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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승철 - 사회적인 것을 계산하기: 사회적 가치 지표 개발의 하부정치

책이 아니라 논문이지만 일단 서평으로...

역시나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승철 샘 논문을 보니 승철 샘은 문제의 각을 참 잘 잡는 것 같군요.

본인이 얘기하려는 문제가 명확하고, 이를 주장할 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잘 가져온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잘 가져온다는 것은 “가져온 것들”이 모두 최고의 참조항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양한 작업들을 자신의 맥락으로 전유하여 본인의 얘깃거리로 잘 소화시킨다는 의미에요.

그러니 앞으로도 좋은 연구를 계속하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각설하고, 원래 얘깃거리로 돌아와 승철 샘의 페어 활용 가능성을 얘기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승철 샘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평가 지표”입니다.

평가 지표는 당연히 가치들을 수치화합니다.

문제는 이런 지표 만들기에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값이 매겨질 수 없는” 등등의 관용구가 있듯이, 사람들은 가치가 평가되는 것에 대해서 좀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감상적인 반발을 차치하고서도 지표 만들기는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베리 슈워츠가 잘 보여주듯이 지표화는 소외를 야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양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슈워츠가 보여준 사례 중 하나를 재기술해보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판사의 재량권에 대해서 꽤나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판사가 재량권을 발휘하면 꼴리는 대로 판결했다고 비난하곤 하죠.

그런데 재량권은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닙니다.

슈워츠가 주목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줘요.

무장강도로 기소된 남자에 대해서 한 판사는 정말 모든 재량권을 발휘해서 처벌을 막거나, 적어도 수감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요.

일단 이 남자가 강도짓을 하게 된 상황부터 좀 그렇습니다.

경기침체로 해고된 이후 계속해서 구직을 했지만 실패한 상황이었죠.

백수 생활이 길어지자 당연히 생활비가 떨어졌고, 이 남자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부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남자는 굶는 자식 때문에라도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강도짓을 했어요.

근데 이 사람이 한 짓을 보면 정말 좀 딱한 게 느껴집니다.

일단 진짜 총을 쓰지 않았어요.

진짜 총을 구해본 적도 없고, 총을 다룬 적 없는 자신이 진짜 총을 썼다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이런 선택을 한 거였죠.

게다가 이 사람은 강도짓을 하기 전까지 꽤나 오랫동안 거리를 배회하면서 주저했습니다.

결국 강도짓을 했지만, 그때도 너무 허접해서 쉽게 제압당했고요.

어쨌든 무장강도였고, 표준적인 형량 지침에 따르면 이 사람은 수감되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이 사람이 수감되는 게 큰 문제를 야기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밖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될 거고, 이는 비극일 수밖에 없죠.

또한 이런 미숙한 강도가 수감 생활을 하면 숙련된 강도로 나올 가능성이 높죠.

게다가 강도짓을 당한 사람이나 경찰 모두 이 사람의 상황을 듣고서 유감을 표했고, 강도짓을 당한 사람도 이 사람의 강도짓의 허접함 등을 강조하며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니 괜찮다는 거죠.

판사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해서, 무죄는 아니지만 적어도 수감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 판결내렸습니다.

모든 게 잘 해결된 것 같아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검사 측은 반발했고, 연방 법원에서는 판사가 표준 형량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징계를 내렸거든요.

판사는 현타가 와서 그냥 판사직을 그만뒀습니다.

이런 재량권이 없다면 자기가 판결 내릴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판사는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이런 자신의 재량권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했어요.

물론 그 남자는 많은 사람 눈에 딱해 보이고, 아마도 이런 관대한 판결에 감사함을 느끼며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지는 아무도 모르고, 판사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판사는 아무 때나 재량권을 사용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이런 결단이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냥 속은 것일 수도 있고, 이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죠.

재량권을 남용하면 당연히도 문제겠지만, 이런 특수한 사례에서라면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고 판단하고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근거가 법적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객관적인 증거일지는 모르겠지만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해서 말이죠.

그런데 표준적인 형량 지침은 이런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구체적인 사건에 부합하는 판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슈워츠는 이를 비난하는 거고요.

승철 샘 논문에서 등장하는 “어공들”도 비슷한 얘기를 하죠.

지표화는 재량권을 없애고,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한다고요.

재량권은 당연히 비리를 가능케 할 수도 있겠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반박하면서요.

승철 샘은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도, 지표화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죠.

 

승철 샘이 지표화를 옹호하는 것은 전략적인 공략이 필요한 선택입니다.

사람들에게 지표화가 가진 장점들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만 해요.

가치를 수량화하는 것에 대한 의혹들을 물리칠 수 있어야만 하고, 고정적인 지표가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표의 필요성을 잘 옹호해야만 합니다.

이게 왜 필요한지를 잘 얘기해야 하는 거죠.

승철 샘은 이런 문제들을 짧은 분량 안에서 적절히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지표가 요구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포터가 <숫자를 믿는다>에서 보여준 것처럼 지표가 힘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포터는 꽤나 놀라운 주장을 하죠.

지표가 사실을 잘 보여줘서, 지표가 실제로 합리적이어서 세상이 숫자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포터는 주장합니다.

숫자로 돌아가는 것은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의 현대 사회 속에서 거시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수적인 언어여서라는 거죠.

다른 방법으론 결정이 안 됩니다.

결정자가 너무 많은데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전문가로 만들 수는 없고, 애초부터 그런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체계거든요.(세넷 말마따나 현대 사회에서 정치인들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길 요구하는 것은 멍청한 짓거리입니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모순되는 주장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지표는 필요합니다.

