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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 <평화의 수호자>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책은 불멸의 기념비이면서도, 시대를 위한 팜플렛이어야만 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책이면서도, 그 쓸모가 다하면 사라지길 진심으로 원하는.” 나는 이것을 진실로 믿는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 데카르트의 <성찰>, 루소의 <불평등기원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니체의 <선악의 저편>,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또한 저런 책이라고 믿는다. 이것들은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책”이니까. 여기에 포함되어야만 할 책들이 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수호자>,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 푸펜도르프의 <인간과 시민의 전체 의무>. 이 위대한 책들을 저 만신전에 등재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평화의 수호자>를 읽은 것이다. 언제나 제목만을 떠들었던 책을, 그 내용으로 떠들 수 있게 되어서, 이 책의 위대함을 떳떳하게,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이 기쁨을 표현하고자, 부족하지만 소개글을 썼다. 언젠가는 부끄럽지 않은 소개글을 쓸 수 있길...

황정욱 선생이 번역한 역본으로 읽었다. 중세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와 매우 다르고, 용어들의 활용이 이색적이라 번역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역자는 훌륭하게 번역해냈다.(번역의 어려움을 알기에 아쉬운 점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평화의 수호자>... 역시 명작이더군요.
역사적 맥락 이런 걸 다 제쳐놓고도 읽을 만한 책입니다.
내적 논리가 완전하고, 정교하게 서술된 작품입니다.
<리바이어던>랑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2권이 더 중요하겠지만, 2권 읽는 것은 정말 괴롭다...
1권으로 밑밥을 깔아두는 것인데, 1권의 체계가 그 자체로 매우 설득력이 있고, 정치체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이해를 제안해준다...


