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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이토 고헤이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이 책 미국에서 꽤나 화제가 되고 있다더군요.

궁금해서 읽어보니 화제가 될 만합니다.

책 자체도 수준이 높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맑스 해석을 하거든요.

그러니 이 책은 “해석사적 맥락” 속에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수행하는 “실천”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단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얘기하고 싶군요.

이 책은 당연히도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를 맑스적 생태사회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니까요.

이런 주장 자체는 저에게 별로 흥미롭지 않습니다.

전 루만을 싫어하지만, 루만의 분석 자체에는 꽤나 많이 동의하고, 루만이 <생태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제시한 문제 상황 인식에 저 또한 동의하고 있습니다.

루만의 진단처럼, 오늘날의 생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학문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죠.

당연히도 전 사회학자가 아니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극복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생각하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극복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무 어렵거든요.

그러니 당연히도 사이토 고헤이의 “이데올로기” 자체에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담론으로 생태적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겁니다.

사이토의 작업은 그러니 저에겐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이토의 작업에 회의적인 것은 사이토의 작업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연구를 가져와도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긴 어려울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죠 뭐.

루만 말마따나, 이 문제는 너무나도 대규모의 문제라 담론으로는 해결 불가능합니다.

당사자들이 너무 많아서, 담론을 가지고서 당사자들을 통합할 수가 없거든요.

뭐 그러니 사이토에게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맑스주의 해석이 오늘날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지를 따지는 건 중요치 않은 문제란 거죠.

사이토의 해석이 현실적인 극복을 가능케 하는지와 별도로, 그의 해석과 그의 비전의 의의를 얘기해야만 합니다.

 

일단 사이토가 생태적 해석을 하는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를 생태적 사상가로 보는 건 정말 최근 조류입니다.

뭐 사실 이런 해석 자체는 꽤나 이른 시기부터 나왔습니다.

슈미트의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은 나온지 꽤 되었거든요.

다만 슈미트의 책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니 사이토가 서문에서 제시하는 생태적 해석의 계보에서 슈미트를 배제한 건 우연일 수 없는 거죠ㅋㅋ

사이토 말마따나 맑스를 생태적 사상가로 보는 해석은 버켓burkett의 <마르크스와 자연>,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과 함께 80-90년대에 등장했다고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 조류는 좀 문제가 있었어요.

일단 맑스 사상을 생태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좀 파편적이었습니다.

보통 초기 저작에 등장하는 물질대사(전 영어권 연구서를 따라 막연히 “물질대사”의 원어가 ‘Metabolismus’일거라 생각했는데, 사이토 책을 보니 원어는 ‘Stoffwechsel’더군요ㅋㅋ) 표현에 근거해서 좀 파편적으로 맑스 사상을 말했기 때문이죠.

초기 저작에서 그런 류의 문제가 고민되고 있다는 건 보여주었지만, 그런 문제의식이 맑스 사상 자체와 무슨 상관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에서도 분명 생태적 위기는 다뤄지고, 이게 “자본주의 비판”과 연결되는 건 분명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는 데 좀 실패했습니다.

사이토는 이런 문제 상황을 타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들이 실패한 것은 저런 단편적인 구절들을 근거로 맑스 사상을 추상해서 문제였다는 것이고, 생태적 문제에 대한 맑스의 연구를 단순히 “생태적 위기”의 가능성에 대한 진단으로 이해해서 문제였다는 것이죠.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의 사상은 부차적으로 “생태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생태학적이었습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자체가 생태학적으로 근거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런 주장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사이토의 기법이 정말 신통방통합니다.

일단 사이토가 극복해야할 문제가 있어요.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 사상의 본질은 “생태사회주의”입니다.

그런데 맑스를 이렇게 해석한 역사는 매우 짧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주장은 사이토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죠.

이게 참이라면 당연히 사이토 해석의 독창성은 담보될 수 있겠지만 사이토에게 모순이 생깁니다.

사이토가 자신의 해석을 올바른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이토의 해석이 정말로 독창적인 해석이라면, 그건 “맑스주의”일 수 없습니다.

연속성은 없고, 단절만 있게 되기 때문이죠.

사이토는 나름 이 문제를 열심히 해결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전장으로 사이토는 의도적으로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을 선택합니다.

그쪽은 “새로운 맑스주의”로 정립된 적 있는 조류이니, 그것과 대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할 경우 마찬가지로 “새로운 맑스주의”로 세례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죠.

