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사 시간에 언급된 책이라 읽게 되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중세의 흑사병으로 인한 영향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내용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기대한 분야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부분이고 부분적으로 박흥식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분야이다. 아마도 교수님의 흑사병에 대한 연구 논문의 참고문헌을 확인해보면 좋은 문헌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흑사병의 귀환이라는 책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흑사병의 귀환이 주장하는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흑사병은 페스트가 아니다." 저자들에 따르면(그리고 나의 지식에 비추어보았을 때) 중세의 흑사병을 페스트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사실상 본 책의 저자 말고는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나는 박흥식 교수님말고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저자들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흥식 교수에 따르면, 중세 흑사병이 페스트로 생각된 이유는 3차 판데믹 당시 전염병의 주범이 페스트였고, 증상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중세 흑사병 또한 페스트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확산된 결과이다. 뛰어난 중세 연구가(이름은 기억 나지 않는다.)가 흑사병을 페스트로 규정짓자, 전염병에 대해서 알기 어려운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선례를 특별한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흑사병의 귀환의 저자들은 한 명은 중세사학자, 한 명은 전염병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선례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흑사병은 페스트가 아니다. 페스트는 쥐 등의 매개물을 중심으로 전염이 되며, 사망률이 흑사병에 비해 낮고, 확산 속도가 늦다. 하지만 흑사병은 인간들 사이에서 비말감염(처음에는 비밀감염인 줄 알았다. 호흡을 통해서 전염되는 감염을 말한다.)을 통해 전염되고, 치사율이 매우 높고, 확산 속도가 빠르다. 저자들에 따르면, 증거 또한 명확한데, 중세에는 쥐가 거의 없었으며(저자에 따르면 유럽에 쥐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러시아로부터 시궁쥐가 도입?된 이후이고, 그 증거로 이전까지는 땅위에 지어진 창고가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땅으로부터 이격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 중세 말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쥐와 쥐 벼룩을 통해 감염이 흑사병이 전파되었다면, 쥐가 없고, 매서운 겨울 덕분에 쥐벼룩이 살 수 없는 환경인 아이슬란드에서 흑사병이 전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흑사병의 독특한 특징이 잠복기가 매우 길며, 잠복기 동안 전염이 된다는 것이다. 보통 30일 이상의 잠복기를 가지고, 5일 안에 죽는다. 그리고 잠복기 동안 전염이 활발하고, 막상 증상이 발생하면 전염성이 떨어진다. 당대에는 흑사병이 비말감염을 통해 전파되며, 잠복기가 길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40일간의 격리 시기를 통해 감염자를 가려냈으며, 처음에는 대처를 못했지만, 감염 위험군을 구별하여 격리를 통해서 감염을 저지하였다. "근대적"이라고 딱지를 붙이기는 뭐하지만, 당시 흑사병에 대한 접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현대인은 잘못된 규정-흑사병은 페스트이다- 때문에 외면하고 있지만) 경험적으로 흑사병의 전염경로와 점염패턴을 파악했으며, 영웅적인 자세로 감염이 발생한 마을을 스스로 봉쇄함으로써 전염을 막기도 하였다.(만약 흑사병이 페스트라면 마을 봉쇄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쥐는 봉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흑사병이 페스트가 아니라는 증거는 매우 많으며, 흑사병을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는 크다.
그러면 흑사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저자들은 흑사병이 아마도 현대의 에볼라와 비슷한 종류의 질환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마도 저자들은 에볼라가 유인원을 통해서 감염된 질환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확답하기 어려울 거 같다. 다만 에볼라와 흑사병의 공통점은 비말감염이라는 점, 출혈성 질병이라는 점(내장이 검게 썩는다), 치사율이 매우 높다는 점, 유인원 등 정글을 통해서 인간에게 간헐점으로 전염된 것이 판데믹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꼽는다. 또한 1차 판데믹(유스티아누스 전염병) 또한 흑사병과 동일한 질병이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이러한 질병에 대해서 중세 이전에 이미 서아시아-북부 아프리카 국가에는 흑사병과 비슷한 종류의 질병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저자들이 꼽는 특이한 점은, 흑사병에 내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적하는 흑사병 전염의 역사에 따르면 흑사병에 내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아마도 그러한 유전형이 있으며, 그 유전형이 에이즈에 대한 면역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에이즈에 대핸 내성이 있는 유전형을 유럽인들이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 흑사병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저자들이 이러한 추측을 한 것은 논리 비약이 조금 개입된 것이므로 사실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역사에 따르면 X가 내성이 있었고, 그 자손 또한 에이즈 내성 유전형 A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럽에만 흑사병의 대대적인 전파가 있었고, 어째서 흑사병은 사라진 것일까? 저자들에 따르면 흑사병은 추운 겨울에 전염성이 떨어지고, 건조해도 전염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유럽은 프랑스라는 전염병이 잠복하기 좋은 땅이 있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염병이 확산-축소를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지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서아시아-북부아프리카는 프랑스처럼 흑사병의 냉장고 역할을 할 지역이 마땅찮으며, 감염 또한 상인을 통해서 전파되어야하는데, 이 지역은 도시와 도시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여행 중 상인들이 흑사병에 의해 죽기 때문에 멀리 전파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또한 흑사병이 사라진 것은 지속적인 소빙기의 심화로 전파 속도가 떨어지고, 내성자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전염 가능성이 줄었고, 인구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읽으면서 흑사병이 저자들의 말처럼 이 시대에 새로운 질병으로 부상할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훨씬 더 전파 속도가 빠를 것이며, 흑사병은 잠복기에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초기 통제도 어려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만 흑사병의 효과와 역사적인 계기에 대해서 이 책은 쓰지 않고 있기에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흑사병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박흥식 교수의 주장 때문이었다. 흑사병은 중세와 근대 사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1. 사회적 배려층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함에 따라 도약의 가능성이 생겼다. 2. 인구감소로 인해 1인당 GDP가 급증하였다. 3. 고전에 대한 믿음보다 관찰에 근거한 경험주의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박흥식 교수가 주장하진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점도 꼽을 수 있다. 4. 인구 변화로 인해 지주와 농노의 관계가 변화하였다. 5. 유럽의 상권이 특정적으로 변모하였다.(특정 지역에서 특정 교역을 담당하는 식으로) 6.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고 능력없는 종교인이 늘어났다. 7. 세대교체가 활발함에 따라 새로운 기술(복식부기 등)이 쉽게 수용되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이후 근대로의 전환에서 중요한 계기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흑사병 시기동안 침체만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흑사병이 남풍을 타고 올라온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남쪽 창을 폐쇄하고 태피스트리를 거는 것이 유행함에 따라 특정사업은 매우 호경기를 맞는다. 또한 사망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인구는 유입인구로 인해 줄지 않았으며, 상업이 도시가 축소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흑사병이 근대 사회의 탄생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근대성을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해보인다. 게다가 1차 판데믹이 비잔티움 제국의 재기를 막고 이슬람 세력의 발흥을 가능케 했다는 점(기존의 세력인 비잔티움 제국은 전염병으로 인해 상업을 중심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새로운 세력은 퍼져나갈 수 있었음)을 고려해보았을 떄, 이러한 설명을 도입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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