어공들이야 특정한 기관에서 실무를 보니까 재량권을 얘기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런 사업 자체를 기획하고, 해당 사업의 존폐 및 확대를 결정하는 정치가 및 고위관료는 실무자일 수 없습니다.

결국 돈을 따오기 위해서라도 보여줄 게 있어야하죠.

그러니 지표는 필수적입니다.

게다가 승철 샘이 언급하듯이, 요즘은 이런 지표화 자체가 매우 일반화되어 있고, 이것의 확대적용은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페어 책을 읽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지만) 요즘은 ESG 경영이니 뭐니 하는 게 유행하고 있거든요.

논문에도 언급되듯이 ESG 경영은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다루고, 이를 보여줌으로써 투자를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이런 전략이 유용할 수 있는 것은 공공 펀드나 투자자들이 그런 것들을 중요시하는 덕분이고요.

그런데 이런 투자가 이뤄지려면 다른 투자에서처럼 지표가 필수적입니다.

투자자들이 기업 하나 하나를 연구하고 투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저런 투자도 결국 지표를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좋은 지표가 있을 때에만 확장력을 갖죠.

승철 샘은 이런 맥락들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결국 지표화는 이런 거시 규모에 부합하는 장치이고, 이런 장치 없이는 거시 규모의 활동/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이런 주장을 할 때 페어는 활용 가치가 큽니다.

저런 거시 규모의 활동/수행이 여러모로 사회적이고, 공적이며, 정치적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도우니 말이죠.

페어는 저런 지표를 통한 수행이 억압, 규율, 통치로 단순화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시민들의 주체화 기회일 수 있으니까요.

분리되어 있는, 그래서 정치적 우울에 빠진 시민들에게는 연합의 기회이자 실력행사의 기회가 되거든요.

그러니 이런 영역을 방치하거나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불합리하죠.

승철 샘은 이런 걸 연구 배경으로 보이면서 저 세계에 뛰어 들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려고 합니다.(이런 “당연시”는 전략적입니다. 승철 샘은 이런 전략적인 선택을 전술적으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실행합니다. 방금 얘기한 것처럼 논문 구조 상 연구 배경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제시키고, 이런 논의를 위해 꽤나 결정적인 테제들을 증명하지 않고 “~~는 아닐까?”라는 화법으로 서문에서 전제시키고 있죠. 음흉하지만 논문 특성상 필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훌륭한 선택입니다)

 

일단 필수성을 전제하고, 두 문제, 즉 가치를 수량화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는 의혹과, 저런 지표가 불합리한 결정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극복하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죠.

이걸 보이는 방식이 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걸 위해서 이론적인, 실증적이고 많은 분야를 포괄하는 방식의 연구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합니다.

그러니 승철 샘은 하나의 사례 가지고 반전되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특정 지표를 만드는 일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그냥 숫자일 뿐이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구체적인 현장과 맞닿아 있으면서 그 속에서 합의된 결과를 제시할 때입니다.

당연히 지표는 외부에서 갑자기 강요되어 구체적인 업무 현장의 능동성과 실용성 모두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표가 효율적으로 생산되면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과학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듯이, 지표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지표를 유지보수하며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간다면 저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창출합니다.

지역과 기관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는 현장 경험들이 공유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공유된 경험들을 토대로 원래 수행되고 있던 기획들을 성찰하고 발전시킬 수도 있고, 이전의 방식들에 대해서 재검토를 하며 개선의 여지가 생겨나죠.(실무가들의 재량권은 여러모로 한계적입니다. 사법 영역에서는 뭐 저걸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회 변화에 실시간으로 반응해야하는 사회 투자 영역에서는 실무가들의 재량은 진정성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한계적입니다. 더 잘 할 방법을 계속 찾아야하고, 좋은 기업을 계속 발견할 수 있어야하거든요. 충분히 역량이 뛰어나고 충분히 진정성이 있는 실무자라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최상의 행위자일 수 없습니다. 혼자라면 말이죠. 다양한 경험들을 소통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업무를 변경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경구에서처럼 자신의 경험으로 배우는 사람은 똑똑한 게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남들의 경험으로 배울 수 있어야 똑똑한 겁니다)

승철 샘은 지표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의혹과 비판을 극복하려 합니다.

물론 이런 사례는 특수한 거죠.

대부분의 경우 지표 만들기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 의해 쓰레기 같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 사례가 엄청나게 이상적인 사례인 것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이루어진 사례이고, 천사 같은 인간만 등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수행된 사례거든요.

그러니 힘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충분히 노력한다면 지표 만들기는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개선하면 되는 것이고, 처음에는 임의적일지라도(예컨대 특정 지표의 점수 비율 같이 설정하자면 애매한 문제들), 그런 임의성의 결과물들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수치를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지표라는 장치는 그 자체로 중립적이고, 잘만 활용한다면 훌륭한 도구라는 소박할 수 있는 진실을 승철 샘은 인류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해당 도구에 종속되지만 않는다면, 재량권도 침해하지 않을 수 있고, 재량권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게 도울 수도 있다는 증명과 함께 말이죠.

흥미롭게도 승철 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일루즈처럼 엄격한 사회학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냥 사례로 보여주죠.

사례는 보통 증명이 아니지만, 때로는 사례는 좋은 증명이 됩니다.(사실 사례 제시도 논증의 한 형태입니다. 성훈 샘의 사례 논증 논문이 이를 잘 보여주죠)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증명 앞에서는 운동을 보이는 것이 최상의 증명이듯이, 때로는 논리보다 사례가 더 큰 증명일 수 있습니다.

논문이고, 한계적이겠지만, 힘 있는 증명을 승철 샘은 수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건 각을 잘 잡아야지만 가능하죠.

전 이런 게 좋은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암튼 재밌게 읽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