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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다윈에 대한 오해>를 읽으면서

내가 자주 얘기하지만 다위니즘과 다윈의 이론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위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의 종합이론을 의미하고, 현대의 종합이론은 당연히도 다윈과 무관하다. 생물학에 속하는 활동들은 당연히도 다양하고,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나의 무엇으로 표상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가 현대의 종합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종합이론이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구세대적인 헛소리를 지금 시점에 반복하는 치들을 내가 경멸하긴 하지만 이는 중요치 않다.) 그것의 합리성과 무관하게 현대의 종합이론을 세운 이들이 자신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상징으로 내건 역사 속 인물 다윈은 그들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저런 작업, 즉 생물학을 하나의 무엇으로 인식케 하는 활동이 필요했던 시점은 지났다. 오늘날 생물학의 학문적 지위를 문제 삼을 이는 없을 것이고, 문제 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 치료가 필요한 것이지 생물학이 그것에 대답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현대의 종합이론에서 쓸모 없는 신소리들은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런 역사적 조건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걸 모르는 이가 많아서 문제지만 말이다.

일단 국내에 진화론 관련되어 소개되는 책들은 문제가 많다.
일단 진화론vs창조론이란 구도 자체가 문제적이다.
논쟁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저 구도 자체가 개븅신 같고, 저런 구도에서는 좋은 얘기가 못 나와서 문제적이다.
창조론은 사이비 기독교 교리이다.
진심으로 저걸 기독교적 테제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불구덩이에 빠져 마땅하다.
창조는 계시적 진리이지 “이론”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창조론’이란 용어 자체가 불합리하다. 그런 불경하고 불합리한 용어를 기독교인이 입밖으로 내놓아서는 안 되고 말이다.
물론 저런 소리들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수세에 몰린 몇몇 기독교 종파의 타락/퇴행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처럼 그런 종파들이 열심히 사회를 장악하려고 하는 동네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런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말이다.
국내에도 저런 종파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런 븅신 같은 소리에 동조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그런 짓거리를 하면 그냥 탄압하면 되니 문제될 것도 없다.(저런 치들의 뻘짓거리를 탄압한다고 비난할 사람은 우리나라에 없다.)
웃기는 것은 이런 사정과 괴리된 국내의 출판시장이다.
미국을 세상의 모범으로 여기는 븅신 같은 이들이 많아서인지(검머외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는 간다. 걔들은 원래부터 병신이니까. 거기에 동조하는 새끼들이 문제다.) 미국에나 필요할 책이 국내에 번역되고 있다. 반면 정말로 번역되어야할 책들이 번역되고 있지 않고 있다.(덧붙여 진화론 어쩌구 떠드는 새끼들이 죄다 저능아가 되어 있다는 것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어떤 진화론인지에 대한 이해 및 고찰 없이 반종교 투쟁하며 지랄 염병하는 머저리들이 진화론 담론을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진화론자=반종교 염병가"일 이유가 뭐가 있나? 정말로 중요한 고민은 행해지지도 않고 있고 말이다.)

간단히 말해 진화론에 대한 좋은 이론서들이 소개될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좋은 이론서는 저런 시덥지 않은 븅신 같은 구도 속에 진화를 옹호하는 팜플릿이 아니라, 다양한 진화론을 사례 중심으로 연구하며 가설을 비교 검토하는 책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아쉬운 것들이 많다.
다윈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소개하는 책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 중 쓸만한 것은 둘뿐이다.
하나는 비어의 <다윈의 플롯>이고, 다른 하나는 루스의 <진화의 탄생>이다.
소개될 필요가 있는 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Dov Ospovat, The Development of Darwin's Theory: Natural History, Natural Theology, and Natural Selection, 1838–1859

Robert J. Richards, The Meaning of Evolution: The Morphological Construction and Ideological Reconstruction of Darwin's Theory

Michael T. Ghiselin, Metaphysics and the Origin of Species

좀 오래된 책들이지만, 고전으로 자리 잡은 책들이고, 오늘날에도 읽을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불만한 책을 하나 더 발견했고, 그 책이 좋으면서도 구리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에 인용되는 저자 중 파트리크 토르란 양반이 있는데, 그 양반의 <다윈에 대한 오해>가 번역되어 있길래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저 책은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듯… 요즘 하는 얘기에서 <새로운 세계합리성>은 빠지지가 않는다.)

