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을 이해하는 데에 때로는 칸트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시급성”은 문제겠지만요. 하지만 어떨 때에는 플라톤을 이해하기 위해서 칸트를 이해해야만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리브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말하기 위해 칸트를 말해야만 했던 것이 그 증거죠. 오늘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칸트의 『학부들의 다툼』 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캉길렘의 의학론』이 저에게 필요했더군요. 건강을 말하며 “선험”을 말해야만 할 때가 왜 있는지, 철학이 의학과 투쟁해야만 할 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를 캉길렘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논문들이지만 그것들을 모아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부족하나마 이를 소개합니다.
이 구절에서 시작하고 싶군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의학적 심리사회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질병은 희생자 혹은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피난처를 찾는 것처럼 환자가 은밀하게 열망하는 자기만족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설명의 귀환을 생물학에 대한 인류학의 복수로 간주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는 거기서 파스퇴르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에 반하는, 근래의 분자 생화학의 성공으로 고양된 극단적 의학이론에 반하는 저항이라는 미세한 반향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질병」 p.39.
캉길렘은 의학적 실천과 의학 자체를 구별합니다. 의학적 실천이 “임상의학”에 해당될 무엇일 테고요. 캉길렘은 이것이 단순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물론 사실은 중요합니다. 캉길렘은 현대의 반-의학, 대체의학은 그들의 약속에 책임을 질 수 없을 것임을 지적합니다. 현대 의학은 문제가 있죠. 하지만 캉길렘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의사들이 너무나도 시간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 의학 전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현대 의학이 어긋나게 되는 단순화의 “유혹”이 위험한 것임을 명시할 필요가 있고, 의료인이 수행해야할 윤리가 무엇임을 “다시” 일깨울 필요가 있는 것이죠. 캉길렘이 ‘의학실천이성비판’이라는 용어를 (유머스럽게나마)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순수” 이론이성비판, “순수” 실천이성비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의학이라는 불순한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기 때문이죠.
캉길렘은 의학적 실천에서 사회적-정치적 층위와 인격적 층위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임상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임상의학 특유의 “사실”은 환자들의 자기진술이며, 의료인은 그들과의 토의라는 한계-장에서 실천해야하는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캉길렘의 실천은 설득이 아닙니다. 물론 설득이 필요할 수도 있죠. 하지만 과학적 지식으로 환자들을 길들이는 설득은 의학적 실천의 목적은 아닙니다. 애초에 현대 의학에서는 “건강”을 규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혹은 “건강”을 규정하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죠.
그렇다면 “건강”은 무엇일까요?
“건강은 입법이란 틀로 표명될 수 있는 경제적 차원의 요구일 수 없다. 건강은 생명이 실행되기 위한 조건들의 자발적 조화다.” 「치유에 대한 교육은 가능한가?」 p.79.
건강은 “입법”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건강은 “경제”와 다르거든요. 여기서 경제는 당연히 돈놀이가 아닙니다. 이번에 번역된 코젤렉 사전의 「경제」 항목도 “경제”를 “가정술”로만 얘기해서 맘에 안 드는데—물론 그럼에도 구매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얘기할 “경제”입니다.
“[동물] 경제는 전체 안에서 각 부분의 관계를 주관하는 규칙의 총체를 의미한다.” 「치유에 대한 교육은 가능한가?」 p.67.
경제는 규칙들의 총체입니다. 캉길렘이 말하는 내적 조건들의 조화는 규칙들의 조화가 아닙니다. 저것들은 “생명의 실행”을 통해서, 다시 말해 삶을 통해 수행될 수 있는 활동들을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상상과 의지와 결합되기에 환원될 수 없습니다. 캉길렘은 그렇기에 그것에 ‘아프리오리’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입니다.
“건강은 이후에 겪을 수 있을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실현 가능한 모든 활동이 잠재되어 있는 선험적 조건이다. 생리학이라는 과학은 선험을 다수의 후험적 상수로 분석/분해하는 일을 의미한다.” 「치유에 대한 교육은 가능한가?」 p.73.
캉길렘에게 있어 건강은 규칙들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역사적인 것... 그 모든 것이 개입하여 구축해내는 소실점 같은 것이거든요. 캉길렘은 마지막 장에서 사회를 유기체에 은유하는 것의 설명적 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사회는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회라는 조직체를 유기체로 인식하게 되는 일이 가져오는 위험 때문이죠. 캉길렘은 사회는 도구에 불과하고,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을 위한 단 하나의 정상상태는 제시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것은 과학이 부족해서 제시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제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 우스워보일지라도 베르그송이 말한 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캉길렘은 말합니다. 심지어 캉길렘은 저 책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조차도 저 책의 진정한 심오함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는 물론 자연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자율성을 자연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회는 자연이 아니며, 자연의 일부를 “본성”으로 규정하는 특별한 활동 속에서만 실현되는 무엇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정답을 매기고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진실의 심오함은 도외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캉길렘은 그렇게 말합니다.
캉길렘의 주장은 임상의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몰의 주장과 흡사합니다. 또한 몰처럼 캉길렘은 의료인들을, 의학이라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캉길렘이 지적하듯이 의료인들이 “임상의학”을 외면하는 것은 의학이 근본부터 잘못되어서가 아닙다. 무슨 유럽 의식 특유의 몰아세움 때문이 아니란 것이죠. 단지 현실적 조건의 문제 때문이고, 그것의 중요성이 충분히 주목하는 데 실패하고 있어서입니다. 현실을 타계하는 것이 중요하지 의사들과 의학을 욕하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쉬운” 반응에 불과하거든요.
캉길렘은 “건강”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담론 속에서 “몸의 진리”, “몸의 지혜”라는 표현을 건져냅니다. 놀랍게도 캉길렘은 이것을 데카르트와 연결하기도 합니다.(그리고 이것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저에게는 물론 놀랍지 않은, “데카르트다운” 입장입니다) 메를로 퐁티의 데카르트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하고요. 캉길렘은 이것이 충분히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골드슈타인의 『유기체의 건립Aufbau』에 주목한 프랑스의 지성인이 메를로 퐁티와 그를 지지하는 몇 명에 불과한 것이 “놀랍다”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이것은 강조가 필요한 진실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의사라는 진실은 말이죠. 메를로 퐁티는 충분히 그 중요성을 알았지만, “주석”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고 캉길렘은 말합니다. 주석이 아니라 저술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란 것을 그 또한 알기에 캉길렘은 퐁티를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진정으로 저술하려고 했던 이가 있었다며 니체를 세우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실천되어야만 할 철학이라고 캉길렘은 말합니다.
니체는 그것을 했습니다. 하지만 캉길렘 또한 주석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이걸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걸 위한 실천을 직접 수행해야만 합니다. 실천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만 하고요. 그것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지켜질 수 없을 테니까요. 이 진실을 잘 표현하는 매우 “니체적인” 구절을 인용하는 걸로 마치고 싶군요.
“우리는 오직 우리가 우월할 때, 혹은 적어도 자신이 일부 현상들의 원인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에만 삶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확장하는 역량 없이는, 사물을 지배하지 않고서는 삶은 지켜질 수조차 없다.” 『초현실주의 혁명』 중 「예언자에게 보내는 편지」, 「건강」 p.5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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