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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다케다 히로나리 – <푸코의 미학>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이 책을 추천했었는데, 소개하자면 이러합니다.

 

예전에 한번 푸코는 모순을 범하면서도 자신의 모순을 고찰하지 않는다고 제가 비판하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푸코는 누가 봐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을 수행하면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인간의 죽음”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로 제가 비판했었죠.

이 책을 보면서 푸코에 대한 저의 적개심이 꽤나 달래졌습니다.

제가 납득할 수 있을 푸코의 일관성을 이 책이 제공해줬으니까요.

다만 이 책의 저자는 푸코가 모순을 범하고 있지 않다, 푸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푸코의 일관성”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푸코에게 있어 철학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활동이었고, 푸코의 모순, 비일관성, 변화는 푸코다운 변화의 일관성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조심해야할 것은 저자가 이런 설명을 통해 푸코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발전이 아니라 변화를 보여줄 뿐입니다.

푸코가 선택한 변화들을 있는 그대로, 혹은 납득할 수 있는 [비평적] 의식/양심 속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푸코가 무엇을, 그리고 왜 선택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렇기에 푸코의 일관성을 제시하면서도, 이를 발전이나 타락이 아닌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소개를 들으시면 의문이 드실 겁니다.

도대체 책 제목은 그러면 왜 “푸코의 미학”인 것인지 의문이 들 법하니까요.

실제로 저자는 ‘푸코의 미학’이라는 단어로 연상될 만한 서술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미학이라기보다는 그냥 푸코의 철학이죠.

그럼에도 저자가 ‘미학’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일관성, 즉 푸코를 푸코답게 하는, 푸코가 그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특유의 방법이 “미학”이기 때문이죠.

저자는 미학으로 철학을 얘기해야한다고, 미학을 단순히 예술론이나, 작품론으로 치부하거나, 철학의 하위분야거나, 통속적인 문화비평으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해 “미학”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미학 속에서만 푸코의 일관성이 제대로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요.

 

이걸 보이는 방식이 좀 재미납니다.

일단 이 책은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주제별이 아니라 시기별이고, 매우 전기적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이 책은 문자적으로 “전기적”이지는 않습니다.

전기적 일화가 그렇게 많이 언급되는 것도 아니고, 논점이나 중요한 근거를 전기적 일화로 퉁치지 않습니다.

내적인 일관성으로 설명을 하지, 푸코가 68혁명을 지지하면서 입장을 변화시켰다는 식의 전기적 일화로 철학을 환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이게 더 나쁜 방식으로는 백인-부르주아-남성이기 때문에 @@ 철학을 주창했다는 식이 되죠. 이건 “설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전기적입니다.

일종의 전기적 테마 비평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죠.(다만 저자가 이걸 얼마나 의식적으로 수행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박논을 출간한 건데, 아무리 일본이라도 테마 비평으로 박논을 주진 않을 거 같거든요. 물론 지금 이 책 같은 글로는 한국에선 박논을 받지 못합니다. 제 학위 논문도 “에세이적”인 게 “문제”로 여겨졌거든요.—물론 이게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그런 악의적인 비방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저 지적을 매우 중요한 비판으로 받아들인 거고, 저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죠)

푸코의 철학은 세 시기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각각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할 수 있고, 초기의 주요 키워드를 “지식”과 “권력”으로, 중기의 주요 키워드를 “생명권력”과 “통치성”으로, 후기의 주요 키워드를 “주체”와 “배려”로 삼을 수 있죠.

저자는 이러한 세 시기의 차이, 심지어는 “모순”을(역자는 초기와 후기의 긴장을 언급했는데, 전 중기와 후기의 긴장을 좀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실제로 중기에서 후기로의 변화로 푸코가 “변절”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공통의 테마로 이해하려 합니다.

이를 초기 혹은 초기 이전(50년대)의 문학론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것이죠.

