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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알렉세이 유르착 –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보충)

이 책도 카스트루의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처럼 민족지로서 기술된 내용과 민족지로서 부여된 가치가 좀 괴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괴리가 꼭 나쁜 것 같지는 않아요. 어떤 주장에 대한 반박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수도 있거든요. 논점이 불분명해지고, 논리적으로 좋은 논쟁은 아닐 수 있겠지만, 이것 또한 반박일 수 있고, “좋은” 반박일 수 있습니다. 때론 논점 자체를 뒤트는 일이 필요하니까요. 비슷하게 논점이 모호할지라 좋은 민족지일 수 있습니다.(혹은 논점이 모호해야 좋은 민족지일 수 있을지도?) 어떤 하나의 주장에 몰입하지 않을 때 민족지로서의 풍부함이 더 잘 보존될 테니 말이죠.

 

일단—제 마음대로—이 책 자체의 동기를 단순화하자면 빡침으로부터 비롯된 반박입니다. 이런 반박은 헌익 샘의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서문에서 지나가면서 언급되지만, 충분히 헌익 샘의 빡침을 느낄 수 있는 언급이 있거든요. 헌익 샘에 따르면 유럽 학자들 중에서는 냉전이 허구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나 많고, 그게 “학술적인” 입장으로 여겨진다고 하더군요. 헌익 샘은 저런 학자연함에 분노를 느끼고 말이죠. 뭐 어떤 점에서 저들은 틀린 얘길 하는 건 아닙니다. 유럽의 엘리트들이 체험한 냉점은 말싸움이었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헌익 샘이 강조하듯, 유럽이 아닌 곳, 예컨대 베트남 같은 곳에서 냉전은 말싸움이 아니라 전쟁이었고, 정치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긴 가공할 만한 대립이었죠. 냉전에 대한 체험이 다양할 수 있을 거라는 상식적인 성찰도 하지 않으니 냉전의 허구성 운운하는 게 가능한 것이고 말이죠.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저런 멍청한 헛소리에 대한 반박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환원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집필 동기로서 저런 멍청한 헛소리는 훌륭한 땔감이었을 겁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에도 훌륭한 땔감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붕괴에 대한 사람들의 헛소리가 그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보통 그렇게 여겨지는데—사람들은 대체로 소련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소련의 붕괴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소련의 붕괴라는 놀라운 사건은 역사의 필연으로 축소해석되고 말이죠. 이런 축소해석은 소련이란 국가가 정상 국가가 아니라는 전제로부터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소련을 비정상적인 국가로, 권위적이든 전체적이든 형식적이든 하여간 인간성을 말살하고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던 곳으로 생각합니다. 유르착은 이런 헛소리에 빡침을 느끼고 반박하려합니다. 물론 반박으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환원되지도 않고, 환원되어서도 안 되겠지만요.

 

유르착은 소련에서의, 특히 후기 소련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에 대한 헛소리와 그런 헛소리에 대한 기존의 반박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소련에 대한 헛소리는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소련은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고 비인간적인, 그래서 국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런 정치체였다, 때문에 그게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소련이 어떻게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는지다, 소련이 오래 지속된 것은 그런 비정상적인 삶을 소련 사람들이 받아들여서이다, 그들은 저항을 하지 않고 순종하며 살았다,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거짓이고 허위이며 인간적이지 않다고 여김과 동시에 그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며 소련을 지속시켰다, 거짓된 삶을 껴안은 소련 민중들의 비겁함과 위선이야말로 소련의 기둥이었다, 저런 소시민들이야말로 인류 진보를 방해하는 최악의 걸림돌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이런 것이죠. 소련의 민중들에는 잘못이 없다, 이들을 비인간적으로 다룬 수뇌부들이 문제다, 그들의 폭제가 지속되었던 것은 그들이 사용한 통제 기술 덕분이었다, 소련의 민중들은 고도화된 통제 기술 아래에서도 삶을 견디며 자신들만의 저항을 실천했다, 그러한 저항이 바로 풍자와 태업이었다, 소련의 민중들은 풍자와 태업을 통해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소련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니 소련의 민중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민중은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저항한다. 유르착은 이런 식의 주장과 반박 모두에 거리를 둡니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 거리를 많이 두는데, 전자는 그냥 헛소리인 반면 후자는 말이 되는 헛소리이기 때문이죠. 유르착은 후자의 서술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의 삶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며 후자를 반박합니다. 이런 반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르착은 소련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하죠. 그래서 이를 복원하는 겁니다.

