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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코 "중세의 미학"

에코의 "중세의 미학"을 읽었다.


정확히 어떤 동기로 빌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의외로 엄청난 수확을 했다.

다만, 책이 굉장히 얇은 거에 비해서 잘 안 읽히고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고생 좀 했다.

애초에 이 책 자체가 입문-교양서로 쓰였던 게 아니다보니(자세한 사정은 출간을 하며 붙인 에코의 서문에 나온다. 여기서 서양 학자들이 연구서에서 라틴어와 불어를 번역하지 않고 인용하는 풍습이 있음을 문자적으로 확인했다... 연구서에서는 원래 번역하지 않고 인용한다고 한다. 뭐 이제는 번역 없이 인용하는 책을 봐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지만...) 약간의 고생은 감수해야한다.


책 자체는 얇지만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끝내기 때문에 양은 많다. 각각을 요약할 생각은 없고 읽다가 들었던 생각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초월적", "멜랑콜리", "알레고리"란 표현을 사용할 때, 반드시 시대를 생각해야만 한다. 근대 쪽을 볼 때 "초월적", "멜랑콜리", "알레고리"란 표현이 나오면 이것이 중세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단어들이 함의하는 의미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를 보면서 칸트 철학의 "초월"이 중세적 전통뿐만 아니라 수학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그 표현이 중세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이는 전적인 오해였다. 맨처음 낭만주의에 관심이 생겼을 때, 기존의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월을 생각했고, 그런 고찰이 여러 시기에 반복되어 이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그래서 그 당시 나에게 칸트나 낭만주의자나 해석학자나 후설이나 하이데거나 심지어 맥도웰이나 브랜덤도 비슷한 놈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중세 미학을 보면서 이것이 나의 큰 오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에는 삶이 분리되지 않았고 총체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있었다. 따라서 초월은 인식이나 이성을 넘어서는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미가 실재의 것을 반영하고 있고(여기에 주관성은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역이 철학의 영역이며 초월이란 말이 들어갈 영역이다. 물론 이것들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가 섞여 있기 때문에("플라톤주의와 독일관념론"에서 주장되듯 실제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매우 큰 것 같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 같지만, 이후 에카르트에서 전개되는 양상과는 실제로 다르다. 이성은 적어도 우리에게 올바른 것으로 나아가게 해주며, 거짓된 것이 사실인 것은 아님을 보여줄 수 있고(이는 미약하게 해석되어야한다 적어도 그것이 사실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도로...),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에 알레고리는 존재들이 존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미학적 표현으로서 존재와 분리되지 않은 방식으로 등장한다. 즉 미학은 형이상학과 분리되지 않으며, 실천학과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드는 생각이 근대의 알레고리 해석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이후 알레고리 해석의 위험성에 대한 의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성경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윤리적인 생각을 뽑아낼 수 있다면, 결국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요점이 중요한 것이기에 실제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이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스피노자 당대에는 이런 불안은 없었고 19세기에 들어서 이런 불안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사실 19세기 전까지 스피노자는 글 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심을 확인시키지 위해서 한번씩 욕하면서 넘어가는 무신론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식 성경읽기는 이성적/철학적/합리적 교육이란 이름 아래에서 로크에게 있어 반복된다. 로크의 교육론에 성경을 공부에 대한 부분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뭐 어쨌든 알레고리 해석=세줄요약의 가능성=텍스트의 필요성 저하라는 도식을 갖고 있던 나로서 중세인들이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인들에게 있어 알레고리 해석은 추출이 아니라 확인이며, 존재론과 윤리학이 분리되지 않기에 그것이 문자적인 의미를 훼손시키거나 축소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서사성으로 성경을 읽는 시도들이 어째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존재론적 맥락 없이 오직 서사로만 텍스트를 읽는데 어떻게 신성함과 가치가 솟아 나올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 사람들은 고전적인 성경 독해가 존재론적인 개입을 전제하고 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창세기의 내용이 오늘날의 실증주의적 혹은 과학주의적 명제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한 픽션과는 달랐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구송전통에서 반복되는 진실성의 신화 서술이나 중세의 알레고리 해석을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멜랑콜리 또한 오늘날의 우울함과 달리 세계의 부조리나 거부가 아니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덧없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서 무신앙의 징표가 아니라 신앙의 징표로 환희에 대한 추구로 이어질 수 있는 내면 상태이다.(이쯤되면 페브르가 생각난다)

정말로 중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해야 근대적 개념들의 근대적 종차를 이해할 수 있다...(공부할 게 늘어 기분이 좋지 않다)


흥미로웠던 것은 중세 사상의 외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내적인 이유에서도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체계 사상 자체가 확장성이 떨어졌기에 사회의 발전을 감내하기 어려웠고, 결국 그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으로 유명론과 신비주의가 등장했으며, 이 전통에서 근대 사상은 나오기 시작한다. (홉스와 데카르트에서 느껴지는 유명론 혹은 신비주의 전통의 냄새는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확인시켜준다.) 따라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외적인 요인 없이 사상 내적인 전개로서 이해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즉 권위의 변천이 오직 신대륙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헤겔 그리고 루만으로 이어지는 "쳬계"의 길이 꽤나 유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플라톤의 배신자로서 4명의 철학자들을 비교분석해보고 싶다. 체계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였고 왜 그토록 반복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면 꽤 재밌지 않을까?(생각해보니 스피노자는 체계 사상가라고 보기 어렵긴 하다)


하나 더 추가: 중세와 현대가 비슷하다는 진단이 있다. 에코도 그런 평을 하고, 심지어 김경만 선생 같은 분도 그런 소리를 한다(김경만 선생은 스티븐 툴민에게 이러한 생각을 영향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와 현대의 유사성은 외면적 유사성에 불과하다. 오늘날 총체성은 신화로만 남았으며, 중심 텍스트는 아예 소멸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통합성이 돌아온다고 해서 중세적인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절대로 삶의 통합성이 재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중세와 현대의 유사성은 내면적 유상성으로 볼 수 없으니, 딱히 말해봤자 소용없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