1권의 장점을 얘기하자면, 어느 정도 철학적인 논의를 알아야하긴 합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차용하여 본인의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런데 보통 “아리스토텔레스 철학”하면 구닥다리라는 식으로 이해할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게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당대에는 최신 철학이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그 자체로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 과학철학자가 “과학적 설명”이라고 불릴 수 있을 “설명”을 규정하다가, “엥? 이거 아리스토텔레스 4원인설이잖아?”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논문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합리적인 “설명” 개념을 규정하고, 이에 기초해서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매우 맥락 지향적입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맥락 지향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이에 기초하여 자신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정치”는 매우 맥락적입니다. 질료는 인간, 작용은 인간의 이행적transeo 행위(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이행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상호작용, 사회적 관계 등이 얘기되는 것이고요), 형상은 직무적 활동(habitus), 목적은 사회적 선입니다.
여기서 “질료”가 “인간”이란 게 매우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 개념들은 상대적입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히도 형상입니다.(예컨대 의학)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질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성이 임의성, 자의성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특정한 맥락에서는 해당 질서가 공고하게 작동합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가 사제들이 세속법의 적용을 면한다는 주장을 반박할 때, 이런 맥락적 공고함을 활용하거든요.
마르실리우스는 음악적 인간이든,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든, 그가 환자인 한에서 언제나 같은 종류의 의사에 속한다고 지적합니다.
음악가 담당 의사, 판사 당당 의사, 농민 담당 의사가 따로 필요한 게 아니듯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이행적 행위로 인해 야기된 문제가 있다면, 사제는 인간인 한에서 인간법의 적용을 피할 수 없다고 마르실리우스는 지적하죠.
암튼 마르실리우스는 철학적 소양이 풍부하고, 이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정치체를 설명하고, 교회와 정치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마르실리우스의 핵심 논점은, 교회는 정치체보다 우월하지 않고(그렇다고 열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독점하는 특정 교회(교황청, 마르실리우스는 ecclesia의 의미도 여럿으로 분석합니다)의 이단적이고 불법적인 주장에 의해서 발생한 불화를 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실리우스의 주장들은 하나하나 흥미롭습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를 몰랐기에 “교회로 인한 불화”를 분석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이를 보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2) 종교의 기능을 사회적인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아닌 이교의 경우, 사회의 형성 과정 속에서 어떤 이유에서 “종교”라고 불릴 것들이 태동하고, 기능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종교의 활동 범위를 이러한 사회적 기능에 종속된 것으로서 설명합니다.(물론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는 올바른 믿음을 가졌는지의 차이입니다)
3) 2)의 설명이 가능한 것은 마르실리우스의 정치체 분석 방법 덕분인데, 이게 매우 “유기체적”입니다. 물론 동물-유기체 은유에 기초해서 정치체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것이고, 마르실리우스가 이를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실리우스는 이를 은유 이상으로 활용합니다. 마르실리우스는 이게 머리고 이게 심장이다라는 식으로 상징을 활용하지 않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완전한 체계의 성립요건과 작동조건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유비를 활용합니다. 매우 “체계적”이라는 것이죠. 근대적인 유기체적 정치체론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는 게 꽤나 까다롭다고 느껴졌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마르실리우스는 “조절regulation”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총체의 구조, 총체적인 활동에 비추어 부분들의 활동을 기능적 합목적성에 맞추어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가 “정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덧붙여 자연도 자기조절을 한다고 주장합니다.(과도한 인구수를 조절하는 자연적인 작용으로 전쟁, 전염병 등을 거론합니다)
4) 3)와 연결된 맥락인데, 마르실리우스는 공동체를 “역사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마르실리우스의 주장 자체는 이론적입니다. 그리고 역사 또한 매우 이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한다는 입장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 [니케아] 종교회의와 사도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교회 발전에서 이루어진 나머지 사건에 대해 그것이 우리 주제와 상관 있는 한, 철저히 제자리에서 그 역사를 언급하고 인용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법과 올바른 논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거부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루어진 것이 어떻게 그랬어야 했는지를 거룩한 경전에 따라 분명히 밝힐 것이다.”라고 마르실리우스는 말합니다.(2권 18장 7절) 주목해야할 것은 마르실리우스가 매우 한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를 이론서임을 밝히고, 그 이유도 밝힙니다. 마르실리우스는 정치체의 평화 보존의 원리와 정치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개별적인 불화의 요인들을 분석하는 것을 자신의 주제라고 밝힙니다. 마르실리우스는 이것은 이론적이고, 텍스트의 내적인 근거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즉, 외부적인 반박은 불가능한 저작이란 것이죠) 중간중간 외부를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요. 마르실리우스는 이론이나 교리에 따라 역사를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이러한 주제의 성격에 의한 것이란 소리입니다.
게다가 이런 주제에 역사가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르실리우스는 부분보다 전체가 완전하다는 것에 근거하여, 전체의 판단의 우월함을 강조하는데(사실 이 논리의 진정한 근거로 마르실리우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매우 미스터리합니다. 마르실리우스는 때로는 “대표성”에 호소하기도 하고, 법적 정당성, 법 준수의 실효성 등에 근거하여 합리화하기도 하고, 정치적 참여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여 옹호하기도 합니다), 이게 “역사”로 이어집니다. 마르실리우스에 따르면, 그 자체로 완벽하게 올바른 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투표와 같은 활동 속에서 “무오류적인 것”으로서 여겨질 법을 임시적으로 확립하는 것만이 가능한 최선이죠.(이건 다음 항목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유명론’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런데 이러한 확립은 역사 의존적이고, 그것의 정당성 또한 역사 의존적으로 “발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마르실리우스는 유기체 은유랑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성장하듯이, 법체제도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란 얘기죠. 또한 천재적인 인간만이 “창안invention”(번역서에는 발견/발명 등으로도 번역되는데, 중립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완과 개선은 모두가 같이 할 수 있을 분만 아니라, 모두가 같이 할 때에만 진정으로 잘 수행된다는 마르실리우스의 논리 랑도 이게 연결되는 것이죠... 역사는 현 입론에 도움이 될 특정 사례를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이론 자체는 이성에 비추어야하는 것이고, 교리 자체는 전통에 입각해서 확립된 공의회의 선언에 따르는 것이고, 이 둘로도 모호하고 논쟁적인 것은 새로운 공의회를 통해 해결할 일이란 게 마르실리우스의 주장입니다. 현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할 조건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죠. 마르실리우스는 역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정당화에 있어 역사를 본질로서, 문제 상황의 조건을 결정하는 근거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5) 번역자 분께서 마르실리우스를 유명론으로 보는 근거들로 참조되는 구절들을 주석을 통해서 확인해주시는데, 요게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유명론 실재론 논쟁이 뭔지 모르면, “유명론적”인 주장에 대해 오해할 수 있거든요. 유명론은 보편자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유명론은 보편적인 것, 일반적인 것의 효력이나 실제적 존립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마르실리우스에 따르면 국가는 당연히도 그 자체로 실재하는 보편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특정한 특성에 기초하고, 그것들에 근거한 활동들이 수행되고, 그러한 활동들이 역사 속에서 특정한 형식으로 구축된 것이지(“형상인”) 하늘에서 뿅하고 나온 것도 아니고, 태초부터 창조된 것은 아니란 것이죠.(태초부터 창조된 것은 “자연종”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게 국가를 부정하는 논리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구속력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이게 인간의 삶에 매우 큰 도움을 주는데 부정할 이유도 없고, 이미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어서 부정될 수도 없다는 것이죠. 단지 이러한 현상을 창출한 원인들을 잘 파악하고(정치체의 일반적인 원인들), 이러한 현상들에 악영향을 끼치는 원인들을 잘 파악하고(정치체에 불화를 초래하는 개별적인 원인들), 이를 운용해야하는 것이죠. 유명론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것의 실제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단 것이고, 오히려 마르실리우스는 그러한 실제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존중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걸 존중 안 하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게 평화를 깨뜨리고 불화를 야기한다고 극딜하면서요.

암튼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매우 대단한 양반이고, <평화의 수호자> 또한 정말로 훌륭한 저작이라 생각합니다.
마르실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을 다양한 저서들을 참조하며 활용하고(<정치학>뿐만 아니라 <수사학>, <소피스트 논박>, <범주론>, <동물론>, <자연학>, <형이상학> 등을 모두 활용), 성서와 교부 문헌들도 잘 활용합니다.(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 또한 당대 논쟁도 적절히 활용합니다. 예컨대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논쟁이 2권 초반부에서 매우 자세히 다뤄지는데, 이는 매우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마르실리우스는 단순히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실제로 황제가 이쪽을 지지함) 프란치스코회를 까면서 교황 요한 22세 세력에서 활용한 논리는 억지였고, 당대 신학자들이 다양하게 이를 박살낸 상황인데, 마르실리우스는 거기에 숟가락을 올리며, 해당 논쟁을 자신의 전략에 맞게 전유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가 주장하는 “청빈”은 언어도단에 불과한 게 아닌가?“라는 논제를 활용하여, 교황 쪽에서 멍청한 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인간법과 신법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데 활용합니다. 결국 문제는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논쟁이라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그러한 개별적인 사례를 일으킨 일반적인 원인이고, 마르실리우스는 그걸 공략하는 것이죠. 뭐 애초에 두들겨 맞은 주제라 논리적 우월성도 명백하고, 이러한 우월성을 지렛대로 자신의 주장으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실제로 해당 문제를 논의하고 ”역사“와 함께 교회의 올바른 지위를 다루는 서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여간 대단한 책이고... 번역까지 되었으니 시간나면 무조건 보시라... 그렇게 말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