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구술성과 문자성, 매체혁명

최근 어느 강연에 갔다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대조하는 것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연에서 헤블록의 논의를 다루지만, 이를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예로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자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헤블록의 논의가 고대철학의 논의에서 그다지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헤블록에 대해 오해가 많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고대철학자들은 헤블록의 연구성과를 칭송함과 동시에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 참조하진 않는다)

헤블록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고 말할 때, 이는 말과 글을 대립시키는 것과 상관없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혹은 구술성과 문자성의 대립은, 말과 글을 포함해서 모든 작문에 해당된다. 어떻게 글을 쓰는가, 어떻게 말을 하는가, 무엇이 올바른 글쓰기냐, 무엇이 올바른 말하기냐에 대한 문제이고, 여기에서 말과 글은 표면적인 대립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자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말을 강조할 수도, 구술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글을 강조할 수도 있다.(이는 맥락에 달린 문제에 불과하다)

또한 구술성과 문자성을 대립시킨다고 해서, 이를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구술성이냐 문자성이냐는 단순한 이항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정도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성이다.(그래서 구술성과 문자성이라는 표현을 난 선호한다) 따라서 문자가 발명되었다고 바로 문자문화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문자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문화에 속한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문자성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이를 단계화할 수도, 다양한 양상으로 그릴 수도 있다. 이는 문자성을 하나의 수렴점으로 그려낼 것인가(정보혁명을 중심으로 정보의 실재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흐름을 선택할 것인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그려낼 것인가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헤블록은 다양성과 진전을 동시에 그려낸다. 그는 구술성이 중심이 되었던 호메로스-헤시오도스 시대를 그릴 때에도, 두 저자의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 또한 그려냈다. 마찬가지로 문자성에 권위를 부여한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의 길에서도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을 그려내고 있다. 각 저자들은 문자성과 구술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들 중에 어떤 것이 어떨 때 강조되어야하는지에 따라 고유한 입장으로 해석될 여기가 있다. 헤블록은 이처럼 구술성과 문자성을 이분법적으로 다루지 않고, 여러 양태 속에서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우세한 양상을 띄는가에 따라 다루고 있다.(다만 문자성의 우세는 이오니아 문자에 의존적이라는 것이 헤블록의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계기로 플라톤을 다루는 이유는 플라톤이 문자성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이룩하였고, 이후에는 구술성이 중심된 권위로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문자성의 우세가 비가역적인 단계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성과를 주장하는 게 헤블록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등은 다루지 않는다. 이미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난 후에, 그들의 전통은 문자성에 고정되었기 때문이다.(다만 여기서부터 어떤 문자성이냐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헤블록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꽤나 중요한데, 헤블록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진행된 다른 연구들이 이러한 방식을 전제하고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잭 구디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야생정신 길들이기"란 책에서 문자성과 구술성을 대립시키면서도 그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혼재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문자성과 구술성이 대립하면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는데, 어느쪽이 되었건 그것이 우리 사회를 구성해내는 중요한 언어적 수단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방식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양상을 다르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의 혼재는 이상한 일도 아니며, 과도기적인 일도 아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질 점은 도대체 어떻게 문자성이 구술성을 잠식해나갔냐는 것이며, 비가역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헤블록 또한 이런 관점을 일부 가지고 있다. 그는 문자성의 등장으로 모든 혁명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문자성의 등장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는 논쟁의 대상이었고, 문자성의 옹호자들은 이를 위해 특정한 작문(말하기와 글쓰기를 포함하여)법을 개발해내었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서 구술성을 문자성의 하위로 종속시켰으며, 특정한 문자성을 옹호했다. 다만 헤블록은 이것들이 어째서 비가역적인지는 따지지 않는데, 그의 관심사는 고대의 상황이지(말그대로 그는 플라톤의 등장에 대해 서설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문화적 침투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에릭 헤블록의 책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과 달리 도식적이지도 않고, 관련된 문제를 촉발시킨 위대한 고전이라는 것이다. 브루스 링컨같은 뛰어난 학자도 헤블록이 도식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 지나친 비판이다.(헤블록이 없었다면 링컨의 연구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며, 링컨의 연구와 헤블록의 연구는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 구술성과 문자성을 논할 때, 우리는 어떤 구술성이고, 어떤 문자성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주장을 섣불리 재단하지 말고,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좀 이해했으면 한다.


강연 이후 구술성과 문자성에 대한 대립 문제를 다시한번 상기하게 되었고, 헤블록에게 영향을 받은 이니스, 매클루언 및 매체사가들, 그리고 인쇄문제를 다루는 로제 샤르티에나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 이 문제를 널리 퍼트린 월터 옹의 연구를 검토하기로 마음먹었다.(계속 업데이트 할 예정이긴 하지만 얼마나 빨리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체의 문제는 키틀러의 저작을 본 이후로 항상 염두에 놓고 있는 문제이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설득당해버렸고,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의 광케이블을 깔아야하는 것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그는 99년 강연에서 자신의 연구성과는 쓸모없으며, 이를 듣는 학생들에게 광케이블 까는 일이나 거들라고 말한다...) 하지만 켐브리지 지성가, 특히 스키너의 글쓰기에 대한 강력한 옹호(털리가 스키너의 논의를 정리한 글의 제목처럼, 스키너에게 있어 펜은 힘 쎈 칼The pen is a mighty sword이기도 하다)나 라투르의 논의를 생각해보면, 광케이블을 까는 일만큼이나 글쓰는 일도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인문학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물론 떠날 능력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먼저 아이젠슈타인의 "근대 초의 인쇄혁명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란 제목의 책이 "인쇄 미디어 혁명" 정도로 번역되어 있어 검토해보았다. 번역도 구리고(장담컨대 이 번역의 번역자는 한명이 아니다; 인명이 일관되지 않고 역어가 불안정하다) 주석과 참고문헌 소개글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오역 또한 정말 많다.(역자의 교양수준이 참 한심하다; 그는 과학이나 문예계의 클리셰에는 정말 저능아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번역도 구리지만 편집도 이에 못지 않은데, 영문 인쇄체가 모두 깨지며 글 여백 또한 정말 환장할 지경이다. 그래도 가볍게 검토할 정도는 되고 책 내용은 워낙 좋았기에 참고 읽었다.

아이젠슈타인은 문자성에도 다양한 양상이 가능하며, 인쇄기술이 이를 강하게 변화시킬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어지는 사상들의 변화의 내용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양상에 주목한다. 토마스 쿤은 코페르니쿠스 전후에 천문학 내부에서 큰 사건은 없었다고 말한다. 즉 새로운 관측이나 대단할만한 연구성과가 없다고 말하는데, 아이젠슈타인은 이 문제를 파고든다.(이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