일단 개론서로는 괜찮은 편이다. 번역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약간 이론적으로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망가진다… 역자가 교양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고 그냥 뭉개는 듯…)

뭐 일단 이 책 관련해서 얘기하기 전에 진화론에 대한 기초 상식을 읊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내가 창조론vs진화론 구도를 극혐하며 애초부터 븅신 같다고 지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초 상식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화론과 진화(종변이)는 다르며, 진화는 그냥 주어지는 경험적 사실이란 상식이 그것이다.

종변이는 그냥 주어진, 현존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걸 부정하면 멍청한 것이고 말이다.
다윈 이전에도 종변이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멸종이 일어난 게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 증거들이 있는데 그걸 부정하면 븅신인 것이고 말이다.
당대에 문제가 된 것은 멸종 및 신종 발생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였다.
진화론은 정확히 저 문제, 즉 멸종 및 신종 발생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한 응답이었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조건이다. 창조론이 자신을 과학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 가진 기이함은 이런 차이에서 잘 드러난다. 저 시기에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화에 대한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앞서 얘기했듯이 '창조론'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불경한 용어다.)

토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종의 기원>으로 확고해진 것은 종변이 즉, 진화란 사실과, 진화란 사실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조건 속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떤 진화론이냐는 문제였다. 토르가 강조하듯,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두가 다윈주의가 될 이유도 없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구가 필요한 것은 결국 어떤 진화론인지라는 물음이지, 진화론인지 따위의 븅신 같은 물음이 아니란 소리다.

일단 이게 전제되면 얘기는 쉬워진다.

토르는 다윈의 진화론을 스펜서의 진화론과 구별 가능한 것으로 복원하면서, 다윈이 의도했던 진화 원리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인류학적으로 탈바꿈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즉 단순한 사실 주장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인간 이해를 설명한다는 얘기가 되겠다. 다시 말해 진화론적 목적론이다.
구시대적 종합이론가들은 다윈이 목적론을 거부했다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이런 얘기를 부정하곤 했고, 아마 지금도 부정할 저능아들이 있겠지만, 다윈은 당연히도 목적론을 전제했고, 그러니 진화론은 "설명"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목적론을 이상하게 이해하는 븅신들이 많아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목적론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목적론은 목적인에 기초한 설명과 구별되는 학문적 탐구로서,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발견될 수 있는 패턴들 속에서 발전되는 합목적적인 규칙성을 설명하는 학문 분과이다. “생태학적 균형” 따위가 목적론의 전형적인 예이고 말이다.(목적론과 목적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떠드는 이들은 제발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제발 역사 연구를 좀 참조하면서 과학철학적인 성찰을 했으면 한다. 목적론이란 단어 자체가 '기계론'과 병행하여 등장한 신조어이다. 기계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론을 보충하는 학문 영역이고 말이다.)
목적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걸 섭리랑 엮으면서 특정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멍청이들 때문이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치 중립적으로 저런 합목적성은 주장될 수 있고,(정확히 말하자면 저런 멍청이들의 신소리가 "목적론"일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은 언제나 저런 합목적성-규칙에 의거해서 설명력을 갖기에 당연히도 과학이라면 목적론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애초에 합목적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화론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자연선택이 전적으로 임의적이라면 애초에 진화라는 현상 자체가 발생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자연선택은 전적으로 임의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연선택들 중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진화"를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케 할 주목할 만한 패턴이 무엇인지이다. 다시 말해 종변이 현상에서 과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유의미한 패턴들이 무엇이며, 그런 관찰을 통일적으로 종합해낼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당연히도 “목적론 거부” 같은 실없는 신소리는 애초부터 중요치 않은 것이고 말이다.(참고로 가치 지향적 목적론을 받아들여도 생물학 연구는 잘만 할 수 있다. 애초에 이는 중요치 않단 소리가 되겠다.)

