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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복잡계의 새로운 접근> 추천

미독에게 보내는 카톡

 


 

저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해야할 거 같군요ㅋㅋ

일단 저 책은 “이론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본 이론서 중에 가장 루만과 다른 이론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일단 저 양반은 모든 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제시하는 도식들은 범주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자신은 현장에서 절대로 그런 식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저 사람이 어떤 도식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식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장르-형식이며, 자신이 제시하는 사례가 그러한 도식 활용에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모티프가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죠.

일단 이 사람의 책은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에 버금갈 만한 책이고, 하버마스가 법학자들에게 “법적 패러다임”이라는 메타 차원을 열고 이를 통해 설득하듯이, 경영가-경영학자들에게 “조직화 패러다임”이라는 메타 차원을 열고 이를 통해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구체적인 전략은 넌 안 되고 나는 되네?라는 식이 아닙니다.
뭔가가 제대로 분석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을 일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핵심은 그런 “분석되지 않음”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방식으로 넘어갈 것인지를 설득하는 일입니다.

하버마스가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드워킨을 비판하는 것과 이게 비슷합니다.
하버마스는 드워킨이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드워킨이 문제적인 것은 법학자에게 모든 과업을 맡기고 그 속에서 정말 초인적이고 초역사적이며 불가능할 이상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죠.(드워킨 본인이 그렇게 이상화합니다 심지어. “헤라클레스적인 판사”를 이념화하죠)
하버마스는 그걸 전부 고민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법학자중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영역에서부터는 정치가들에게 맡겨야하고, 어떤 영역에서부터는 행정가에게 맡겨야하는데 모든 것을 법학자-법실무자가 하게 만든다는 것이져.
하버마스는 이런 것이 단순히 불가능한 요구를 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근본적으로 “정치”, “사회”, “공동체”를 배신하고, 자신이 속한 특정 직업계로 전체를 표상하기에 문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법학자는 법적인 문제를 검토하고, 그 속에서 미결정적인 문제 상황을 구체화할 수밖에 없고, 이것 자체는 문제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구체화된 문제 상황을 자신 및 자신의 동류 집단에 의해서 결정해야한다는 사고가 문제적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공동체적이지 않고, “법학”과 “법학자”, “법실무자”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게 되는 처사라는 것이죠.
하버마스는 일종의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법 현실을 위치 짓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관점을 법 패러다임이란 이름으로 영역화하는 것이죠.


재미난 것은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론-사례를 매우 간략하고 단순하게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함이 매우매우 중요한 통찰을 품고 있습니다.
이 사람 글에서 체험, 학습, 기억, 정체성, 이항 논리(구조주의적 사고 형식), 상상, 환상, 집단화, 갈등 등등의 거의 모든 사회적 주제가 다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포괄성은 하버마스가 법이 무엇인지를 단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문제들을 일관적으로 볼 수 있는 법 패러다임을 통해서 조망 가능하게 만들듯이, 바로 그런 관점을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다뤄줍니다.

때문에 어떤 관찰 가능한 문제 상황등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바로 그 다양체적 특성에 주목하고,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무엇이 바뀌는지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즉 이렇게 볼 때와 저렇게 볼 때 무엇이 바뀌는지, 그리고 이게 단순 관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관찰 변형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변하고, 자신의 실천 맥락이 어떻게 변하고, 사회-조직의 맥락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기억의 지도>, <사회적경제, 풀뿌리부터의 혁신>이 사례 연구에서는 더 풍부해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전 더 풍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해당 문제들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맥락을 복수적으로 드러내며,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잘라내는지에 따라 바뀔 수 있을 절단면을 미리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거든요.(물론 이게 확정적인 것은 아니고, 바로 그 미묘한 감각을 기르는 게 이 사람의 목적이죠)

