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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철학하기

<리오타르의 『쟁론』에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증언과 철학>에 대한 코멘트
다음 링크에서 열람가능
http://www.riss.or.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30db22dfc2e5ef58ffe0bdc3ef48d419&keyword=%EC%A1%B0%EC%A7%80%ED%99%98%20%EB%A6%AC%EC%98%A4%ED%83%80%EB%A5%B4 

http://www.riss.or.kr/search/detail/DetailView.do?control_no=30db22dfc2e5ef58ffe0bdc3ef48d419&keyword=%EC%A1%B0%EC%A7%80%ED%99%98+%EB%A6%AC%EC%98%A4%ED%83%80%EB%A5%B4&p_mat_type=be54d9b8bc7cdb09

www.riss.or.kr


 
논문을 읽어보니 통하는 게 많은, 혹은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시체 확정의 문제를 다루는 언어철학적 논의는 제 논문에서 다뤄지지 않았지만, 제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철학을 연구하게 된 것 자체가 저 논의 때문이었으니(전 크립키를 읽고 철학사 연구를 결심했습니다) 더더욱 그렇습니다.
 
일단 논문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분량상의 불균형 정도가 있겠네요.(5장만 너무 기니...)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당연히도 논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논의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리오타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리오타르가 논의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올바른 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석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해당 문제를 어떻게 또 다르게 다룰 수 있는지를 얘기하고 싶네요.
 
일단 제 시작점은 논문의 주제이기도 한 “저항가능성 증명”에 대한 재고입니다.
저항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매우 기이하고 무의미합니다.
저항의 가능성은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최고의 반박은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듯, 저항의 현존이 저항가능성에 대한 최고의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저항가능성에 대한 반박이 아닙니다.
그건 그 사람들 생각에 불과하죠.
저항이 현존하지 않더라도, 저항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있을 수 있다면 저항은 가능합니다.
 
아마도 증명이 필요한 것은 이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몇몇 장르가 있어서일 겁니다.
역사학이나 경제(학)이 그 예일 테고요.
하지만 저 장르들이 저항을 배제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항이 있으면 이미 저항은 가능한 것이고, 그들의 말은 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한 리오타르의 <쟁론>에서의 입장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식의 주장은 그냥 현대적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멍청한 입장입니다.
끊임없이 효력 있는 통제를 내놓겠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저항할 테니 말이죠.
저런 식으로는 절대로 그들의 목적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리오타르는 별도의 “증명”을 내놓습니다.
전 이런 별도의 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좀 더 자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오타르의 증명은 구체적인 무엇인가의 현존 자체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존재자들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를 제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자, 그러한 장소, 관점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장을 지속시키기 위한 건물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리오타르가 특정한 장르들을 공격하는 것은 해당 장르들의 월권을 비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리오타르가 건립하는 장의 설립 조건과 충돌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에 가깝습니다.(애초에 모든 장르는 월권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리오타르의 “증명”이기도 하니, 애초부터 전자는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리오타르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런 부정적인 증명이 아니라 긍정적인 증명, 해당 장의 조건을 제시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리오타르는 지시체 고정 가능성 문제를 경유하여, 인민과 역사가 해당 장의 주체와 활동임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를 보이는 일을 “쟁론의 증언”으로서 철학의 임무 비슷한 것으로 내세웁니다.
리오타르는 철학함이 본질적으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활동/투쟁이며, 그래야만 철학일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리오타르에게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리오타르의 기본적인 입장에 동의하고, 리오타르가 이런 입장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제안하는 방식에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리오타르가 제공하는 경로들이 저에게 익숙하기도 하고(지시체 확정 문제, 역사성, 칸트 철학, 서사 이론, 장르 이상이기도 하고 이하이기도 한 산문학, 전쟁의 언어 등등), 저 또한 저런 식의 배열을 선호하니 이는 뭐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 불만족을 느끼는 것은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해당 장을 건축하는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수행했어야하고, 철학적 수행을 위해 어떤 기술들이 활용되면 좋을지를 좀 더 자세히 말했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중요합니다만, 그냥 감정으로는 리오타르가 의도한 증명이 수행될 수 없습니다.(여기서 감정은 앞의 “저항하려는 사람”으로 제가 표현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항을 하게 만드는 원동자인 것이죠)
현존으로서 증명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존으로서의 증명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애초에 리오타르가 수행하려는 증명과는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리오타르가 증명해야하는 것은 감정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 중요성이 리오타르가 역설하는 철학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는 “증명”까지 필요한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조건을 제시하면 상식에 의해 연역 가능해지는 진리이니)
증명해야했던 것은 저 감정들을 가지고, 특정한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철학적으로” “증언”하는 일을 한계 짓는 일이었어야 합니다.

아마도 리오타르가 이를 저어했던 것은 장르가 아니면서도 한정하는 일이 역설적이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전 이를 극복할 방안이 있고, 그것이 프랑스 전통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리오타르를 비난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오타르가 제시해야했던 것은 스탈 부인이 창안한 제3의 감성형식으로서의 멜랑콜리였습니다.
리오타르의 증명이 증명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감정, 인민, 역사가 연결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연결을 장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죠.
하지만 연결의 가능성은 증명되었어야 합니다.
여기서 증명되어야할 가능성이 바로 감성 형식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나 숭고로는 저항의 가능성은 불충분하게 증명됩니다.
아름다움은 당연히 안 되고 리오타르는 숭고에 불충분함을 느껴 칸트의 역사철학에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리오타르는 저항에 적합한 형식을 제안했어야만 합니다.
물론 감성 형식을 고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움과 숭고만 얘기된 것은 우연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저 두 형식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스탈 부인이 그런 숭고한(?) 시도를 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리오타르를 깔 수 있는 겁니다.
스탈 부인을 모를 수 없는 리오타르가 스탈 부인처럼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죠.
리오타르는 스탈 부인처럼 제3의 감성형식을 창안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스탈 부인이 제안한 것처럼 “멜랑콜리”는 아닐지라도 말이죠.(개인적으로 “멜랑콜리”가 리오타르의 기획이나 니체의 반시대적 철학에나 가장 적합한 감성 형식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실제로 니체는 비판적 역사학을 멜랑콜리적 정서와 연동시킵니다)
 
막상 꺼내보니 별 얘기는 아니네요.
말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p.s. 특정 장르의 전횡 관련해서는 전 좀 다른(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접근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런 장르들의 전횡을 막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런 전횡이 정치가 아니라는 것은 차치하고, 저런 전횡을 막는 것은 그렇기에 현실 정치의 주요 기능/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뒤르켐을 좋아하는 것은 뒤르켐이 바로 저런 전횡을 막는 장치로서 정부를 생각하는 것을 [정치]사회학적으로 제안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뒤르켐의 정치는 장르보다 더 동일성을 요구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사실 장르는... 언제나 그 이상과 그 이하가 있어서... 뒤르켐의 정치는 장르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장르가 아닌 것이기도 합니다... 장르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근데 그 내용을 채우는 방식이 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전 이런 문제를 다루는 논의가 정치인류학, 그 중에서도 전쟁을 “구조”에 복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루려는 연구들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각합니다.(사실 이 쪽은 거의 없어서... “진행되었었다”가 맞을지도... 섀그넌 말로는 뒤르켐 이후 없고... 섀그넌도 이게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의 현장 경험 속에서 보이는 작업만을 수행합니다) 이를 위해 같이 정치인류학 책을 보았으면 하네요.