저자는 푸코의 문학론에서 등장하는 “바깥”을 연결고리(‘경첩’으로 저자는 표현)로 삼아, 혹은 —좀 더 문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테마로 삼아, 일관성을 부여하려 합니다.

그래서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대체로 시간 순으로,(물론 시간을 가역적인 것으로 활용하지만) 문학론에서 출발하여 초기에서부터 후기까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뭐 상세한 내용은 지금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고...(읽어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니까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군요.

바로 푸코와 맑스의 관계입니다.

제가 앞에서 중기와 후기의 긴장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현재는 좌파=맑시스트=푸코주의자? 구도가 좀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알라딘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의 100자평을 가지고 얘기했듯이, 이게 당연시되고 있지만, 이게 당연한 것인지는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들은 스스로를 맑시스트로 여기고 있지만, 어떻게 저자들이 “맑시스트”일 수 있는지 모르겠고, 도대체 왜 푸코로만 자본주의 비판을 얘기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한 알라딘 유저의 토로는 매우매우 합당한 비판이고, 합당한 문제의식이거든요.

실제로 푸코와 맑스를 연결하는 것은 꽤나 문제적입니다.

애초에 둘은 이질적이거나 모순적이거든요.

—발리바르가 이 문제도 정확히 분석해주던데— 애초에 푸코는 맑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저런 작업을 수행한 거였습니다.

보통 초중기 푸코로 말해지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좀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읽은 <감시와 처벌>로 얘기해보죠.

<감시와 처벌>은 미시권력의 침투를 공포스럽게 서술하는 책이 아닙니다.

제가 저 책을 읽게 된 수업에서 교수님이 보여주는 영상이나, 교수님이 강의를 통해 설명하는 푸코의 연구는 파놉티콘 시스템을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거였는데,(매우 불길한 음악과 함께 말이죠) 제가 그 수업에서 제출한 보고서는 그런 해석은 과장된 해석이고 심지어는 틀린 해석이라는 걸 텍스트를 근거로 보여주는 거였습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완전 다른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일단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중세의 형사제도의 근대의 형사제도와의 이질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고유한 합리성이었습니다.

푸코는 중세와 근대의 차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의 고유한 내적 합리성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변화가 제시되죠.

그런데 변화는 일관적이면서도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근대적 종합”을 통해서 성취된 무수히 많은 변화들은 하나로 퉁쳐질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상동적”이라고 말해질 어떤 유사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사함도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들이 현재의 형태로 종합될 필연성은 없죠.

다른 종합도 가능하고, 실제로 다른 종합들이 시도되고, 성취되었습니다.

푸코는 이를 국가나 지역, 시기의 차이 속에서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거죠.

이런 작업은 중립적입니다. 때문에 이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근대적인 성취가 단일하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겁니다.

즉, 세속화, 근대화, 탈주술화, 근대화 등등으로 서술될 종류의 “발전”으로 볼 수 있고, 오히려 현대적 종합의 불완전성은, 푸코의 연구와 같은 작업을 기초로 보충되어야할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실제로 푸코에 대한 보수주의적 해석은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발리바르가 이를 지적하더군요)

그러므로 푸코의 작업은 현대를 비판하는 의미로만 활용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발리바르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푸코의 의도가 애초부터 이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보통 푸코를 통해서 말해지는 자본주의의 미시권력을 통한 지배에 대한 비판/해방은 애초부터 푸코의 것이 아니었고, 푸코가 비판하려고 했던 “적”이었다는 것이죠.

푸코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저것은 “프로이트주의적인 맑스주의”였다고 발리바르는 지적합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푸코는 저런 조류의 멍청함, “자본주의=억압=성적 억압->맑스주의=해방=성적 해방”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저런 연구를 수행했다는 것이죠.