 

소련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저런 반박을 위해서도 중요하겠지만, 유르착 본인에게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체험이었습니다. 유르착은 후기 소련에서 성장한 후기 사회주의 세대에 속하는데, 이 세대에게 있어 후기 소련과 소련의 붕괴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유르착은 이것이 본인에게 국한된,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연구를 위해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광고했을 때, 후기 사회주의 세대에 속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연락을 해왔고, 유르착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저 시대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말 이해하고 싶다고 호소했기 때문이죠. 그러니 유르착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저런 헛소리들을 일축하고 반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겪은 “삶”을, 지금은 거의 잊혀지고, 주목 받고 있지 않은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지에 대한 다른 의미부여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유르착에게나, 그리고 이를 읽는 독자에게나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이죠.

 

대충 운은 다 뛰운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유르착은 소련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복원하기 위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갔던 주체를 복원합니다. 바로 ‘스보이’죠. ‘스보이’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뜻하는 러시아어입니다. 유르착은 스보이를 공중public이나 민중peaple과 흡사하지만 구별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스보이는 공중처럼 공공연한 것도 아니고, 민중처럼 총체적인 것도 아닙니다. 스보이는 소련이라는 체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당연히 이 또한 하나가 아닌데, 이 “하나 아님”이 좀 특별합니다. 다중적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맥락 의존적이고 집단 의존적인, 자유로우면서도 통제적인, 이론적으로는 불합리하지만 실천적으로 합목적적인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르착은 기존의 연구를 반박하면서 스보이를 구체화합니다. 기존의 연구에서 스보이는 저항의 주체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국가나 이념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민중들이었다는 것이죠. 유르착은 스보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였다고 지적합니다. 스보이들은 광신자들을 모두 싫어했어요. 친국가적인 열성분자뿐만 아니라 반국가적인 반체제분자도 말이죠. 스보이들은 반체제분자를 싫어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운영해야하는 체제를 운영하는 실천적인 문제들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죠. 주의해야할 것은 “실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머리 같은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도리 같은 것이고, 그래서 반체제분자들을 스보이들은 싫어했습니다. 제도 속에는 어차피 해야하는 일들이 있고, 이런 일들을 좋게 좋게 해결해야합니다. 모두에게 그런 일들은 귀찮은 일이고, 모두가 투덜거리죠. 하지만 그런 일들을 거부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일에 빵꾸가 나면 결국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되고, 그런 문제를 겪는 이는 같은 “스보이”거든요. 스보이, “정상적”이고,—러시아어에서는 또—“괜찮은”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스보이,—러시아어에서는 또—“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이죠. 연대책임-상호부조의 세계에서 좋게 좋게 일을 해결할 줄 모른다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며, “게으른”겁니다. 때문에 소련의 체제에서는 같이 일하는 누군가가 스보이인지가 중요합니다. 적당히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 농담과 진담을 구별 못하고 내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공공연하게 떠들거나 고발하는 이상한 사람인지가 중요했다는 것이죠. 만약 이런 사람이라면 스보이가 아니고, 그들은 축출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실수”를 범했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실수임을 인정하고 스보이임을 주장한다면 괜찮습니다. 결국 체제를 운영하는 일, 정상적인 삶을 지속하는 일에 필요한 사람은 스보이니까 말이죠. 반체제분자는 그렇기에 스보이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광신주의자라는 점에서 열성분자랑 다를 게 없거든요. 중요한 것은 열성분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스보이이냐고, 반국가적인 것은 친국가적인 것만큼 문제적이니까요.