이런 판단은 전략적으로도 훌륭하고, 사이토의 비판이 정말 신랄하고 신박해서 전술적으로도 완벽합니다.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적들과 싸울 뿐만 아니라, 승리를 거두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적들에게 원하는 심리적 효과를 성취해내고 있는 거니까요.(한 미국 학자가 사이토 책 1장에 흠뻑 빠진 건 우연이 아닙니다. 실제로 개쩝니다ㅋㅋ)

이걸 좀 설명해보죠.

 

사이토는 맑스의 중심 개념으로 “물질대사”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대사는 단순히 생리학적인 소화-흡수 활동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원어 Stoffwechsel는 물질변환, 소재변환을 의미하고, 맑스는 이를 Formwechsel, 즉 형식변환, 형태변환이란 단어와 대비하며 사용합니다.

이는 사회적인 “교환”의 자연학적인 번역에 해당될 개념이란 겁니다.

사이토는 해당 개념이 맑스에게 있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를 보여주는 방식이 재귀적입니다.

그니까 맑스의 사상을 물질대사적인 차원에서 해석해낸다는 겁니다ㅋㅋ

이런 “적용”은 사이토에 따르면 자신만의 접근이 아니라 최근 등장한 맑스 해석 조류와 공명하는 겁니다.

국내에 소개된 미하엘 하인리히로 대표되는 새로운 조류에서는, 맑스의 사상을 관념적, 철학적, 추상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맑스 해석에서 “소재Stoff”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이는 사이토 피셜인데 전 설득력 있습니다)

맑스 해석에서 소재를 강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맑스의 사상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맑스의 사상을 어느 시점의 특정 구절로 환원할 게 아니라, 맑스가 다루는 다양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며,—맑스가 자본주의를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다룬 것처럼—변증법적으로 다루어야한다는 거죠.

사이토는 이런 새로운 조류를 한스-게오르크 바크하우스와 헬무트 라이헬트의 “자본의 논리”, 미하엘 하인리히와 잉고 엘베의 “새로운 마르크스 독해”, 크리스 아서와 토니 스미스의 “신변증법”으로 소개하는데, 이런 소개에서부터 이들이 논리적인 차원에서 소재들을 통합해서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죠.

이처럼 사이토는 자신의 해석 방식을 이러한 새로운 조류, 그리고 올바를 수밖에 없는 조류, 맑스의 사상을 맑스의 정신으로 독해하는 조류로서 제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왜 갑자기 “생태”, “자연” 따위를 말해야만 하는가죠.

 

사이토는 자신의 해석적 입장을, 과거의 인간주의 해석의 “왜곡”과 대립시키며 정당화합니다.

과거 인간주의 해석은 <경제학-철학 초고>에 입각해서 맑스를 해석했습니다.

사이토는 이러한 해석을 체계적으로 비판합니다.

1) 인간주의 해석은 초기에서 발견될 수 있는 특정 측면을 가지고 맑스 사상 전반을 얘기하는 오류를 범한다.

2) 인간주의 해석은 <경제학-철학 초고>의 생산 기반인 <파리 수고>를 고려하지 않고, <경제학-철학 초고>가 마치 독립적으로 저술된 저작인 것마냥 취급하는 오류를 범한다.

3) 인간주의 해석은 <경제학-철학 초고>의 생산 기반인 <파리 수고>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방식에 대한 맑스의 주목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4) 인간주의 해석은 맑스가 이후 명시적으로 공격하는 “관념론적”,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맑스의 사상과 혼동하며 맑스 사상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처럼 사이토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전장에서 문헌학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상 전반에 대한 해석까지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끌어올림”은 당연히도 본인이 제시하는 재귀적 정당화 가능한 해석과 대립되죠.

맑스에 대한 맑스적 해석을 취하지 않아 문제였고, 이는 맑스를 맑스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본인의 주장을 잘 보여준다는 겁니다.

사이토의 이런 해석적 규범 주장은 소박한 게 아닙니다.

사이토는 자신의 규범으로 호네트 같은 대가들을 포함해서 근본적으로 틀린 해석 방식으로 비판하는 걸 겨냥하고 있거든요.

호네트 같은 쪽은 4)에 해당되는 오류를 그대로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토에 따르면 문제 설정부터 틀려먹었기 때문이죠.

맑스에게 중요한 건 소외라는 사태 자체가 아닙니다.

