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회의 철학>에 이어 <가상사회의 철학>을 읽었다. 애초에 <정보사회의 철학>을 읽게 된 것 또한 <가상사회의 철학> 때문이었다. 신간서적란에서 발견하고 호기심이 생겼는데, 괜찮은 책일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이전 작품을 읽은 것이었다. <정보사회의 철학>을 읽으며 저자의 철학적 능력이 뛰어나단 확신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가상사회의 철학>을 읽게 되었다.
<정보사회의 철학>에 대한 나의 코멘트에서 윤리를 다루는 마지막 장이 한심하다고 평가했는데, 어찌보면 이에 대한 답변이 <가상사회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한심하다고 평했던 것은 해당 장의 내용이 문제적이어서가 아니었다. 해당 장에는 학적으로 상식적인(물론 상식적이지 않아서 문제지만) 윤리관이 제시되었고, 해당 윤리관은 충분히 설득력 있으며 내가 동의할 뿐만 아니라 이미 열심히 따르고 있는 윤리관이니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장의 서술 방식으로는 저자가 제시하는 정보사회의 특수한 단면들이 윤리적으로 의미있게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 해당 윤리관은 정보사회고 나발이고 그냥 올바른 주장이기에 정보사회와 무관하고, 그것이 저자가 열심히 설명한 정보사회의 다수적인 면면들에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지는 미결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특수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사례를 설명하는 것과 양립가능하지 않기에, 윤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일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윤리관은 그의 “정보사회의 철학”을 인식 가능하게 하며 주장 가능하게 하는 관점/고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이것이 구조적으로 요구될 만했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자의 고정점과 별도로 이번 <가상사회의 철학>은 정보사회의 다수적인 단면들에서 “가치”란 재화가 창출되는 메커니즘을 다룬다. 가치 발생의 메커니즘을 다룸으로써 정보사회의 구체적인 현실들과의 긴밀성을 갖고 있기에 앞서의 비판을 극복하고, 구체적인 답변과 무관한 관점(가치론이 윤리관과 다른 게 이 점이다)이기에 구체적인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 것 또한 합당하기에 앞서의 비판을 해소한다.(물론 저자는 여기서부터 윤리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여간 <가상사회의 철학>이 훨씬 좋은 책이란 얘기다. 다만 글의 내용에서는 설득력이 이전 저작만큼 높진 않은 장들이 있었고, 아직 저자가 해당 문제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해당 문제를 다룰 때 본인이 사용한 언어들을 완벽히 숙달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비난하고 싶진 않다.(애초에 나 또한 그렇게 정교한 언어 사용자가 아니니…)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책을 지탱하는 앎의 자기조직 방식이었다. 어차피 저자가 설명하는 모든 현상의 배후, 즉, 저자가 해당 문제들을 관찰하고 있는 관점/고정점은 뻔하다. 앞서 내가 언급한 <정보사회의 철학>의 윤리관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윤리관에 서 있기 위해서, 해당 지점에 머무르기 위해서 저자는 언제나 루만의 언어를 활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그럼에도 루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언어를 바꿔가면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빙 고프만, 피에르 레비, 롤랑 바르트 등을 활용하며(물론 루만도 쓴다) 주제에 따라 자신의 언어를 바꾼다. 얼핏보면 주제가 다양해보이지만, 이는 속임수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저자는 그것들을 한결같이 같은 방식으로 다르고 있다. 일종의 언어 변주를 통해서 새롭게 보이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변주에서 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내가 루만의 저작들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어차피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기에 읽어도 나에게 인식적으로 증대되는 무엇이 없어서였다. 루만은 실증의 시련을 시도하지 않는다. 실험하지 않는다. 때문에 루만어에 익숙하고 눈치가 빠른 저자라면 루만식의 회로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사실들은 어차피 도구적으로 사용되기에 루만의 책에서 색다른 면모는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상사회의 철학> 저자는 루만처럼 사고하지만, 루만처럼 서술하진 않는다. 유행하는 사태들을 가져와서 주제화하며 자신의 설명 방식의 설득력이 어떤지를 평가하라고 내놓고 있다. 어차피 똑같은 얘기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똑같은 얘기를 이루는 이론이 아니라 해당 사태에 대한 저자가 내놓는 관찰 지점이다. 그렇기에 새롭게 느껴질 수 있고, 그렇기에 새로울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찰지점이지 체계화된 이론 언어가 아니다. 그러니 저자는 언어를 바꿀 수 있는 것이고, 언어를 바꾸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언어 바꿈 자체가 갖고 있는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해보이는 논의들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가상사회의 철학>의 전개 순서를 보면 이러한 효과를 잘 느낄 수 있다. 주제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나열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사회의 철학>에서도 그랬듯이, “정보사회” 따위의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릴 이미지를 고려하여 순서가 정해져있다. 처음부터 추상으로, 처음부터 이론으로 시작하면 아무도 그것이 “정보사회”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보사회라고 할 때 떠올릴 소재들, 정보사회라고 할 때 떠들어댈 화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 주제로부터 근접한 소재, 근접한 화제로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정보사회”와 무관해보이는 주제로 나아간다. 루만이라면 일단 체계를 선언하고 그걸로 걍 분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보사회가 왜 체계로 분석되어야하냐고 투덜거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아니까. “앎은 이렇게 만들어내는 것이군”이란 생각이 든다. 별거 아닌 것 같아보이고, 그저 문제에 대한 단순화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을 의미 창출을 위해 써먹을 줄 안다는 얘기다. 나는 평소 새로운 이론은 없다고 떠들며 이론 탐구는 무의미하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나 또한 이론가이며 이론을 연구한다. 이론 연구는 이렇게 써먹으면 의미가 있다. 똑같은 얘기도 다르게 얘기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 얘기들을 한 곳에 모아 배열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발생한다. 달라진 의미, 새로 발생한 의미가 지금 독자에게 던져진 순간에만 시작할 수 있는 토의거리가 있다. 그렇게 본인이 원하는 논쟁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훌륭하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결국 잘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능만이 아니다. <가상사회의 철학> 같은 책은 나도 쓸 수 있는 책이다. 허접해서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이 학자 유형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은 카시러, 베버, 라드부르흐를 읽었을 때였다. 학자라면 저렇게 연구를 해야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연구하지 못한다. 난 학자처럼 연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가상사회의 철학> 같은 책은 나의 연구 스타일과 잘 들어맞는다.(이와 비슷한 것은 또한 니체이다) 이것이 연구라면 나는 연구자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환경이다. <가상사회의 철학> 또한 반시대적이다. 저자는 다른 논의지평을 열고 싶어서 분기 지점을 열심히 창출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저런 창출의 가능성 또한 시대적이다. 반시대적인 것은 언제나 시대적인 것 속에서만 현존한다. 지금 여기에 저런 유형의 반시대적인 것을 현존시킬 시대적인 것이 보이지 않아 문제란 얘기다….
내용 설명은 스킵한다. 뭐 뻔한 얘기들이다. 결국 “현실성”이란 개념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고집불통들과 현실감 없는 공상가들(저자는 사변적 실재론 같은 쪽의 SF적 형이상학 따위에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정상인이란 소리다. 저런 놈들을 나나 저자가 말하듯 철학계에서 퇴출시켜야한다.)의 의미 감옥에서 현실을 탈출시키고,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사회 속 현실들과 학자들의 유령 사냥을 가능케 할 현실로 탈바꿈시킨다. 이게 정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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