저런 치들의 주장은 그러니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주류” 운동에 참여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식의 멍청한, 심지어는 매우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폭력적인 헛소리였습니다.(사실 알튀세르가 이런 헛짓거리의 대표였는데... 알튀세르라는 인물도 내적 긴장이 큰, 철학과 실천 사이의 긴장 속에서 고통 받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놈 철학과 이 놈의 정치강령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알튀세르의 정치강령은 그저 당의 지령에 따르는 “영혼 없는” 확성기에 불과했죠)

푸코는 저런 주류를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 것이라고 발리바르는 지적합니다.(그럼에도 발리바르는 푸코와 맑스를 다시 연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꽤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교화하는데,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좀 뜬금없이 다른 얘기를 꺼냈는데, 이 얘기도 <푸코의 미학>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푸코는 후기 저작 때문에 실존철학이 다 되었다, 샤르트르랑 다를 게 뭐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푸코는 당연히도 반박을 했지만, 둘의 유사성도 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푸코의 미학>의 저자는 푸코의 철학을 미학으로, 혹은 실존철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샤르트르랑 “다른” 실존철학일 수는 있어도, 실존철학이긴 하다는 얘기입니다.(물론 번역본에서 “실존의 기술”로 번역되는 용어는 원래 “생존의 기술”이었습니다. 전 원래 용어가 더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역자가 이렇게 번역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원어가 “실존”에 해당되는 것이거든요. 근데 전 저자가 의도적으로 이를 “생존”으로 옮겼고, “생존”으로 말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왜곡”한 거라고 생각합니다.—저도 생존으로 이해하고 있고요)

그런데 샤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맑스주의를 매섭게 공격하면서도, 맑스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샤르트르는 멍청한 주류 맑시즘의 권위적이고 교만하고 세상 모르면서 복종하라는 쓰레기 같은 헛소리를 박살내면서도, 진정한 맑시즘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실존철학”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그런 저작을 낸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전 푸코의 저작을 맑시즘화하는 것은 푸코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리바르는 사실상 그런 작업을 몸소 수행하고 있는 것일 테고요.

<푸코의 미학>을 쓴 저자 다케다(성이 다케다 신겐이랑 같아서 다행히 성은 기억합니다. 이름은 기억 못하겠어요;;)는 여기서 좀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미학이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나아가 철학이자 문학으로 연결/확장된다고 주장하고, 그것들 사이에서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주장하긴 합니다.

다만 한갓 가능성을 넘어서는, 현실이 될 수 있을 잠재력을 가진 가능성이 어떻게 제작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느슨한 얘기를 할 뿐입니다.

물론 저자가 사건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략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이를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단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단점일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해서죠.

저기서부터는 철학이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의 영역일 수 있으니까요.

랑시에르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지, 그 자체로 정치인 것은 아닙니다.

이걸 부정하면 오히려 예술이 무너집니다.

푸코에게 저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멍청한 해석자들에게는 저 연결이 놀랍고 창조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제대로 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런 연결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잘라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철학의 한계를 정해야합니다.

철학은 정치학이 아니고, 사회학이 아닙니다

철학의 수행이 정치적 실천이나 사회적 운동인 것도 아니고요.

철학은 당연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입니다.

하지만 철학은 정치나 사회로 환원될 수 없고, 환원되서도 안 됩니다.

예술로는 두말할 것이 없죠.

푸코의 한계는 그래서 한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저게 철학이 멈춰야할 지점일 수 있거든요.(실제로 푸코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문제는 저게 정말로 멈춰야할 지점이냐는 것인가죠.

누군가에게는 푸코는 이미 너무 나아간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푸코는 너무 일찍 멈췄거나, 신체의 죽음으로 인해 멈추게 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죠.

여기서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이걸 지적하려고 저 얘길 꺼낸 것이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군요ㅋㅋ

이 책을 통해 푸코의 후기 연구들을 보다보니 “음... 니체잖아?”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푸코는 금욕주의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설정한 것을 기독교의 특징으로 보며, 이런 변화의 주요한 공로자로 테르툴리아누스를 꼽습니다.