하여간 토르는 저런 신소리와 독립적으로 다윈의 목적론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책으로는 내가 아까 추천한 리처드의 책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내가 추천한 리처드의 연구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진 목적론적 함의가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었고, 이를 부정하게 된 것은 종합이론이 수사적 필요에 의해 다윈을 왜곡하고 우상화하면서 생긴 특이 현상임을 역사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아까 언급했듯이 목적론은 너무 당연한 거라 저런 왜곡-우상화 이전에는 다윈의 목적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모두는 아니지만 하여간 정신이 멀쩡한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이 더 좋다면 더 좋겠지만, 번역되고 안 되고의 차이는 크며, 일단 토르의 책이 더 짧고 명쾌하니 이게 추천할 만하다는 소리가 되겠다.

재미난 것은 토르의 해석이다.
토르는 좀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
다윈의 목적론이 오늘날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는 그런 주장을 한다.
물론 여기서의 주목이 역사학적 주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토르는 저걸 진지하게, 현대의 가치-규범 이념으로서 얘기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단 저런 개븅신 같은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넘어가고(뭐 학자들이 규범 담론적으로 븅신 같은 뻘소리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철학자도 개븅신 같은 소리를 하는데 다른 이들이 븅신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어떻게 이상한 일일 수 있겠나? 오히려 통찰력 있는 종합적 비전을 내놓는 사람들이 설명될 필요가 있다. 도대체 바쁜 생활 전선 속에서 어떻게 종합적 비전을 구축해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이다.

니체가 다윈주의를 공격할 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븅신 같은 헛소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
니체가 다윈주의와 스펜서주의를 혼동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란 소리가 그것이다.
네하마스는 그다지 역사학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저런 문제 해결이 문제적인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니체는 스펜서랑 다윈을 구별하고, 스펜서는 따로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니체는 스펜서랑 다윈을 구별한다. 철학적으로가 아니라 문헌적으로 그렇다.(그러니 둘을 혼동해서 생긴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뇌가 없거나 눈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발 학자면 책을 좀 제대로 읽었으면 한다.)
니체는 스펜서주의는 애초부터 븅신이라고 못을 박고 있고, 니체는 오직 다윈주의를 극복하는 시도만을 수행한다.
네하마스는 “그럼 다윈주의는 무엇인데?”에 대한 물음에, “흄적 자연주의 같은데…? 흄이 자연사 서술한 것 있잖아, 그런 작업을 비판하는 것 같아…;;;” 정도의 추측만을 하고, 비슷한 주장을 제안한 연구자 논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하는데, 뭐 미흡하지만 적절한 지적이긴 했다.

물론 난 브로져의 연구에 좀 심드렁하긴 하지만,(뭐 그래도 브로져의 연구 업적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니체가 뭘 읽었는지를 영수증과 목록 필기 사항으로 전부 확정한 미친 놈이니까 말이다. 홍사현 선생이 번역한 슈텍마이어의 <니체 입문>에서 슈텍마이어는 저런 작업이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는데, 브로져는 미친 놈답게 그걸 해냈다… 덕분에 니체가 무엇을 읽었는지 이제 대충 가설적으로 썰풀긴 어렵게 되었고, 니체의 신칸트주의 및 스피노자 독해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물론 브로져는 영어권 저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헤 이런 연구를 한 거였지만 말이다.) 브로져가 지적하듯이 니체는 영국 철학을 잘 알고 있었고, “추측적 역사학”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더욱 주목될 필요가 있다.
니체의 다윈주의는 영국적 전통에 걸맞은 특정한 방식의 추측적 역사학 구축 모델을 가리킨다. 니체는 다윈주의 비판을 통해서, 다윈주의를 통해 인간사를 설명하려는 파울 레를 공격하는 것이고 말이다.(니체는 다윈의 인류학적 저작을 읽지 못했다.)

