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최근 읽은 책들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그린비, 2012

근거와 무관하게 맞는 얘기만을 한다. 유머가 훌륭하다. 니체에 대한 코멘트도 훌륭. 내가 자주 강조하는 “희생”의 문제를 중심으로 니체를 해석한다. 타우베스는 뭘 좀 아는 사람이다.(타우베스도 이런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해서 빵터졌다. 타우베스가 지적하듯이 니체는 은근히 맞는 얘기만 한다)

 

칼 슈미트, <정치신학 2: 모든 정치신학이 처리되었다는 전설에 대하여>, 조효원, 그린비, 2019

이에 대해선 조만간 자세히 글을 적고 싶다.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변광배 옮김, 세창출판사, 2023

잡다한 사실들을 많이 다루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두 지식인을 엮는 “역사”라는 공통 테마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모티프 없이 사실들을 나열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설명”되겠는가?

 

에르트무트 비치슬라, <벤야민과 브레히트: 예술과 정치의 실험실>, 윤미애 옮김, 문학동네, 2015

시리넬리랑 비슷한 결함을 가진 책. 시리넬리보다는 양반인데, 적어도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티프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 하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테마를 전개하기 위해 요구될 모티프의 구체성은 역사적 구체성이 아니라 형태적 구체성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리넬리 책보다 낫지만, 설명이란 게 없고 나열뿐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래도 문헌학적인 정보는 많아 박식을 자랑하는 용도로 쓰기에는 알맞을 거다.

 

야마모토 요시타카,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2: 지동설의 제창과 상극적인 우주론들>, 박철은 옮김, 동아시아, 2022

독학자여서 그런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불명확하다. 느슨하게 이해했을 경우 이미 상식에 가까운 얘기를 굳이 왜 주장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며, 엄격하게 이해했을 경우 굳이 이런 세밀한 것들을 느슨한 주제로 엮는 의의에 의문이 들 것이다. 그래도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정하는 부분들에서 연구사적 엄밀함은 부족하지만, 정확한 판단이 담겨 있어 좋았다. 요시타카가 지적하듯, 제발 책을 좀 보고 사실 관계를 확정했으면 한다.

 

사사키 아타루, <야전과 영원>,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2015

다시 읽었다. 예전에도 제대로 이해하긴 했었는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져서인지, 저제에게 좀 더 호의적인 마음이 들게 되었다. 답이 없어 문제라는 진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결국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의 나도 하게 되었기 때문. 상세한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랭 쉬피오를 읽다가 이 책이 생각이 났다. 알랭 쉬피오의 숫자에 의한 협치를 읽다가 르장드르가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고 쉬피오를 르장드르의 제자로 본 아타루의 판단이 생각났던 것. 덕분에 다시 읽게 되었고, 옛날보다 르장드르의 역사적 설명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아타루의 서술 자체에는 호의적이게 되었다. 르장드르의 설명에 회의적이게 된 것은 근대 법학사를 연구함에 따라 중세 어쩌구 하는 소리들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 덕분이다.

 

알랭 쉬피오, <숫자에 의한 협치>, 박제성 옮김, 한울, 2019

‘가버넌스’를 굳이 ‘협치’로 번역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수를 통한 통치에 쉬피오가 꽤나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도 인용되지만 테오도르 포터의 <수를 믿는다>와 병행해서 읽으면 좋을 책. 갠적으론 초반부에 있는 법학사 재구성 부분을 빼고는 지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토피카>, 김재홍 옮김, 서광사, 2021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인 듯. 이정도로 정밀한 책은 현대 학자들 중에서도 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도대체 학문이란 게 없던 시절에 이런 책을 어떻게, 그리고 왜 썼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무니타스: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윤병언 옮김, 크리티카, 2022

오랜만에 재밌게 읽은 현대 철학서이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죄다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글에 글을 덧붙이기만 해서 읽을 맛이 나지 않는데, 이 책은 좀 다르다. 전통적으로 정치/사회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휘들을 배제하고, 코무니타스/임무니타스라는 새로운 어휘로 대상을 새롭게 분석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관점이다. 여기서 새로운 관점이란 아무 거나 떠드는 덕에 말해질 수 있는 “새로움”이 아니다. 이전의 어휘를 통해서 볼 수 있던 것들을, 새로운 어휘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새로움”이다. 다시 말해, 그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론 격의 책이라 그렇게 총체적이진 않았지만, 확실히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작업이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꽤나 회의적이지만 말이다.