 

유르착은 이런 “스보이”를 통해 소련의 정상적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체제의 억압 속에서 숨죽이며 불안불안하게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속삭이는 사회>에서 그려지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들은 주어진 제도를 적절히 잘 이용했어요. 유르착은 이를 들뢰즈와 과타리의 “탈-영토화”를 통해 설명합니다. 스보이들은 기구들을 적절히 활용해가며 자신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먹고 사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고요.(유르착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되었던 뒷거래들은 적당히만 언급하고 상세히 안 다룹니다) 유르착이 주목하는 삶은 이데올로기랑 관련된, 문화적인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문제적일 것처럼 보이는 문화들을 스보이들이 어떻게 향유했는지에 주목합니다. 유르착은 그들의 향유(이는 단순히 취하는 것만 아니라 거부하는 것, 태업이나 풍자도 포함됩니다)가 그것과 반대되는 것만 같은 제도, 체제, 이념과 오히려 매우 상보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향유들을 가능케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들이었다는 거죠. 스보이들은 제도, 체제, 이념을 형식적으로는 잘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자신들에게 알맞게 변주하였고, 그 안에서 창조적 삶을 발휘했죠. 유르착은 이러한 활동이 탈-영토화를 수행하는 “되기”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되기”가 들뢰즈 말마따나 “모방”이 아니듯이, 스보이들의 “되기” 또한 제도에 대한 “찬동”이나 이념의 “진리”에 대한 승인이 아니었다고 지적하죠. 이들의 활동은 저항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체제를 동일한 것으로서 반복 재생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알맞게, 지역과 집단과에 따라 적절하게 창조적으로 변형되며 재생산된 것이었죠.

 

유르착은 이러한 “되기”를 저항이라기보다는 미학적인 삶을 실천하는 수행으로 보려고 합니다. 특히 7장에서는 니체의 경구를 제사로 삼으며 예술가적인 삶을 스보이들의 수행과 연결시키거든요.(이건 좀 어폐가 있네요. 7장의 인물들은 스보이가 아니긴 합니다ㅋㅋ) 다만 이런 연결은 좀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이들은 스보이가 아니기도 하고, 이들의 행위를 설명할 때 유르착이 좀 순진한 서술을 섞거든요. 그들의 삶을 예술가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수행한 활동의 결과물, 그들이 내놓은 내용이 아닙니다. 유르착이 제사로 삼은 니체의 경구에도 그렇게 쓰여있고요. 그런데 유르착은 멍청한 지젝의 영향 때문인지 자꾸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네크로리얼리즘... 이런 거 하나도 중요치 않아요. 그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상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한 것은 하나도 중요치 않고 말이죠. 지젝은 멍청하고 예술가적이지 못하니 그런 걸로 칸트를 들먹거리며 이상한 궤변을 일삼는 거고요.(칸트로 헛소리하며 내놓은 ‘개념어’를 보니 칸트를 안 읽고 하는 소리인 게 분명한... 도대체 그런 책을 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네크로리얼리즘에서 시체 이미지가 활용된 것은 순전히 우연적입니다. 그냥 그 부류의 주도자인 유피트가 “우연히” 호프만의 <법의학 도해서>를 손에 넣었고, 그 책에 진열되는 놀라운 이미지에 매료된 덕분이겠죠. 이 우연 덕분에 네크로리얼리즘이 “네크로리얼리즘”일 수 있었겠고요.(‘네크로’에 주목하지 않았으면 ‘네크로리얼리즘’일 수 없었을 테니ㅋㅋ) 별 거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스보이들이에요. 저런 매우 기이한 짓거리를 한 이들이 아니라요. 특히 6장의 알렉산드르처럼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락 음악에 심취한 이들이 중요하죠.

 

