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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숀케 아렌스의 <제텔카스텐> 추천

연구실에서 만나 얘기할 때 제가 <제텔카스텐>을 잠깐 언급했었는데요, 그 책 얘기를 꺼낸 이유를 그때 얘기하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그 책 얘기를 꺼낸 이유는 매우 소박합니다.

부담 갖지 않고 평소에 재밌게 읽었던 책을 얘기하시면 된다는 얘기를 하려고 언급했던 겁니다.(그리고 이게 루만적인 공부법 아니겠냐는 식의 언급이었져ㅋㅋ)

다만 이런 소박한 이유를 넘어서 그 책을 통해 연구가 무엇인지를 얘기하고 싶군요.

보통 연구를 계획적으로 한다고 치면, 특정한 시점까지 뭘 읽고, 뭘 하고 하는 식으로 계획표를 짜고, 이에 맞춰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논문 지도 같은 것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고 말이죠.(이 날까지 초고를 작성해오라는 식의 과제를 주고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지도)

그런데 이런 식의 “체계적인” 연구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고 그걸 참고해서 초고를 쓰다가 “아! 내 주장은 그냥 틀린 거잖아?”라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게 된다는 게 그것입니다.

사실 저런 식의 체계적인 연구는 연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연구란 것은 언제나 증명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증명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런 식의 관점에서는 진행 중인 연구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요.

그냥 어느 시점까지 성실히 뭔가를 하면 뭔가가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애초부터 연구의 실험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죠.

 

당연히도 저런 식의 연구관은 문제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적인 연구는 저런 종류의 것일 수 없습니다.

전 문제의식들이 먼저 확립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는 특정한 주제, 특정한 논점, 특정한 논증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다양한 문헌들을 그냥 손가는대로 읽으면서 자신의 문제의식과 그런 책들을 공명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정확히는 이런 식으로 잡다하게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주제와 문제를 찾아내고, 그런 주제와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독서의 폭을 계속해서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시켜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만 자신의 핵심 문제의식 및 핵심주장을 다양한 영역에 걸쳐 일관적인 문제/주장으로 확립할 수 있고, 이런 것만이 일반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연구일 수 있기 때문이죠.

 

전 이런 식의 관점을 형성하는데 <제텔카스텐>이란 책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때 언급한 거였습니다.

사실 그래서 저 책을 그냥 대충 후루룩 읽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뭐 사실 기본 주장들은 어쩌면 체계이론적으로 당연한 것일 수 있거든요.

제가 저 책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저 책에 담긴 기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저 책에서 소개하는 공부법 자체도 아니고요.

저 책을 통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루만 이론을 통해 “학습”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저 관점을 통해서 제가 제안하고 싶었던 입장은, 체계이론을 대상적으로만 이해할 게 아니라, 자신의 체계이론 연구 및 활용을 체계이론적으로, 체계이론의 학습 및 활용을 재귀적으로 관찰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뭐 이런 관점을 공유해보자는 제 의견과 별도로도 저 책은 훌륭합니다.

저 저자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는 게 전 좀 신기한데... 저 책은 루만 입문서로 탁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루만에 입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루만처럼 공부해보는 일이고, 루만처럼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입니다.

그래야 루만 이론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 수 있거든요.

이런 루만 입문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제텔카스텐>은 학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들을 잘 참조하며 현대적인 학습관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잘 제시해줍니다.

저자는 이를 인상적인 사례들과 함께 제시하는데, 그런 사례들은 알면 좋습니다.

 

하여간 저 책을 주르르륵 읽고 넘기는 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얘기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