재미난 것은 이런 니체 해석사가 아니다.
난 예전부터 니체가 비판하는 다윈주의는 멍청한 조류가 아니라, 매우 냉철한, 그리고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 조류라고 주장해왔는데,(주장이라고 하기엔… 흠… 내 얘기를 들어준 사람이 없으니 주장이라고 하긴 뭐하다…) 내가 제안하곤 하였던 니체의 합리적 다윈주의를 토르가 진지하게 다윈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주목하고 싶은 재미난 무엇이다.
니체가 딱히 다윈을 열심히 읽진 않았지만, 어쨌든 다윈의 목적론을 파악하고 그것을 비판했다는 그런 소리가 되겠다.
뭐 그러니 니체는 역시 천재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난 니체의 작업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야할지 고민하고 있고, 니체의 통찰을 가장 잘 파악하고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승화시킨 인물로 베버를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당연한 소리가 되겠다.(그렇다고 베버가 답이냐고 하면 잘 모르겠단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일단 나부터 베버처럼 못 살기에, 베버가 답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베버의 요구는… 좀 가혹하다.)(베버 말마따나 니체에게 빚진 게 없다고 주장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니체에게 빚진 게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뭐 니체의 철학을 좋아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 니체는 맞는 말만 했다. 지금 내가 다르게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일 뿐...) 다만 니체 이 놈은 찍어 맞추는 데에는 뭐가 있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얘길 꺼내고 보니 이 또한 신소리 같다.)

내가 논문을 순풍순풍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주제로 논문 하나 썼을 것 같다… 니체가 지적하는 다윈주의는 이런 것이고, 이를 비판하는 것은 그래서 철학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그런… 다윈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하여간 그렇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스펜서를 위한 책도 쓰고 싶단 생각이 든다. 뭐 당연히 난 스펜서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욕먹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사회진화론이나 우생학에 대해서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비난한다. 외려 박애주의자들이 사회진화론-우생학 신봉자였던 것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말이다. 사실 오늘날 얇은 보편주의를 외치는 이들은 바로 저 시기의 사회진화론-우생학적 박애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치들에 대한 오늘날의 존경을 생각해보면, 19세기 사람들에 대한 현대인들의 태도는 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무지성 박애 같은 일에 인생을 쏟아 붇는 일이 존경을 받는 이유를 난 모르겠다. 그런 이들은 과거 사회진화론-우생학 박애주의자와 다르지도 않고... 시대를 잘못 만난 광신도 같다는 인상이다. 뭐 난 광신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사회적인 존경은 나란 사람의 사랑과 다른 것이란 얘기이다.)

게다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우생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법을 신봉하고 있다. 예컨대 보편적 공리주의와 유전자 결정론을 동시에 지향하면 우생학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많은 이들이 두 주장을 동시에 신봉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쉽게 문제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외려 스펜서는 저런 입장이 아니었다. 규칙-유형 탐구에 기초한 역사철학적 규범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고, 이는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알랭 테스타의 기획도 이런 비전의 최신 업데이트 버전이라 할 수 있기 때문... 지금처럼 되는대로 연구하며 연구 맥락을 내부자들의 동의에만 국한하는 것보다 이 쪽이 훨씬 낫고(애초에 지향하며 구축해내는 "객관성"의 수준 자체가 차이가 나니까... 유치원과 대학 수준 차이다.), 스펜서를 잘 다듬는 것만으로도 현대 연구보다 나은 연구가 나올 것이 분명하니, 스펜서도 평가절하 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뭐... 이게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과학 구축이냐고 생각하진 않는데, 적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을 굳이 비난하진 않는다는 윤리를 따르고 있을 때, 저런 입장은 비난할 이유가 없다는 그 정도의 입장을 난 취하고 있다.(현대 연구들 중에는 열심히 하고 있어도 굳이 비난할 이유가 있는 것들이 많다는 입장이고...)

뭐 근데 내가 굳이 스펜서까지...란 생각이 든다. 내 취향은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