알렉산드르에게 주목해야하는 것은 스보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위해 필수적이에요. 스보이들의 업무 수행을 생각하면 그들은 열성이 없고, 좀 태업하는 이들 같아 보이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스보이들은 오히려 열성적이었습니다. 그게 “정치”가 아니었을 뿐이죠. 7장에서 다뤄지는 헛짓거리를 하는 하류 집단들을 가능케 한 것 또한 스보이들의 열성이었고요.(생각해보면 유르착이 이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 같기도... 아마 이게 맞을 겁니다) 스보이들은 형식적인 업무는 대충 처리했지만 비형식적인 활동은 열성적으로 수행했어요. “정치”에 거리를 둔 대신 다른 일에 몰두했던 것이죠.(다만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저런 제도적 기구들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몰두가 피자 먹기나 시 낭송, 문학 토론이곤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학문”도 저런 몰두일 수 있었거든요. 4장 ‘브녜’에서 살기에서 이런 삶이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브녜’는 안과 밖이 모호한 장소에서의 바깥인데(이게 번역이 안 된다고 하던데... 좀 병신 같은 소리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우리말 ‘바깥’도 이런 의미고 영어 ‘outsider’도 이런 의미거든요. 애초에 안과 괴리된 “밖”은 언어화될 이유가 없습니다), 소련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소련적이지 않은 삶”을 누린 이들의 삶의 장소를 가리키죠. 4장은 그렇기에 그런 삶을 살게 해준 공간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해줍니다. 제게 흥미로운 것은 저런 문학 서클, 음악 서클이 아니라 이론물리학자 학회였어요. 연구비 타기는 어려웠지만 쓸데없는 일로부턴 자유로웠던 소련 학자들이 학회에서 모였을 때 어떤 짓을 했는지 잘 보여주죠. 유르착은 이를 매우 짧게(265-269) 보여주는데 전 이게 더 흥미로웠어요. 스보이들이 태만적이고 적당히 유유락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빡세게 삶을 살았던 이들이었다는 걸 잘 보여주거든요. 저 당시 나온 대단한 연구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잘 보여주고요.

 

유르착은 스보이들의 삶에서 중요했던 것은 재미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반체제분자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재미가 없어서에요. 반체제분자들이 하는 얘기는 뻔하고, 그런 걸 누가 모르겠냐는 거죠. 그런 뻔한 얘기가 아닌 재미난 유흿거리를 스보이들은 찾았고, 이념, 제도, 기구들이 그들의 즐거운 삶에 봉사한 것이죠. 이런 봉사는 단순 도구화와 다릅니다. 알렉산드르의 경우처럼 이념이 즐거운 삶의 조건일 수 있거든요. 이들의 삶은 본래 업무에서 적당히 빚겨난 것이라기보다는, 학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그것 자체가 본질일 수도 있습니다. 진짜 이념, 진짜 과학, 진짜 학문을 위한 활동이었고, 형식들을 이에 적절히 활용한 것이었다는 것이죠. 전 이게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요. 유르착이 보여주는 후기 소련에서의 정상적인 삶은 제가 겪은 군대에서의 정상적인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런 헛짓거리는—<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잘 그려지는데—별로 도움도 안 됩니다. 저게 의미를 갖는 것은 소련이 붕괴한 덕분이기 때문에 저런 짓거리들이 소련의 붕괴와 무관하다면 딱히 의미 없을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를 빡센 활동, 이념과 현실의 불일치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면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유르착이 지적하듯 저런 조건 자체가 “학문”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무엇이 사회주의다운 것인지를 학문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이런 특수한 조건을 형성시켰습니다. 이러한 조건의 붕괴는 그렇기에 학문의 실패와 무관할 수 없고요.(고르바초프의 메타 담론의 부재에 대한 인정은 결국 학문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 저런 조건 속에서 학문을 수행하려고 했던 이들이, 그냥 문화생활 열심히 실천(?)하며 즐겁게 산 이들보다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이 불가능성이란 조건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 조건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려고 “실험”한 이들이기 때문이죠. 물론 이들의 “실험”은 소련의 붕괴에도, 소련 이후의 개혁에도 큰 기여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영원했던” 사회주의 체제를 살면서도, “미래”라는, 영원한 현재에서는 꿈꿀 수 없는 세계를 꿈꾼 것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이 놀라운 사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영원한 현재 속에서 다른 세계를 모색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영원하면서도 영원하지 않은, 바뀔 수 있는 역사, 혁명이 가능한 역사가 어떻게 인식 가능하고 실험 가능한지를 말이죠.