 

자크 데리다, <비밀의 취향>, 김민호 옮김, 이학사, 2022

데리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깨게 해준 책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데리다가 쓴 대부분의 책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데리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철학”을 가능케 해준 선조들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다. 뭐 멀쩡히 잘 이해해놓고 왜 그딴 책을 썼는지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데리다 본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 데리다가 하소연하듯이 본인의 한계는 거기까지였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내부자가 될 수 없었던 내부자적 외부인인 데리다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너무 가혹할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그 이상이었지만, 그렇기에 플라톤이 대단한 것이지 데리다를 비난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데리다는 그래도 철학이란 게 뭔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처지 안에서 철학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데리다와 화해할 수 있었다.

 

페리데리크 그로, <미셸 푸코>, 배세진, 이학사, 2022

내공 있는 책. 이미 푸코에 대해 이래저래 들은 게 많은 사람들이 참고하기 좋은 책인 듯하다. 역자는 이 책이 중립적이라고 평가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로는 푸코를 여러 모로 왜곡시키고 있다. 다만 이러한 왜곡이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라 중립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그로의 왜곡은 합당하다. 푸코의 작업으로부터 의미 있는 교훈을 이끌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로의 해석을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인간 푸코 자체는 별 생각 없이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되는대로 지껄였던 것이겠지만, 그런 파편들 속에서 하나의 철학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그로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로의 관점을 부정하고 푸코를 의미 있게 읽을 방법은 없다. 역사가로서의 푸코? 푸코 본인이 말했듯 그런 추잡한 사실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푸코 또한 그런 것들에 신물이 나서 더 얘기하기 싫다고 고백할 정도였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역사적 탐구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일 수밖에 없고, 그로는 그러한 철학으로 작동할 수 있을 가능한 한계를 제시했다. 그러니 중립적일 수밖에. 원래부터 선line은 중립적이다.

 

당 스페르베르, <문화 설명하기>, 김윤성·구형찬 옮김, 이학사, 2022

옛날에 <이성의 진화>를 읽을 때는 꽤나 압도적이라고 느꼈는데, 이 책을 보고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이나 저 책이나 앞도적이진 않다.(그만큼 나도 공부를 많이 한 거겠지...) 문화가 당연히 연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많지만, 문화는 당연히도 연구되지 않는다. 사물이 아닌데 연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당 스페르베르는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개념, 즉 효력을 중심으로 문화 연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결국 설명이라기보다는 소개에 가까운 시론에 그쳤는데, 핵심은 역학epidemiology에서의 인과를 유비항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 책 덕분에 낸시 크리거의 <역학 이론과 맥락>이란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근세, <스피노자, 욕망의 기하학>, 아카넷, 2022

연구 노트를 출간해둔 것 같다. 그래도 단행본인데 구조라는 게 없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설명을 하려는 것인지 논증을 하려는 것인지, 설득을 원하는지, 입증을 원하는지, 정말로 하나도 모르겠다. 이 책에 나열된 문장들에 진리치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로 무엇을 둬야할지 모르겠다는 것.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문장들로 진리치를 부여해야하나?(이 경우 복사 붙여넣기가 최고의 전략이 될 것이다) 아니면 일종의 해석적 주장으로? 아니면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아무 입장도 없고, 그러니 구조가 결여된 책이 나온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도 스피노자 책 요약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걸 “연구서”나 “개론서”로 부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루이스 화이트 벡,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주해>, 오창환 옮김, 길, 2022

“주해”란 장르를 내가 읽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해 특성상 근본적인 테마 같은 것이 없이, 해당 구절 관련된 잡다한 논쟁을 모두 포괄하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 플라톤 주해서는 그나마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 읽을 수 있겠는데, 이건 정말 힘들었다. 주해를 쓰더라도, 구체적인 대립 구도들을 잘 활용하여 전개의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듯... 저자가 공부는 많이 한 것 같은데, 서술들이 좀 두리뭉실해서 정보값이 모호한 경우가 많은 건 좀 아쉬웠다. 폴 가이어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문장 자체는 단순한데 두리뭉실한 서술이 많아서 효용이 좀 떨어진다...(역시 글은 신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