사례를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사례의 맥락을 다양하게 위치 짓는 감각을 길러주는 책이기에, 이 책이 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전 이 책의 역자는 이를 전적으로 학습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고, 전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읽고 있다는 게 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학습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지식 관리에 대한 책도 아니고요. 경영자들의 실무지침을 위한 책도 아닙니다. 현대 조직 분석 방법론에 대한 이론서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 전부일 수 있고, 제가 예상치 못한 절단면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정말 별의 별 문제들이 다뤄집니다. 하지만 그게 복잡하다, 복잡하게 봐야한다, 복잡하게 볼 수 있게 주의를 기울여야한다는 식으로 다뤄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게 정말 다 복잡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이 책의 바로 이런 특성이 미독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놀랍게 경험한 미독의 중요한 일면 중 하나는 미독이 근본 테마를 추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그게 중요한 능력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 가시적인 멜로디에만 집중하지 배후의 사운드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기억할 때 흥얼거리는 것은 결국 멜로디이지 그 배후가 아니거든요.(이 구별 도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루소가 당시 음악학의 성숙에 반하면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멜로디의 본질로 내세운 것이기도 하거든요. “멜로디는 바로 당신이 흥얼거리거나 흥얼거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정의는 없으며, 불필요하다.”)
하지만 정말로 음악을 제대로 만들려면 배후를 알아야합니다.
곡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곡에 진정한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배후거든요.
이건 뭐 지성적인 분석이 가능해서라는 그런 허접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클래식을 들을 때, 똑같은 곡임에도 해석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게 바로 저 지점이거든요.
어떤 곡은 사람을 짜증나게 합니다. 들으면 짜증이 나요. 맨날 듣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라도 짜증나는 버전이 있고, 들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서 편안한 버전이 있고, 들으면 자극을 느끼게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저 차이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고, 저 차이를 만들 줄 알려면 배후를 알아야합니다.
바로 그 배후의 원천 중 하나가 근본 테마이고, 미독이 말했던 “유비항”입니다.
공통성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표면만 읽는 사람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 글을 100번 읽을 사람, 그 글을 100번 읽어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공통성이 중요합니다.
별 거 아닌 도약에 불과해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과 환상을 가르는 경계일 수 있고, 원과 사각형을 가르는 경계일 수 있으니까요.
바로 그 여러 잠재적인 가능성의 지평에서, 그 어둠 속에서 적어도 지표가 될 별빛이 될 수 있는 것은 근본 테마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작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능력”이라고 말했던 것이고요.

이게 저 책이랑 무슨 상관이냐가 중요합니다.
저 책에 근본 테마가 있는지 없는지 전 모릅니다.
전 언제나처럼 빠르게 들어갔다가 빠르게 나왔거든요.(찬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가능하며 유일한 방법…)
저에게 저 책의 근본 테마는 가시성이 없어도 느껴지는 무엇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그냥 비언어적으로, 비의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 것이죠.
저걸 언어화하고, 의식화하고, 공식화할 수 있어야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소통가능한 채널이 되거든요.
미독은 저 책에 근본 테마가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고, 존재한다면 사용된 근본 테마를 구체적인 형태로 발견할 수 있고, 부재한다면 그에 합당한 근본 테마를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걸 발견한다면, 이 사람이 사용하는 이 총람적인,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고, 일반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총체를 다루면서도 국소만을 다루는 이 놀라운 도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 도구는 참 신기합니다. 원래 도구는 단순할수록 다형적이고 다기능적이고, 다맥락적입니다.(세넷이 말하듯이 일자 드라이버 같은 것이죠)
근데 정신의 도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자 드라이버 같은 정신의 도구는 다형적이고 다기능적이고 다맥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정신을 파괴적으로 단순화하거든요.
이 책의 도구는 정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정교함 덕분에 다형적이고 다기능적이고 다맥락적이며 다목적적인 도구입니다.
이런 도구를 손에 익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나게도 이 도구를 손에 익히는 것이 곧 이 도구를 다양하게 쓰고 새롭게 쓰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기도 하고요.(일자 드라이버를 일자 드라이버 이상으로 쓰는 법은 일자 드라이버를 손에 익히는 것으로 얻어지진 않습니다. 그 차이죠)

약간 첨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항상 생각하지만 인간은 정말 단순하고 쉽게 예측 가능합니다. 또한 예측 불가능성이 유의미성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예측 불가능성은 “변덕스러운 병신새끼”로 단순화될 수 있죠. 
하지만 어떤 유형의 예측 불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미독에게서 느끼는 예측 불가능성은 단순화될 수 없는 것이고, 여러 면으로 절단 가능한 고유한 역랑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사람을 모른다 안다와 상관 없이,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놀라움이 있는 것이죠.
전 이 놀라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대화가 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학문적 협업이란 게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지금 저 책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대화가 뭐고 지적 협업이란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입니다.
우발성, 예측불가능성을 단순히 자신의 무지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한다는 사실의 본질에 둘 때만 가능해지는 관점이죠.
이 책은 그걸 그려내고 있고, 바로 그걸 의식화하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어떠한 조직에서 발견해야할 그런 소통의 가능성이 아니라, 좀 더 제가 찾고 있는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는 거지만요.
하여간 바로 이 예측 불가능성을 의미 있게 다루는 소통 경로입니다.
그래서 강추하는 거고 그래서 꼭 보라고 얘기하는 거죠.
이 책을 보고 나면 제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정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소통 경로가 생성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고요.


무튼 절 믿고 함 도전해주세요ㅋㅋ
뭐 근데 순서는 좀 바꿔도 좋을 듯합니다.
기억의 지도 같은 책들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보아야 이 사람의 총람적인 관점과 그 속에서 보이는 역동성들의 진가가 보일 거 같거든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