제이며, 인간 본성의 근원을 이루는 시련의 민낯이다.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적이라면, 그것이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것이지, 특정한 맥락에 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것은 아니다. 스트렌스키 본인이 말하듯 정신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작동한다. 그것의 재료만 바뀔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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