쓰다보니 단점을 좀 늘어놓게 되었는데... 진짜 좋은 책이고,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또한 제가 제기한 문제점은 인류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장점을 말하고 싶군요. 이 책의 2장에서 보여주는 분석은 정말 탁월합니다. 유르착은 언어학 논쟁에 스탈린이 개입한 것에 주목하며,(“최고 지배자의 학문적 개입”은 유르착의 지적처럼 독특한 일입니다. 또한 스탈린의 개입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번만 개입했거든요) 소련 사회가 과학을 매개로 이데올로기/유토피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그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유르착은 이런 설명을 체계론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문체분석을 통해서도 보여줍니다. 친 이데올로기적인, 공식적이고 그렇기에 정통적이어야만 하는 문서들이 어떤 양식적 특징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양식적 특징이 어떤 진리 생산 메커니즘을 유발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대충 추상적으로 얘기했는데... 실제로 보면 더욱 훌륭합니다. 그리고 영욱 샘 말마따나 문체분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웬만한 문학자들은 못하거나 외양적으로만 할 수 있죠) 유르착이 문체분석까지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유르착은 “영원한 사회주의 체제”가 담론들 덕분에 가능해졌고, 지속되었다는 것을 “담론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의 연구에 재귀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담론을 형식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권위가 담론을 매개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양식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말이죠. 이는 분석적으로만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르착은 소비에트의 “종말”에 고르바초프의 발표가 큰 기여를 했다 주장합니다. 유르착은 고르바초프의 발표문을 분석하면, 그가 이전의 전통을 어떻게 붕괴시키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게 당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유르착은 소련의 붕괴가 저 발표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발표가 한 시대의 끝을 체감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유르착의 연구는 좋은 순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일관적으로 “담론”을 통해 설명하고, 담론을 통해 보여주니 말이죠.

 

개인적으로 2장이 흥미로웠던 이유 중 하나는 유르착의 분석이 일반적으로 느껴져서였습니다. 그의 분석은 후기 소련뿐만 아니라 꽤나 많은 이데올로기 체제(유르착은 지젝의 작업에 근거하여 이를 두 유형으로 구별하는데, 그 중 하나에 속하는)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예컨대 “헤겔 학계” 따위가 말이죠. 헤겔 학계 안에서 수행되는 학술활동은 외부자가 볼 때 기이합니다. 하지만 이를 유르착처럼 분석해보면 그들의 “정상적인 학술활동”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수행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담론 생산 및 담론 생산을 통한 실천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전 이런 사례를 분석하는 데 있어 <모든 것은 영원했다> 2장만큼 좋은 문헌이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

 

제 불만은 사례 분석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현상 연구로서, 현장 연구로서 문제가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불만을 느끼는 것은 바로 저런 연구를 통해 어떤 일반적인/보편적인 의미를 뽑아 먹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르착이 1장을 통해 주장한 “유의미성”만으로도 인류학적으로는 충분히 가치/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현상/현장을 분석하는 데 적용되곤 하는 특정한 도식들이 어떤 문제를 초래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적 분석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제 불만은 유르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저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시작할, 제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을 의식하게 만드는 불만족이니까요.


유르착이 그런 문제를 언급하는 건 분명합니다. 유르착 및 후기 소비에트 세대가 저 시대의 끝을 마주했을 때, 예상 밖이면서도 그동안 준비해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진술되고 있으니까요. 다만 유르착에게 그런 준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준비로서 내놓고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우리의 생쥐스뜨 영진 샘의 알라딘 마이 리뷰를 인용하고 싶군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소비에트 체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붕괴되었는가.. 그러한 장의 전환을 가져온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국면의 전환이 가져온 어떤 역설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언어를 빌린다면, 페레스트로이카란 권위적 담론이 일상 속에서 기능했던 원칙들에 관해 토론을 하는 새로운 장소, 즉 공론장의 도입이며, 이제 언어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면서 후기 사회주의를 작동시킨 수행적 전환의 원칙이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미 후기 사회주의 체제에서 계속 자라고 있던 종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언어와 의례를 비롯한 여타 행위들을 통해 시스템의 권위적 형식들이 주도면밀하게 만장일치로 더 많이 재생산될수록, 그것의 진술적 의미와 형식 사이의 연결은 더 많이 끝어지고, 이는 결국 더욱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허용하게 되므로."