소외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본질과, 그런 인간의 본질을 훼손하는 어떤 질서를 주장하는 건 맑스가 비판한 포이어바흐와 똑같은 주장이고, 맑스는 그런 비판은 근본적으로 문제적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죠.

사이토가 문헌 근거를 통해 잘 보여주듯이,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관념적 비판이 아닙니다.

포이어바흐의 비판이 문제적이라고 맑스가 판단했던 것은 포이어바흐의 진단이 틀렸다고 맑스가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가 틀린 것은, 그러한 오류가 어떻게 사회적 실재로 생산/재생산되는지를 연구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인간이 “신”을 발명하며, 그러한 환상에 종속되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인 정말로 올바른 분석일지라도, 그러한 소외를 인간들이 어떻게 내재화하며, 지속적으로 생산/재생산하며 역사를 갖는지를 설명하지 않았기에 문제적이었다는 것이죠.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의 핵심 문제의식은 저러한 사회적 실재가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고, 발전하는지를 제대로 분석하고, 이에 맞춰 실천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맑스가 비판하는 사고만 하며 실천하지 않는 사상을 비판했던 것은, 저런 관념론적인 비판가들이 실제적인 분석에 입각하여, 저러한 실재의 생산/재생산을 변혁(Reform으로 말하고 싶군요ㅋㅋ “재구성”이면서도 “변형”으로 말이죠)하려 하지않아서였고요.

그러니 맑스에게 있어 문제가 있다는 걸 이론적으로 보여주는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어떤 조건에서 문제가 되는지를 제대로 분석해내는 것이죠.

사이토는 맑스가 초기부터, 다시 말해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완전한 것으로 보던 시기부터 이러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포이어바흐의 철학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의식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 그는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사태를 분석하려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3)에서 다뤄지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사이토가 지적하는 것처럼 <경제학-철학 초고>은 전근대 사회체제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체제와 전근대 사회체제를 비교한 후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초반부에서 분명 전근대 사회체제가 분석됨에도 저런 “인간주의 해석”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없는 것처럼 무시되었고, 단 한번도 발췌되지 않았다고 사이토는 비판하죠.

사이토는 저런 전근대 사회체제 분석이 맑스 사상에서 왜 중요했고, 논리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저런 “무시”를 철저히 반박합니다.

맑스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악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전근대에는 문제가 없었고, 근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자본주의가 악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수행되는 인간들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상호작용을 바꾸어서였고, 이런 변화는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지만 체계적인 문제를 야기한다고 맑스는 보고 있기 때문이죠.

전근대에도 당연히 소외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전근대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전근대적 체제 안에서 극복될 수 있도록 다뤄집니다.

전근대 체제에 “문제가 없는” 것은, 그것이 이상적이서도, 낭만적이어서도, 유일하게 올바른 답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체제의 작동을 분석했을 때, 문제 발생과 문제 해결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죠.

초기에 맑스는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비교 분석과 분리될 수 없죠.

맑스는 이후에 자본주의 또한 문제 발생과 문제 해결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본주의가 가진 유연성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문제를 “극복”하는지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선회하죠.

사이토에게 있어 이는 “전회”, “단절”, “변절” 따위가 아니며, 초기부터 일관된 실제적 분석에 입각한 문제 인식 및 실천으로서의 맑스주의를 잘 보여주는 예일 수 있는 반면, 인간주의 해석에서는 그럴 수 없죠.

결국 맑스를 맑스가 다룬 “소재”에 입각해서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옳다는 것이고, 그것이 새로운 해석 조류란 것이죠.

이를 사이토는 인간주의를 적으로 삼음으로써 인간과 대비되는 부분에 주목케 하는 방식으로 맑스 해석에 삽입합니다.

인간주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인간이 아닌 것들을 보게 만듦으로써 말이죠.

이런 식의 비판 속에서 사이토는 맑스의 논의에 등장하는 자연학, 생리학 논의들 일반을 맑스의 “소재”로 취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소재들에 근거하여, 기존의 새로운 해석 조류들을 비판하죠.

왜 이런 소재들을 맑스가 사용하는지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고 있고, 바로 이를 파악하지 못하니 맑스의 “물질주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근거에서 말이죠.

사이토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실천”합니다.

 

 

 

 

 

사이토 해석은 내용적으로도 흥미로운 게 많지만, 이는 이후에 제 관점에서 다시 재서술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번 소개는 사이토 해석의 “실천”을 찬양한 것으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