그런데 금욕주의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설정한 것을 기독교의 특징으로 본 것은 니체였고, 이는 문자적으로 완벽히 동일하게 <도덕의 계보학>에서 서술됩니다.

푸코가 이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니체는 아무 근거 없이 얘기했죠.(제가 저번에 언급한 근거는 없지만 들으면 끄덕거리게 디는 “말이 되는 얘기”긴 하지만요)

푸코는 이를 근거를 두고 설명하며, 그 양태들을 분석하죠.

하지만 이런 차이로 푸코가 니체적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니체는 저런 양태를 중요치 않다고 보았겠지만요.(니체에 따르면, 기독교가 문제인 것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해서가 아니라, 금욕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게 “현대적”일 수 없게 되어서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의 기술은 한편으로는 참조항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로 승부를 걸어서는 안 되는 시대착오적인 대안들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특정한 기교들로 현대와의 투쟁을 벌이려고 하는 지라르와 세르토를 비방했을 겁니다. 그걸로 안 되는 거 모르면 바보여서 문제인 것이고, 알고 그러면 비겁하거나 위선적이라 문제라는 거죠. 뭐 전 그래도 비방하진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 존중을 보내게 된...) 

재미난 것은 이런 동형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전 지금 니체가 짱짱이다라는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푸코는 왜 말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해보자고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이를 발리바르로 얘기해보고 싶군요.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에게 이어 받은 “유물론적 인식론”은 사실 맑스보다는 니체에 가깝습니다.

그냥 저거 “즐거운 학문”입니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저걸 몰랐을 것 같지 않거든요?

실제로 발리바르는 저거 정교화하면서 거리distance를 개념어로 채택하고 정교화 하는데, 발리바르가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를 참조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몰랐을 가능성은 아예 없고요.(심지어 발리바르는 개념을 “정념”으로 말합니다. 이것도 “니체적”이고 그러니 “거리”란 개념어는 “거리의 파토스”로 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왜 이걸 얘기하지 않을까요?

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대인이라면 맑스와 니체에게 빚을 지고 있고, 둘에게 빚진 게 없다고 말하는 학자는 무식하거나 양심이 없다는 거라는 베버의 말을 따라 둘을 그냥 포괄할 겁니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그럴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는 맑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발리바르의 말과 글이 무게를 갖는 것은 프랑스의 맑스주의 전통 덕분이죠.

그의 실존은 맑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푸코도, 니체도 발리바르는 맑스로 말해야만 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이게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처럼 권위의 원천이 미결정적인 곳에서 무지성 맑스주의를 주창하면 멍청하고 양심 없는 것이지만, 발리바르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죠.

그는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맑스는 그의 근거이고, 배신할 수 없는 토대인 것이죠.(또한 이걸 배신해서 얻을 실천적 이득도 없습니다. 변절자의 말을 누가 듣겠어요?)

발리바르는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창의적으로 맑스를 읽어내고, 맑스주의를 변형시켜서 조건을 변경시키고 있습니다.

제약을 통한 창조, 제약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발리바르의 니체에 대한 침묵은 잘 이해가 됩니다.

전 발리바르의 현명함과 도덕성을 오히려 저 침묵을 통해 쩌렁쩌렁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말해야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을 잘 분별하는 사람이란 것이죠.

근데 푸코는 왜 그랬을지 잘 모르겠습니다.(아니면 언급했을 수도?)

오히려 이게 이해하고 싶더군요.

푸코는 실존을 빚진 “근거”가 마땅히 없는 양반이거든요. 그런데도 굳이 침묵할 필요가 있었나? 아니면 부채와 다른 이유에서 침묵한 것인가? 아니면 헤겔처럼 걍 양심이 없는 놈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푸코의 후기저작들을 읽어보기로...

하여간 그렇습니다ㅋㅋ

 

책 얘기보다 다른 얘기를 더 하게 되었군요.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