 

전 영진 샘이랑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유르착이 말한 “준비”는 실질적인/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준비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제가 저번에 얘기했듯이 6.25와 분단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인 원인은 외교사적으로 분석하는 게 훨씬 더 “사실”에 가깝습니다. 소련 붕괴도 마찬가지에요. 소련이 바로 그 시절 붕괴한 이유는 러시아가 소련에서 탈퇴해서였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의 소련 탈퇴는 순전히 개인적인 원인이었기에 “역사적 우연”에 해당될 거고요. 유르착이 언급한 “준비”는 그렇기에 좀 다른 의미의 준비입니다. 제가 “영원한 소비에트 체제 속에서 영원하지 않음을 느끼는 일”로 표현한 무엇일 겁니다. 아마도 유르착은 소비에트 안에서 살아진 소비에트적이지 않은 삶이 이러한 “준비”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저런 종류의 삶, 탈-영토화, 되기에 심드렁함을 느꼈고, 문제적이라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탈-영토화”를 수행하는, “되기”를 수행하는 삶인지가 아닙니다. 어떤 탈-영토화를 수행하는, 어떤 되기를 수행하는 삶인지입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을 보라”고 말할 수 있는(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가 생각나는군요ㅋㅋ), 그래서 보편적/일반적 규범을 호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특정한 삶입니다. 전 유르착의 연구가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유르착의 연구가 저에게 문제를 풀 시작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제가 유르착을 비판했지만, 이를 확대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규범성, 혹은 윤리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유르착의 연구는 오히려 규범성과 윤리를 배제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성공적인 것일 수 있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특정한 삶을 민족지로서 다루면서 규범성과 윤리를 말한다면, 저 시절의 삶을 이상화하고 낭만화하게 되기 슆거든요. 유르착은 저 시절의 삶을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저 시절 삶이 어떤 것이었고,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려고 한 것일 뿐이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대에게 분명 중요했지만, 오늘날에는 전혀 기억되지 않고 있는 삶을 “기록”하기 위해 말이죠. 유르착은 있는 그대로 저 시대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했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도 의미 있을 수 있길 원했을 겁니다. 그 점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전 평가하고요. 다시 말해 유르착은 “입구”만을 제공하길 원했다는 것이고, “출구”는 우리 같은 철학자들이 찾아야합니다. 찾을 수 있다면, 찾길 원한다면 말이죠. 전 이런 의미에선 유르착이 더욱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준비”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진 샘은 유르착의 책을 읽고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읽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전 다른 혁명을 떠올렸습니다. 정확히는 일어나지 않은 혁명이죠.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안티(반대이자 대체인)가 아니었습니다. 저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티-교회사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티-교회사를 통한 안티-그리스도겠죠. 하여간 저기서 니체는 “대체 역사”를 주장합니다. 체사레 보르자가 교황이된 역사를 상상해보라고 하면서요. 뭐 저런 상상이 븅신 같은 것과 별개로 니체가 기대한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파악 가능합니다. 니체에게 있어 르네상스는 “웃음”의 부활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침묵이었고요. 그런데 이를 수행한 인간/삶에 대한 니체의 서술은 유르착의 서술과 공명하는 점이 많습니다. 니체는 당대 르네상스=가톨릭=로마을 스보이로, 루터를 광신자(열성분자+반체제분자)로 서술하거든요. 결국 광신자들이 승리해서 르네상스의 성취가 파괴되었고, 진정한 혁명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전복이자, 그리스도교의 변신이 미루어졌다는 겁니다. 후기에 니체는 계속 웃음을 얘기하는데, 니체가 그려내는 웃음 이미지는 유르착이 후기 소련에서 발견한 웃음 이미지랑 비슷해요. 조롱인데 이게 강한 반대, 기존의 진리에 대한 반대/반박으로서의 조롱이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의 웃음이거든요.(유르착의 웃음 구별은 슬로터다이크의 연구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니체는 저런 웃음들로부터 “진정한” “혁명”이 “준비”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란 얘기입니다. 저런 웃음 없이 진행된 혁명, 다시 말해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은 그래서 니체에게 “가짜 혁명”이고요.(둘 다 광신이라 가짜라는 논리) 뭐 니체 또한 저런 웃음이 그래서 어케 혁명으로 이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정학히 말하자면 사회학적으로 연구하진 않았습니다. 뭐 당시에는 사회학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니체를 비난하기도 좀 어렵고요.(이런 문제는 오늘날에도 사회학적으로 그다지 잘 연구되고 있지 않습니다. 연구하기 빡세거든요. 뭐 전 “그래도 중요한 성과를 낸 연구들”을 좀 손에 쥐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진 않습니다) 암튼 전 이런 점에서 유르착이 “혁명에 대한 준비”를 어떤 의미에선 제대로 말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